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인권침해' 쏙 뺀채.."엽기적 살인마"만 부각한 정의용

정진우, 이세영 2022. 7. 17. 17:2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의용 전 외교부 장관이 17일 탈북 어민 강제 북송 결정을 둘러싼 입장문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2019년 11월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을 둘러싼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었던 정의용 전 외교부 장관이 17일 당시 결정은 정당했다는 취지의 입장문을 냈다. 정 전 장관은 “우리 법에 따라 결정하고 처리한 사안을 이제 와서 관련 부처를 총동원해 번복하는 것은 스스로 정부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강제 북송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윤석열 정부의 움직임을 ‘반정부 행위’로 규정한 셈이다.

정 전 장관은 검찰 수사 국면에서 입장문을 발표하며 강제 북송된 탈북 어민들을 “희대의 엽기적 살인마”로 규정하고, 이들의 귀순 의사를 부정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정당한 결정이었다는 강제 북송을 당시엔 왜 비공개로 진행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강제 북송은 북송 당일 청와대와 군 당국자 간 오간 '북송 문자'가 언론사 카메라에 찍히며 공개됐다.



①“北에 먼저 송환 의사 타진”…처형 방조 논란


2019년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탈북 어민을 나포해 합동 신문 절차를 끝낸 직후 북측에 먼저 관련 내용을 통보했다. 문재인 정부가 당시 강제 북송을 남북 관계 개선의 윤활유로 활용하려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이유다. 이와 관련 정 전 장관은 “(탈북 어민을) 추방할 경우 상대국의 인수 의사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북측에 의사를 먼저 타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북한의 요청에 따라 북송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는 취지가 담긴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탈북민 북송 여부를 북측에 알린 게 된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발표한 보고서 등에 따르면 이렇게 송환된 탈북민의 경우 ▲고문 ▲구금 ▲성폭행 ▲즉결처형 등의 인권 침해를 겪는다. 북송 결정을 내리고 북측의 의사를 타진한 것 자체가 사실상의 ‘처형 방조’ 아니냐는 논란을 예고할 대목이다.


②“귀순 의사 없었다”에 “나포 당시 귀순 밝혔다”


2019년 11월 강제 북송을 거부하며 몸부림치는 탈북 어민. [통일부 제공]
탈북 어민들은 구두로 귀순 의사를 밝히고, 자필 귀순 의향서까지 작성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이 살인 혐의에 대한 북한 당국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귀순 의사를 거짓으로 지어냈다고 봤다. 이와 관련 정 전 장관은 “이들은 나포된 후 (NLL 인근에서) 동해항까지 오는 과정에서 귀순 의사를 전혀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나포 작전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나포 당시) 북한 어선에 올라 조사하는 과정에서 북한 어민 2명이 구두로 분명하게 ‘남측에 귀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당시 작전에 투입됐던 인사들은 이들이 불과 5일 만에 북한으로 추방된 사실을 접하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③북한이탈주민법이 추방 근거?…조문엔 ‘추방’ 없어


2018년 북한을 방문해 백두산 장군봉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기념 사진을 촬영하는 당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정 전 실장과 서 전 원장은 2019년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의 주요 의사결정권자로 검찰 수사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공동취재단]
정 전 장관은 추방 결정의 배경에 대해선 “우리 국내법은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자는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탈북민 중 ‘살인 등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자’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내용의 북한이탈주민보호법을 앞세운 주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당 조항(9조)의 취지는 보호·지원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것이지, 법에 ‘추방’까지 명시한 건 아니다. 이때문 추방 근거로 활용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추방과 관련한 내용을 규정한 법으론 “공공의 안전을 해칠 우려가 있을 경우 강제 퇴거할 수 있다”고 규정한 출입국관리법이 있다. 하지만 출입국관리법은 외국인에 한정해 적용되기 때문에 헌법상 우리 국민인 탈북민은 애초에 적용 대상이 아니다. 만일 당시 정부가 탈북민을 외국인으로 봤다면 이는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3조에 위배된다.


④“전례 없다”며 전례 없는 강제북송 논란 자초


정 전 장관은 국내 사법절차에 따른 재판 과정을 생략하고 이들을 강제 북송한 이유와 관련 “북한 주민이 다른 북한 주민을 상대로 저지른 흉악 범죄와 관련 우리 법원이 형사관할권을 행사한 전례가 하나도 없다”고 설명했다. 또 “이들의 자백만으로는 사실상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자백 외에 살인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처벌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강제 북송 외엔 방법이 없었다는 게 정 전 장관의 설명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자백 외에 살인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당시 정부가 이들을 ‘흉악범’으로 규정해 즉결 처형이 우려되는 북한으로 추방한 정당성 역시 확보될 수 없다. 자백 밖에 없는 데 무슨 근거로 흉악범으로 확정해 강제 북송했는가라는 반문을 자초했다.

2019년 11월 탈북 어민이 타고 온 오징어잡이 어선. 정부는 당시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이유로 해당 어선을 방역했다. 결과적으로 해당 어선에 남은 살인의 증거가 모두 사라지게 됐다. [통일부 제공]

당시 수사·기소·재판 등의 정상적 형사 사법 절차를 통한 혐의 입증이 정말 불가능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탈북 어민이 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한 이후 혈흔을 지우고 페인트칠을 하는 등 증거를 인멸했다곤 하지만 범죄 현장인 ‘어선’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이유로 해당 어선을 방역해 결과적으로 증거를 없앤 것은 한국 정부였다. 당시 정부는 재판을 통해 범죄 혐의를 다투는 것을 ‘전례 없는 일’로 규정하면서, 또 다른 전례 없는 일인 강제 북송을 단행했다는 논란을 자초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