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부부의 '달콤살벌'한 부부싸움, '아내'와 '동지' 사이..김구 개입 말려
"나는 혁명가의 아내가 싫소. 그러니 이제 선택은 당신이 하시오. 나를 버리던가 아니면 비밀결사를 버리던가." (박상우 소설 '칼' 중에서)

오인성은 평양의 딸 부잣집 장녀였다. 어려움 없이 성장한 신여성으로 천주교 계통의 평양 성모여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재명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태어나던 해 생부가 사망했다. 출생 연도가 1888년인지 1890년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 양씨를 따라 평양 아청리로 이주했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늘 가난에 허덕였다.
이재명의 어머니는 여자 몸으로 자식 거느리기가 어려워 평양 연광정골에서 객주 영업을 하는 임옥녀라는 홀아비와 재혼했다. 다행히 임옥녀는 순한 사람이었고 똘똘한 의붓자식 재명을 귀하게 여겼다.

이재명은 평양 남산현교회, 오인성은 천주교 성당을 다니며 기독교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자랐다. 그것이 그들 혼인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우리 아들은 천자문 한 자를 가르치면 두 자를 배우겠다고 하고, 두 자를 가르치면 세 자를 배우겠다고 했소. 그리고 매우 영악스러워 내가 누구와 조금만 말다툼이라도 하면 몽둥이를 들고 왜 우리 아버지와 싸우느냐고 대들고 하여서 내가 좀처럼 누구와 시비도 못해봤소. 그래서 나는 그것이 너무 귀여워 내가 낳은 자식보다도 더 사랑했소. 그 애가 미국에 가 있을 때 내가 영문 봉투를 쓸 줄 몰라 편지도 못 보내 준 것이 지금도 원통하다오."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를 구하는 공고문이 제물포(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퍼지더니 평양 남산현교회까지 닿았다. 이때 이재명은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떠나게 된다. 요즘으로 치자면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던 이재명은 그곳에서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을 인식하게 됐다. 그리고 동향 평안도 출신인 안창호 선생의 영향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가서(1906) 한인공립협회(회장 안창호)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 민족이여.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순국했습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위국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적(賣國敵)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재명이가 미국 갔다 와서 러시아로 가려했으나 길이 막혀 못 들어가고 말았소. 그때 성모여학교에서 교사 노릇하던 함동철이라는 사람과 전 중화군수의 아내 소개로 여학교에 다니던 며느리를 만나지 않았겠소."
두 사람은 평양 능덕부 구리동 오인성의 집에서 혼인 예식을 치뤘다. 오인성은 눈빛이 형용하고 의지가 강한 이재명에게 끌렸다. 평양 미인 오인성이 밑지는 혼인이라고 했으나 오인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재명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샌프란시스코 노동자로 일하면서 번 돈은 모두 동지들 규합과 무기를 사들이는데 써서 정작 처갓집에 의탁해 신혼 생활을 했다.

'하루는 경성 가는 길에 노백린과 안악에서 상봉하여 함께 여물평 진초동 교육가인 김정홍 군의 집에서 같이 잤다. 진초학교 직원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즈음 갑자기 동네에서 소동하는 소리가 났다. 진초학교 교장이 놀라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사실을 말했다. 학교의 여교사 오인성은 이재명의 부인인데 이군이 자기 부인에게 무슨 요구를 강경히 하였던지 단총으로 위협하니 오 여사는 놀라고 겁이 나서 학교 수업을 감당치 못할 사정을 말하고 이웃집에 피해 숨어 버렸다 한다. 그런데 이군이 미친 사람 모양으로 동네 어귀에서 총을 쏘아대며 매국노를 일일이 총살하겠노라고 소리를 치니 동네가 소동한다는 것이다. 노백린과 상의하여 이군을 청해 불렀다...자기는 이재명이고...(아내가) 국가 대사에 충성을 바칠 용기가 없고 구차하게 안일에만 빠져 자기의 의기와 충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기 부부간에 다툼거리가 생겨 학교에 손해가 될까 우려한다고 기탄없이 말하였다.'(백범일지 중에서)
김구와 노백린 등은 권총을 빼앗고 대장부가 큰 일을 하려면 더 신중히 하라 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그 권총이 이완용 저격을 위한 총이었음을 김구가 뒤늦게 알고 자신의 실수를 통탄한다.
한편 작가 박상우는 '칼'에서 진초리 이재명 오인성 부부의 부부 싸움을 이렇게 다뤘다.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자 했던 오인성은 결국 남편을 따라 교직도 접고 경성으로 향했다. '사고 칠' 남편임을 알면서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경성에 도착한 부부는 경성의 전태선 동지 집에 잠시 얹혀살았다. 경성 한복판 수진동, 지금의 수송동 일대다.



아무튼 이완용이 죽은 것으로 확신한 이재명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도 일경에 의해 허벅지를 찔린 채였다. 이완용은 깊은 자상을 3군데나 입고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긴급 후송됐다. 그리고 우리나라 의료사상 첫 흉부외과 수술 환자가 되어 운좋게 살아났다. 덧붙이자면 이완용은 이때 입은 자상으로 폐렴에 시달리다가 해수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이재명은 '이완용 암살미수' 혐의로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동지 13명도 체포되어 경성지방재판소 공판에 넘겨졌다. 독립운동 사료에 따르면 오인성도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써 있다.
1910년 5월 18일 1심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이재명은 분연히 일어나 재판장에게 경고한다.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 "
그리고 방청석에 앉아 있던 아내 오인성도 고함을 치며 울분을 토했다. 1958년 잡지 '신태양' 9월호에 실린 김동산(이재명과 함께 한 비밀결사요원 김용문으로 추정)의 당시 회고 기록.
'서울 진명여학교(양심여학교를 오인한 듯)에 오인성이라는 꽃다운 여학생이 있었다. 오인성은 역시 이재명과 동향인 평양 출신으로 방년 스무 살이었다. 아기자기하게 고운 인물은 아니로되 희고 동그스름한 얼굴에 시원한 큰 눈이 어울려 흠썩한 인상을 주는 타입이었다.'
그해 8월 13일 이재명에 대해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만에 일제는 이재명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나는 5년 징역을 마치고...북만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오인성 여사가 길림학교에서 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길림에 들러 오인성 여사를 만나보았다. 몇 해 만에 허허 만주벌판에서 기구한 운명들을 지니고 있는 서러운 사람들을 만나니 비참한 눈물이 없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이미 죽었으나 산 사람은 이렇게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사뭇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뭐요" 하고 오인성 여사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목릉(조선인 망명지. 중국 흑룡강성의 도시)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오여사도 굳이 따라겠노라고 하여 우리 일행은 함께 목릉으로 갔다. 목릉 구참에는 안중근 의사의 자당(어머니)이 그의 계씨(남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들은) 소왕령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동휘 유동렬 양기탁씨와 같은 독립운동 거두들이 있었다."
laka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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