피란민 애환 담긴 '100년 전통 밀면'에 더위도 줄행랑

위성욱 2022. 7. 1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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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부산 남구 우암동 소막마을. 부산 밀면 원조 음식점으로 알려진 ‘내호냉면’ 입구 골목에는 점심시간 전부터 10여m 가까이 줄을 서 있었다. 80여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테이블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출입구 곳곳에는 내호냉면이 소개된 허영만의 『식객』만화가 붙어 있었다. 또 음식점 주인이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어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달 22일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내 내호냉면. 점심시간 식당 내부를 가득 채운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송봉근 기자

이곳에 온 손님 대부분은 수십 년 단골이었다. 김석웅(67)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 손 잡고 이 집에 밀면 먹으러 왔는데 지금은 내 아들과 손자까지 4대가 단골이 됐다”며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해 영화감독 곽경택, 만화가 허영만씨 등 유명인사 중에 이 집에 안 와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산에서는 밀면 음식점으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곳”이라고 말했다.

부산은 다양한 먹거리가 있지만 가장 대중적인 음식을 꼽으면 여름에는 ‘밀면’ 겨울에는 ‘돼지국밥’을 빼놓을 수 없다. 두 음식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피란수도가 되면서 생겨난 음식이라는 점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북한군이 내려오자 이승만 정부는 수도를 대전(6월 27일)·대구(7월 16일)를 거쳐 부산(8월 18일)으로 옮겼다. 그러자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1945년 광복 당시 28만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950년 말 89만명으로 급증했다.

고기·뼈 등으로 육수를 내고 여기에 양념장을 가미해 만든 내호냉면의 물냉면. 송봉근 기자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집 지을 곳이 마땅찮았다. 피란민들은 가마니·판자 등을 이용해 산비탈 등에 움집과 판잣집을 지었고 그렇게 생긴 대표적인 피란민촌이 바로 내호냉면이 있는 소막마을과 서구 아미동이다. 소막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팔려가는 소가 이곳 막사에 모였던 것에서 유래했다. 한국전쟁 때는 이곳 우사(牛舍)에 피란민이 들어가 살았는데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전쟁 이전에도 설렁탕·곰탕·소고기국밥이 있었지만 1950년대에는 소고기 대신 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와 밥을 말아서 내주는 돼지국밥이 부산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했다. 당시 부산 경제는 육체노동 위주의 산업이 주를 이뤘는데 고강도 육체노동을 견딜 수 있는 단백질을 쉽게 섭취할 수 있는 돼지국밥이 인기를 끈 것이다. 반면 부산 밀면은 이북 피란민이 구호 식품으로 나온 밀가루를 냉면 대용으로 빚어 만든 음식이다.

내호냉면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내호냉면은 1919년 10월 개업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가게다. “함경남도 흥남 내호리에서 장사했어. 그땐 ‘동춘면옥’이었대, 내호시장 입구 흥남부두 앞에 있었어. 외할머니(1대 대표 고 이영순씨)가 어머니(2대 대표 고 정한금씨)랑 같이 농마국수(‘함흥냉면’의 이북 이름)를 팔았는데 그때도 아주 유명했대.” 가게 앞에서 대기 번호를 불러주며 손님을 맞고 있던 내호냉면 3대 대표 이춘복씨 남편 유상모(72)씨 얘기다.

그는 “나랑, 외할머니랑 아버지·어머니, 이모·외삼촌 넷, 이렇게 8명이 흥남에서 미군 수송선 타고 피란을 왔지. 부산에 도착했는데 피란민이 너무 많다고 거제도에 내려줬대. 거제도에서 51년에 부산 보수동으로 건너왔다가 53년 우암동으로 들어왔는데 그해 지금의 이 집을 열게 된 거야.” 1953년 3월 고향 이름을 딴 내호냉면이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1·2대 대표들이 냉면을 주로 팔았으나 이후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7대 3의 비율로 만든 ‘밀냉면’을 함께 만들어 팔았는데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밀면’으로 불렸다는 것이 유씨 설명이다.

지금 내호냉면은 유씨 아들 재우(46)씨가 4대 대표를 맡아 5대 대표가 될 그의 딸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날 두 사람은 주방에서 면을 뽑고 육수를 통에 채우고 나온 음식을 홀로 배달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유 대표는 2018년 3월부터 내호냉면 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딸과 비슷하게 20대 후반부터 식당에서 어머니에게 반죽부터 육수·양념까지 차례대로 조리법을 배웠다고 한다.

유 대표는 “할머니께서 면을 뽑는 솥도 원래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시고 이사도 절대 못 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이 골목 주변 옆집 앞집을 하나씩 사서 식당을 늘렸는데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있었던 것이 가장 성공한 비결이었던 것 같다”며 “당연히 앞으로도 내호냉면은 이 자리에서 계속 장사를 할 거고 저도 딸에게 가업으로 이것을 물려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산 밀면은 내호냉면 외에도 ‘원조’ 타이틀을 내걸고 장사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이들 전문점은 보통 고기나 뼈 등으로 육수를 내고 여기에 양념장을 가미한다. 내호냉면도 한우사골육수를 쓰는데 평양냉면 특유의 심심한 맛이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성훈 임시수도기념관 학예연구사는 “부산 밀면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 기능을 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온 피란민들이 고향의 음식, 향수를 느끼고 싶어 냉면을 만들었는데 재료 수급이 잘 안되다 보니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밀가루와 토착 음식을 결합해 새로운 음식을 만든 것”이라며 “그 당시에는 생존을 위해 먹던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부산의 문화, 정체성을 나타내는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위성욱 기자 we.su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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