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달러]글로벌 제조·무역 악화→성장둔화→달러 강세 '악순환'
[아시아경제 뉴욕=조슬기나 특파원]"달러는 우리 통화다. 하지만 당신들의 문제다(It‘s our currency, but it’s your problem)."
최근 강달러를 둘러싼 긴장 국면은 과거 1970년대 주요 10개국(G10) 회의에 참석한 존 코널리 당시 미 재무부 장관의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가뜩이나 경제 전망이 어두워지는 상황에서 달러 강세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을 한층 강하게 짓누르는 모양새다. 유례 없는 이른바 ‘달러 둠 루프(Doom Loop·파멸의 고리)’가 시작될 것이라는 경고를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유례 없는 둠 루프" 왜?JST어드바이저의 창립자인 존 투렉이 17일(현지시간) 팟캐스트를 통해 경고한 달러 둠 루프는 강달러가 글로벌 제조·무역 악화, 실질 투자 위축, 성장 둔화로 이어져 다시 안전자산인 달러 강세를 부추기는 악순환을 가리킨다.
여기에 투렉은 둠 루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요소로 최근 유럽의 상황을 꼽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위기에 처한 유럽 지역은 그 어느 지역보다 경기침체 우려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투렉은 "이는 유로화에 대한 압박을 유발해 다시 달러(가치)를 상승시킬 것"이라며 "제조업 사이클을 악화시켜 이 모든 사이클을 반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유로화 가치는 ‘1유로=1달러’의 패리티 아래로 미끄러진 상태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달러당 유로 가치가 9월 말 97유로센트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BMO 캐피털마켓의 유럽 외환 전략 책임자인 스티븐 갈로는 "외환 시장은 심각한 유럽의 경기 침체를 할인하는 과정에 있다"고 전했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강세는 전 세계적 여파가 불가피하다. 달러화로 통용되는 원자재 등 국제상품 가격이 치솟을 경우, 타 통화를 사용하는 각국 기업의 생산원가, 물가는 함께 뛸 수밖에 없다. 사실상 전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되는 상황인 셈이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들도 달러 대출 이자 또는 원금 상환 부담이 커진다. 달러화 외채가 많은 신흥국들의 금융위기 리스크도 우려된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이미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미국으로 투자금이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상황이 더 복잡해 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긴축 사이클에 진입했거나 곧 진입을 앞두고 있어서다. 이는 과거 2008년, 2020년의 강달러 추세와 현 상황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투렉이 강달러로 인한 둠 루프의 시작을 경고한 배경에도 예상보다 더 높은 인플레이션, 치솟는 원자재 가격, Fed를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의 긴축 사이클 등이 존재한다. 이는 올 들어 이미 두 자릿수 뛴 달러화 가치가 앞으로도 오를 수밖에 없는 요인들로 꼽힌다.
달러 강세는 주요국 물가 상방 압력으로도 작용해 ‘물가 안정’을 목표로 한 각국 중앙은행의 긴축 행보를 한층 가속화시킬 전망이다. 영국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의 캐서린 맨은 최근 "미국의 긴축 정책이 영국의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언급했다.
◆격화되는 역환율 전쟁
달러 강세는 이른바 ‘역환율 전쟁’도 부추기고 있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자국 화폐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역환율 전쟁에 돌입하고 있다. 스위스 중앙은행이 15년 만에 처음으로 기준 금리를 인상한 것이 대표적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추적하고 있는 55개 중앙은행들은 지난 2분기에 적어도 0.5%포인트 이상의 금리 인상을 62번 단행했다. 7월 들어서는 이 횟수가 17번 이상을 기록했다. FT는 "2000년 들어 가장 많은 숫자의 대규모 금리인상"이라며 "금융위기를 앞두고 진행됐던 글로벌 긴축을 무색케 했다"고 보도했다. 라보뱅크의 수석 외환 전략가인 재인 폴리는 "우리는 0.5%가 새로운 0.25%가 되는 전환점을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한때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자국 통화가치가 치솟는 것을 경계하는 환율전쟁을 벌였던 것과 대조적이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이후의 인플레이션 고공 행진이 이러한 변화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코로나19 봉쇄 등에 따른 공급망 차질도 각국 중앙은행의 정책 기조가 바뀌는 데 한몫했다. 오랜 기간 엔저 정책을 펼쳐온 일본 역시 조만간 엔고로 방향을 틀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달러화가 조만간 궤도 변화를 보일 것으로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당분간 달러 강세가 이어질 것"이라며 "달러 강세는 미국 소비자와 기업에도 양날의 칼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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