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년 역사가 순식간에 증발.. 참담한 종로 피맛골

이영천 2022. 7. 1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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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도시 재생의 역사 상징하는, 피맛길과 피맛골을 찾아서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길은 흐느끼고 있었다. 한여름 열기에 녹아내리는 종로와 달리, 그늘져 어두워진 이 길은 분명 그리 보였다. 햇볕은 물론 이젠 되돌아갈 수조차 없다는 들리지 않은 흐느낌을 낯설어진 이 공간이 쏟아내고 있었다.

이 길에 들어서면 이젠 모든 게 마뜩잖다. 십여 년 전부터 생겨난 껄끄러움이다. 빌딩 사잇길인지, 싫은데 마지못해 내어준 공간인지 상량하기 어렵다. 같이 동무하며 지역과 문화, 역사공동체를 이루던 골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서울시 종로구 피맛길과 골 얘기다.
 
▲ 변형된 피맛길 2010년을 전후하여 피맛길이 사라지고, 재개발된 빌딩 사이로 동굴처럼 변해버린 길의 흔적.
ⓒ 이영천
도시에서 '길과 골'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어내야 한다. 길은 하나의 통로이자 흐름이며, 도시 골간을 이룬다. 골은 크고 작은 여러 길이 서로 얽히고 이어져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길이 선(線)이라면 골은 면(面)이라 할 수 있다.

늘 번잡하기만 한 종로 뒷길이다. 신도시 한양을 만들면서 고관대작이 탄 말(馬)을 피(避)하라고 하급 관리들에게 권력이 내어준 능동과 융통, 관용의 길이었다. 이 길이 새로운 문화를 지어내더니, 다른 그것들과 구불구불 서로 잇대어 골을 만들어냈다. 피맛골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탑골공원에 이르는 자연스레 만들어진 '공간조직'을 흔히 그렇게 불렀다.

길에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이더니 해장국과 빈대떡, 막걸리에 생선구이를 선보이는 서민 전유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골은 청진동, 공평동, 인사동 일대에서 6백여 년을 넘겨 자리했으니 하나의 문화였고 역사였으며, 시대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했었다.

노동과 휴식, 주거와 일상 활동을 매개하던 점이지대였다. 하지만 골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시늉으로 남겨진 길은 동굴과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고, 골이 지워진 자리를 몇몇 거대한 직육면체 사무용 빌딩이 차지해 버렸다. 무척 낯설고 생경한 풍경이다.

지워진 길과 골

도시와 그를 이루는 공간조직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 생성-성장-전성기를 지나 쇠퇴-재생-변형하는 순환적 과정을 밟는다. 따라서 시대 변화에 따라 길과 골도 낡아가고 때론 그 생명을 다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피맛길 흔적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비각에서 피맛길로 향하는 곳에 남아 있는 길의 흔적. 재개발로 교보빌딩이 들어선 후 생겨난 공간이다.
ⓒ 이영천
결국 유기체 관점에서 바라본 도시 생명력은 그곳을 '장소 기억'으로 보존함으로써 가꾸고 지켜내며 키워가는 것이다. 장소 기억은 과거를 현재에 소생시켜 사회적 기억을 생성 및 확대 재생산하는, 즉 한 장소가 갖는 '고유 능력'의 다른 의미다.
장소 기억의 원천은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과 미각'이 총동원되어 작동하는 방식이다. 마치 한 장소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피맛골은 이런 장소 기억에 무척 충실한 공간조직이었다. 이런 오감이 수백 년 피맛골을 특별한 장소로 기억하도록 작동해 왔다.
 
▲ 경성부(1936, 광화문네거리~종로1가) 칭경비각~종로1가에 이르는 1936년 지도. 남과 북에 피맛길 흔적이 뚜렷하고, 특히 북쪽 피맛골 수백의 작은 필지로 나뉜 길과 골의 형상이 잘 드러나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부분편집)
 
피맛골(길)을 시대순으로 회상해 보면 생성기엔 '능동적인 회피의 길'이었다. 하급 관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민들이 말을 피하는 공간이었다. 생성된 피맛골이 왕조 5백 년을 지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서민 공간'으로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엔 '저항의 길'이었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끌어 안아주던 골이었다. 청계천 이남 일본인 거주지의 눈부신 근대화에 대항해 묵묵히 전통을 지켜내며 살아남은 골이었다.

독재 권력의 극심한 횡포에 '망각과 회상의 길'로 자리매김했다. 야만의 권력에 짓눌린 시민들이 이곳에서 쓰리고 아픈 기억을 달래거나 지워내곤 했다. 매캐한 최루가스를 피해 찾아들던 굽은 길이었고, 막걸리 그득한 잔을 부딪다 연인이 되기도 했던 골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는 '역사와 현실 삶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전선 줄이 얽히고설켜 때 묻은 오래된 공간과 노포(老鋪) 낡은 벽에 온갖 사연이 포도알처럼 맺힌 골이었다. 이젠 깡그리 지워져 사라진 피맛골을, 유기체로서 과연 어느 단계라 말할 수 있을까?

종로 르네상스로 저지른 횡포

길과 골을 지워낸 주범은 '종로 르네상스'였다. 르네상스는 본시 인간성 회복이라는 '부흥과 재생' 아니던가? 거대한 직육면체 사무동에서 어떤 인간성을 찾을 수 있을까?

작은 집들이 차지하던 수십의 작은(細) 필지를, 자본과 권력이 거대한 하나의 필지로 강제 병합시켰다. 폭력이다. 수십의 개개 필지가 가진 기능이 다 사라져, 하나의 기능으로 획일화되었다.
 
▲ 피맛골 자리를 차지한 빌딩들 광화문 네거리에서 종로 1가에 이르는, 피맛골을 지워낸 자리를 차지한 거대한 덩어리의 사무용 빌딩들.
ⓒ 이영천
수백의 추억과 사연, 문화가 거대 필지 안으로 뭉뚱그려져 사그라들었다. 좁고 굽어 변화무쌍하던 골목의 수백 년 쌓인 역사가 순식간에 휘발해 버렸다. 부흥이 아니라 말살이었고 재생이 아니라 들어내기였다. 이들이 결탁해 만들어낸 낯선 풍경은 이제 자꾸만 이 길을 '피(避)하고 꺼리게' 만든다.

청진동 일대가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건 1977년이다. 이때부터 이미 수십의 작은 필지를 몇 큰 필지로 병합하려는 '전면재개발'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소유주는 물론 상인들의 노력으로 한때 자율로 환경을 개선하려는 '수복 재개발'로 방향을 바꾼 적도 있었다. 골을 보존하여 장소 기억을 지켜내려던 눈물겨운 '싸움이자 버텨내기'였다.

그러나 '디자인 서울'을 외치며 자본과 결탁한 도시 권력은 노골적으로 길과 골을 공격해 들어왔다. 자본과 권력이 앞세운 슬로건 '미려한 도시환경'은 그들이 자행한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 서 피맛골 인사동 구간 서 피맛골이라 부르던 곳의 지난 6월 모습. 수많은 반대에 부딪쳐 겨우 길은 남겼으나, 이웃한 골이 재개발로 전면 철거된 상태다.
ⓒ 이영천
우리의 도시 재생 역사는 무자비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을 달고 행한 철거는 전쟁을 방불했다. 곳곳에서 한 골과 생활공동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이른바 '철거재개발'이란 늑대의 탈이었다.

토지이용 효율 제고라는 필지 병합의 눈가림이고, 거대 필지로 얼굴을 바꾼 건폐율과 용적률 착취의 다른 이름이었다. 철수와 영희가 뛰어놀던 길과 골을 밀어버리고, 그 안에 오롯하던 생활공동체 지우기였다.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는, 권력이 자본을 앞세워 단위 공간조직을 흔적도 없이 지워내는 행위에 불과했을 뿐이다. 결국 극한의 건폐율과 용적률 게임을, 우린 자랑스럽게 '도시 근대화'라 칭하며 자위하기 바빴다. 극한 욕망의 광기였으며, 오래도록 인간 삶이 녹아있는 공간이 질적으로 얼마나 우수한가를 망각한 만행이었다.

유럽 역사 도시였다면

유럽 역사 도시라면 어찌했을까? 과연 깡그리 지워낼 수 있었을까? 그리스·로마 문명이 뿌리내린 역사 도시를 걷다 보면, 하찮아 보이는 돌멩이도 정해진 고유 자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베네치아 예로 보면, 이 도시는 중세 이후 거의 변화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 도시다. 작은 운하를 메운 자리에 큰 건물을 세웠다면 과연 물의 도시 베네치아가 존치할 수 있었을까?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한 베네치아는 도시를 보존하려 오히려 방치에 가까운 도시개발 정책을 시행한다. 이 도시가 현생은 물론 미래 인류에게 어떤 자산으로 작동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면 답은 더 명확해진다. 유럽 역사 도시 대부분이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운종가(雲從街)는 시전(市廛) 역할과 유교 이념에 충실하게 계획된 신도시 한양의 동-서를 잇는 주간선도로였다. 이때 운종가를 따라 남북으로 피맛길이 생겨난다. 폭 2m 내외 좁은 길이었지만 충분히 인간적이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공간조직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흥인지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운종가 폭은 해방 후까지 약 17m(영조척(營造尺=30.65cm)으로 55척)였다.

이 길이 한국전쟁 후 확장된다. 남쪽으로 편중된 확장으로 폭 40m 도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최초 남측 피맛길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 피맛길이 최초로 지워진 곳.  옛 한성전기회사 자리에 선 지금으로서는 낮아 보이는 빌딩과, 그 옆 종로 YMCA 회관의 모습. 피맛길을 지워낸 최초 건물이 있던 자리다.
ⓒ 이영천
 
북측 피맛길 광화문네거리~탑골공원 구간의 수난은 유별나다. 1901년 한성전기회사 사옥이, 그 옆으로 1907년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YMCA)을, 1931년 화신백화점을 세우면서 종로1가~2가 피맛길 절반이 사라진다.
지금의 SC제일은행 본점 자리 앞에 가는 선으로 남아있던 흔적은 도로 확장과 직선화에 밀려 교통광장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종로1가~2가 피맛길 중 YMCA에서 탑골공원에 이르는 길은 어렵사리 살아남았으나, 이웃한 골이 재개발로 다 사라져 버렸다.
 
▲ 종로2가~3가 사이 피맛길 표식 탑골공원을 지난 자리 피맛길 바닥에 설치된 표석. 이 부근은 단성사와 피카디리 존재 때문이었는지 길 흔적을 비교적 온전하게 지켜내고 있음.
ⓒ 이영천
 
돈화문로로 남은 종로2가~3가 구간은 그나마 뚜렷한 흔적을 보이나, 종묘~흥인지문 구간은 군데군데 끊기고 변형되었다. 애써 찾아들지 않으면 피맛길인지 그냥 골목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온전하진 않지만 가냘픈 형태로 남아있는 피맛길과 잇닿은 골을 어떤 힘으로 보존해 나갈 것인가? 거센 공격에 그저 위태롭기만 하다. 피맛길이여, 부디 '장소 기억'으로 온전하게 살아남을 힘을 부디 갖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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