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건축의 800년치 압축판, 영국여왕도 방문했던 곳 [중앙선 역사문화기행]

최서우 2022. 7. 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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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극락전부터 조선시대의 대웅전까지 잇는 봉정사

[최서우 기자]

경북 안동시 서후면 576m 높이의 천등산 아래에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중 하나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봉정사가 있다. 내가 지난 번 다녀왔던 의성 고운사에 속해 있는 말사라 규모는 작지만,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오는 극락전부터 조선시대의 다포양식(목재건축양식) 건물을 잘 보여주는 대웅전도 있어서 우리나라 불교 건축의 역사를 압축하여 보여주기도 한다.

봉정사 북동쪽 암자인 영산암도 영화 <동승>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왜 영화촬영지로 각광받았는지 나름대로 보니 사찰 화려함보다 수수한 영남 고택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난 6월 25일 안동의 유구한 사찰 봉정사로 떠났다. 

극락전과 대웅전

봉정사는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나들목에서 가깝다. 나들목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서의문을 지나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좌회전해서 924번 지방도를 타자. 서후면을 지나 고갯길을 넘어 5분 정도 가다보면 삼거리가 하나 나오는데, 왼쪽으로 꺾어 5분 정도 가면 봉정사로 갈 수 있다.

안동의 대표 고찰에서 이제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봉정사. 672년 능인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수차례 중수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입구에 천등산봉정사라는 현판이 보이는 누각이 있는데, 봉정사의 이층 누각문인 만세루다. 입구에서 볼 때는 봉정사 내부의 신비함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지만 누각에 올라가면 봉정사 아래의 풍경을 훤히 볼 수 있다.
 
 봉정사 만세루
ⓒ 최서우
 
누각에 들어가니 웅장한 건물이 하나 보인다. 바로 석가모니 삼존상을 모신 대웅전이다. 그런데 다른 부속건물과 달리 세월의 흐름이 매우 느껴졌다. 무엇보다 건물 앞쪽에 툇마루가 눈에 띄었는데, 다른 건물에서 찾기 힘든 독특한 양식이다.

건축양식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으로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拱抱)로 가득한 다포양식 형태인데,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찰 건축양식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1999년부터 2001년 초 이뤄진 해체보수공사 때 조선 세종 17년(1435)에 중창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중창한 것 그대로 오늘날까지 전해졌다면 무려 6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대웅전 기둥들이 저 커다란 팔작지붕을 지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2009년에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대웅전 왼쪽에는 뭔가 특이하게 보이는 종무소가 있다. 종무소 자체가 보물 제448호인 봉정사 화엄강당이기 때문이다. 원래 승려들이 경전을 공부했던 곳으로 온돌방 구조를 갖췄다고 한다. 강당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웅전보다 기둥 크기가 작고 기둥머리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계열의 익공 양식으로 되어 있다. 1969년 해체 복원할 때 발견한 상량문에 의하면 선조 21년(1588)에 손질하여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국보 제311호 안동 봉정사 대웅전. 600년 동안 팔작지붕의 무게를 버텨낸 오래된 기둥들이 인상 깊다. 또한 대웅전 앞에 툇마루가 놓여 있는데, 상당히 드문구조다.
ⓒ 최서우
 
 보물 제448호 봉정사 화엄강당. 원래는 승려들이 경전을 공부했던 곳이다.
ⓒ 최서우
 
화엄강당 왼편으로 가면 가운데 삼층석탑 뒤로 극락전이라는 건물이 보인다. 역시 대웅전에 비하면 주심포 양식으로 단출한 건물처럼 보이는데, 무려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져 오는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이다. 1972년 해체 수리했을 때 발견된 상량문이 하나 있었는데,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건물의 지붕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중수를 하려면 적어도 100~150년은 소요되기 때문에, 적어도 12~13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극락전을 보면 옆에 있는 대웅전보다 건물이 더 새 것처럼 보인다. 1972년 해체 수리한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복원되기 전에는 대웅전처럼 툇마루와 띠살창호문이 있었는데, 이를 판문과 격자창으로 바꿔 버렸다.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런 양식이 없다는 근거로 바꿨다고 했는데, 2013년 주남철 고려대 명예교수가 고려시대 원형도 모른 채 중국풍으로 복원했다고 비판했다.
 
 보물 제449호 고금당과 국보 제15호 극락전
ⓒ 최서우
 
 가까이서 본 극락전. 고려시대 건물이지만, 오른편에 있는 대웅전보다 더 새것처럼 보인다. 이는 1972년 해체 수리 당시 채색을 새로 해서 그렇다.
ⓒ 최서우
 
나는 고건축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복원 전처럼 차라리 그대로 남기는 게 좋지 않았을까하고 조심스레 주장해본다. 그랬다면 빛이 바랜 기둥들과 벽면이 내게 800년 세월이 어땠는지를 말해주지 않았을까?

극락전 바로 왼쪽에는 승려가 기거하는 방으로 활용하는 고금당이 있다. 1969년 해체 복원 당시 상량문에 광해군 8년(1616)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네 건물을 전체적으로 보니 봉정사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사찰의 건축사를 압축적으로 말해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을 이곳에 초대한 게 아닐까 싶다.

부속암자 영산암

봉정사 대웅전과 극락전을 보고 바로 하산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북동쪽에 최근 영화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는 영산암이 있기 때문이다.

영산암으로 가보니 먼저 만세문과 같은 누각인 우화루가 반겨준다. 원래 우화루는 고금당 남쪽에 있었는데, 1969년 고금당을 해체보수하면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사찰의 위엄을 보여주는 만세루와 달리 우화루는 오히려 한옥 고택 사이에 있는 느낌이다.
 
 영산암의 입구 우화루. 원래는 고금당 남쪽에 있었는데, 1969년 해체보수하면서 이전했다.
ⓒ 최서우
우화루를 지나 보니 역시 암자인지라 부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모시고, 좌우로 나한(부처)들이 포진해 있는 나한전과 전통 삼신신앙이 결합된 삼성각이 있다. 응진전과 삼청각 앞에는 양반 고택의 사랑방처럼 보이는 관심당과 송암당이 있다.
관심당과 송암당 방문 앞을 보면 대웅전처럼 툇마루가 있는데, 어찌 보면 툇마루가 봉정사를 상징하는 건축양식이 아닐까? 송암당이라는 이름 그대로 건물 오른편 앞에는 상당히 오래된 소나무와 바위가 있어서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영산암 내부 전경. 큰 소나무 뒷편 좌우의 건물은 삼성각과 나한전, 소나무 좌우로는 송암당과 관심당이다.
ⓒ 최서우
 
 봉정사 영산암 송암당(松岩堂). 건물 이름 그대로 앞에 바위가 소나무를 받치고 있다.
ⓒ 최서우
영산암을 자세히 보니 왜 영화 제작자들이 이곳을 사랑하는지 이해가 간다. 화려하게 장식된 대웅전이나 극락전과 달리 수수한 흰색의 고택과 정원이 인간의 순수함과 잘 조화돼서 그런 게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곳에서 정주하고 있는 승려들도 송암당 앞의 소나무와 순수한 흰색으로 인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오늘날 전해지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 그리고 부속건물들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사찰 건축사를 그대로 압축해 놓은 느낌이다.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의 극락전부터, 다포 양식의 조선시대 대웅전까지. 특히 대웅전의 낡은 모습은 다사다난한 600여 년의 세월을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북동쪽 영산암은 신자들과 함께하는 화려한 본사와 달리 수수해 보인다. 아니, 어떻게 보면 스님들이 수행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서 흰색 고택에 아름다운 소나무를 놓지 않았을까? 일반인인 내가 와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고풍스러움과 순수함을 모두 느끼고 싶으면 안동 고찰인 봉정사를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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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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