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죽을지도' 어느 커리 식당 잔혹사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

정윤영 2022. 7. 1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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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 과노동과 체불 임금, '멋진 신자유 세계'

[정윤영 기자]

 D식당은 '한국인 아내와 네팔인 남편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식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에 오로지 부부 간의 사랑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창카와 라메시 모두 가족을 만나지 못한 지 3년이 넘었다.
ⓒ 정윤영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말 그랬다. 너무 힘들어서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커리 전문점 D식당의 네팔 출신 요리사 창카는 오전 9시에 출근해 밤 11까지 하루 14시간을 일한다. 휴게시간이나 식사 시간은 따로 없고 눈치 봐서 손님 적은 시간에 빨리 한 끼 때운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나 사장 친구들이 식당에 오는 날은 새벽 2~3시까지 일하기도 한다. 코로나 방역 지침으로 영업 제한이 있던 때를 제외하고는 퇴근 시간이랄 게 없었다.

출근해서 유니폼을 갈아입으면 일이 시작된다. 퇴근까지 14시간, 주방 노동은 해야 할 일이 끊이지 않는다. 먼저 화덕 숯에 불을 붙여 예열시켜놓고 밀가루를 반죽한다. 다른 요리사 한 명이 커리를 만드는 동안 창카는 난과 탄두리 등 화덕에 구울 재료들을 준비하고, 야채를 씻고 썰고 볶고 튀긴다.

매일 다르지만 적게는 20인분, 많을 때는 80인분을 만든다. 엄청난 양을 요리사 1~2명이 모두 책임지기 때문에 주방은 늘 바쁘고 정신이 없다. 화덕에 팔을 데는 건 일상이고 서두르다 미끄러운 주방 바닥에 넘어지기 일쑤다.

D식당은 연중무휴. 요리사에겐 쉬는 날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한 달에 두 번 휴일이 있지만, 다른 지점으로 출근할 때가 많다. 다른 요리사를 위해 휴일을 반납해야만 자신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휴일을 가질 수가 있다.

출근하지 않는 휴일은 무조건 빨래하는 날이다. 몇 벌 되지 않는 옷과 유니폼을 빨고 방 청소를 하면 하루가 끝난다. 숙소에는 세탁기가 없어 손으로 직접 빨래를 하기 때문에 더 오래 걸린다. 정말 쉬는 날 같다고 느끼는 순간은 네팔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는 몇십 분이 전부이다.

한국에 온 첫 일 년은 휴일이 하루도 없었다. '식당에 와서 밥 먹으라'는 사장의 호의가 시작이었다. 창카 역시 '갈 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할 줄 모르니까' 식당에 가는 게 편했다. 휴일이어도 식당에 앉아있으면 일을 하게 됐다. 밥 먹으러 오라는 호의는 곧 '그냥 일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어 '쉬게 해달라'는 호소도 거절당했다.

1년 365일 연중무휴는 창카의 책임이 되었고 코피가 나면 휴지로 콧구멍을 틀어막고 일했다. 일 년이 지나 휴일이 생겼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노동뿐인 날들의 연속이었다. 매일 14시간씩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잠자기 바빴다. 휴일엔 빨래와 대타 출근으로 보냈고 아주 가끔 숙소 동료들과 외식을 했다. 오로지 출근하기 위해 빨래를 하고 일하기 위해 잤다.

2010년, 창카가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 뒤 받은 첫 월급은 70만 원이었다. 당시 최저시급은 4110원. 주 40시간을 일하면 월급 85만 8990원을 받는다. 창카는 주 98시간을 일했다. 월급부터 노동시간, 한국에 올 때 약속한 내용과 모든 것이 너무 달랐다.

창카는 네팔에서 요리사로 일할 때 D식당 사장의 사촌 동생 R씨를 처음 만났다. 사장은 네팔 출신으로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전국에 커리 전문점 일곱 개 지점을 갖고 있다. 아내는 서울에 있는 한 개 지점의 매니저로 일하고 사장과 동생들이 네팔과 한국을 오가며 식당 운영과 인력관리를 책임진다.

R씨는 창카에게 한국행을 제안하며 월급 800달러(당시 평균 환율로 약 96만 원)라고, 하루에 8시간 일하고 주 1회 휴무에 일 년마다 월급을 올려준다고 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한국으로 갈 만한 조건이었다. 비자를 포함한 비용 650만 원을 구하는 게 문제였는데 온 가족 친지,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해결했다. 650만 원을 R씨에게 지불하고 한국으로 일하러 올 수 있었다.

월급도 환불이 되나요?
 
 사장과 매니저는 페이스북 메시지로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눴다. 사진은 매니저가 밀린 월급 4개월 치와 리턴머니를 정산해서 보낸 메모.
ⓒ 최미숙 노무사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 5개월 동안은 월급도 없었다. 은행 계좌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돈을 달라고 하면 '나중에 줄게, 나중에' 말뿐이었다. 사장의 '나중에'는 5개월 뒤였다. 96만 원이라던 월급도 70만 원으로 줄었고 그마저도 밀린 월급의 3개월 치만 받았다. 밀린 월급 가운데 나머지 두 달 치는 일 년 뒤에 나눠 받았다. 일 년마다 올려준다던 월급은 10년 동안 세 번 올랐다. R씨가 말한 월 800달러를 받는 데 10년이 걸렸다.

월급을 지급하는 방식도 수상했다. 석 달 치 밀린 월급을 준 뒤에 한 달 치 월급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장이 다시 가져가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회사 이름으로 통장에 180만 원을 입금한 뒤, 월급 97만 원을 뺀 나머지를 현금으로 돌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럼 곧바로 은행으로 가서 현금 83만 원을 인출해 매니저에게 전해준다. 창카와 사장은 이 금액을 '리턴 머니(환불)'라고 했다.

리턴 머니에 대해 매니저 R은 '출입국에 낼 돈'이라고 했고, 사장은 '한국에 새로운 법이 생겼다'고 했다. 한 번은 750만 원이라는 큰 액수가 입금된 적이 있다.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 놀란 아내가 한국으로 연락을 해왔다. 당연히 다시 돌려줄 돈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750만 원은 너무 큰 돈이라 이유를 묻자, R은 '비자가 잘 나오려면 계좌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월급을 제외한 670만 원을 가져오라고 덧붙였다.

돌려주지 않으면 '비자 연장 안 해준다', '네팔로 돌려보내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창카 계좌에서는 670만 원이 한 번에 인출되지 않아, 100만 원씩 일곱 번에 걸쳐 현금을 뽑아 돌려줬다. 그런 뒤 어떤 서류에 지문을 찍었는데, 다른 때와 달리 R이 창카의 양손을 잡고선 엄지에 인주를 묻혀 강압적으로 날인을 찍었다.

서류는 한국어라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무슨 서류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항상 같았다. '이거 안 하면 비자 연장 못 해.' '비자 연장'이라는 말 앞에서 창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사장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주는 마법 같은 단어였다. 결국 양손에 묻은 인주가 서류에 찍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창카는 웬만한 일은 다 괜찮았다. 일곱 명이 사는 숙소가 너무 좁다거나 손빨래를 해야 하는 불편함은 아무렇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십 년 동안 가족들을 세 번밖에 만나지 못했어도 정말 괜찮았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참을만했다. 창카에게 괜찮지 않은 것은 단 하나. 일을 못 하게 되는 것뿐이다.

월급은 한 달 생활비 10만 원을 제외하고 모두 가족들에게 송금한다. 가족은 모두 여섯 명. 부모님과 동생, 아내와 자녀 둘이 한집에 산다. 창카가 다섯 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어도, 일 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어도, 화덕과 가스 불 앞에서 화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14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갚아야 할 650만 원이 있었고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장의 '나중에'만 믿고 버틴 시간은 10년이었다.

"사장이 월급 올려준다는 말만 믿었어요. 맨날 네팔 다녀와서 주겠다고 미루고 미루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또 미루니까 너무 괴로웠죠. 사장 말만 믿고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요. 이렇게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비자 때문이라며 서명받아 간 서류, 알고 보니 근로계약서

웬만한 건 다 괜찮다던 창카지만, 10년 넘게 일해도 월급이 100만 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내 괴로웠다. 다른 식당은 3년 차 요리사도 월 150만 원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괜찮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식당을 옮기고 싶었다.

E7비자는 사용주가 동의를 해야만 근무지 변경이 가능하므로 창카는 처음으로 사장에게 '직업 변경 동의서'를 부탁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사장에게 창카는 월급이라도 올려달라고 했지만, 사장은 '네팔에 갔다 오면 올려주겠다'는 약속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약속은 이미 세 번이나 어겼다. 월급을 100만 원 넘게 받을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고밖에 없었다.

2021년 8월, 같은 숙소에서 지내는 라메시와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아갔다. 라메시는 한국에 온 지 9년 차로 역시나 월 97만 원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처음으로 근로계약서를 볼 수 있었다. 계약서에 적힌 내용은 실제 일하는 조건과 전혀 달랐다. 계약서에는 근무 시간 10시간, 휴게 시간도 3시간이나 되었고 휴일은 매주 토요일, 월급은 150만 원으로 적혀 있었다. 게다가 매해 계약서에 서명한 적이 없었다. 직접 서명한 건 세 번뿐, 나머지는 자신의 필체가 아니었다.

매해 서명을 받아가는 사장에게 한 번은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도 비자 때문이라고만 했다. 그 뒤론 서류를 다른 종이로 가리고 서명하도록 했는데, 그게 근로계약서인 줄 몰랐다. 거액 750만 원이 퇴직금이었다는 것도, 강제로 날인을 찍은 서류가 퇴직금 지급 영수증이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서류 내용을 알고 서명한 적도 있다. 코로나 영업 제한이 있던 때 창카는 하루에 4시간만 근무한다는 서류에 서명한 게 생각난다며 통역을 부탁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방을 열더니 10년 동안 사용한 통장과 근무일이 적힌 노트, 사장과 주고받은 메시지 사본 등 온갖 서류를 꺼내 보여주었다.

"2시까지만 근무했다고 서명을 했는데 사실과 달라요. 코로나 때문에 (서명)해야 된다고, 사장이 하라 그러면 해야지 어떻게 안 하겠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원래 이렇다고 하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그래서 코로나 때 고향도 못 가고 혼자 일했는데 월급을 또 안 올려주니까 화가 났어요. 전에는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제가 늦게까지 일한 증거도 다 있고 문자 기록도 남아있어요. 계약서대로 해야죠."

근로계약서 허위 작성과 최저임금법 위반, 체불 임금까지 D식당이 문제가 많다는 걸 창카는 노무사를 통해 알게 됐다. 노무사 최미숙씨를 동료 요리사에게 소개받았다. 동료 역시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고, 꽤 여러 명이 노무사를 통해 체불 임금을 받았다고 했다.

창카와 라메시가 노동부에 신고한 걸 안 사장은 '좋게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쉬는 시간도 주고 주 1회 휴무도 지켰다. 저녁 9시면 칼같이 퇴근시키고 세탁기도 사줬다. 늘 화를 내던 태도도 달라졌다. 그러나 돈에 있어서는 단호했다.

밀린 월급과 퇴직금을 달라고 하자 '너한테 이렇게 큰돈은 줄 수 없다'고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새로운 총괄 매니저라며 L을 데려왔다. L은 커리 전문점 K식당의 사장이었고, 그 역시 임금 체불로 노동부 조사를 받는 중이었다. L은 신고를 철회하라며 비자 안 해준다고 협박하고 두 사람에게 숙식 비용으로 2억 7천만 원을 청구했다.

두 사람은 신고 뒤 일을 그만두었고 체류비자는 G1으로 곧바로 바뀌었다. G1은 기타 비자로 취업을 할 수 없고 체류 기간도 짧아 올 11월에 만료된다. 두 사람이 체불 임금을 받기를 바라며 매일같이 노무사 사무실과 노동부를 들락거린 지 벌써 6개월째,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지 못한 지도 반년이 넘었다. 가족들은 친척에게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두 사람 역시 동료들에게 돈을 빌려 하루하루 살고 있다. 한국에서 돈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하루가 너무 길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노무사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총괄 매니저 L씨였다. 창카와 라메시 때문에 전화했다며 만남을 요청했다.  

사장이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매니저까지 데려왔지만 안 줄 도리가 없으니 전화를 한 것 아니겠냐는 노무사 말에 창카는 이제 돈을 받을 수 있냐고 되물었다. 받기는 하겠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얘기하자 두 사람은 그래도 전화가 와서 너무 좋다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정말 운이 좋으면 체불 임금과 퇴직금을 받고도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서도 계속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두 사람은 생각한다. 돈을 받고 어떻게든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체불 임금 요구했다가 체류 불법 됐다

인도에서 온 라제쉬(가명)는 이태원에 있는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 일 년 전만 해도 대학가 C식당에서 일하던 요리사였다. 그랬던 그가 '희망이 너무 없는 삶'을 살게 된 과정은 창카, 라메시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월급을 떼이고 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라제쉬는 6년간 일한 식당 사장의 신고로 미등록 체류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작년 4월, 느닷없이 사장이 라제쉬의 숙소로 찾아와 출입국관리사무소로 그를 데려갔다. 사장은 서명 하나를 받더니, 올해는 비자가 연장되지 않았다며 인도로 돌아가라고 비행기 표를 내밀었다. 라제쉬는 한 달 전에 했어야 할 비자 갱신을 사장이 하지 않았고, 비자 만료 직전에 자신을 강제 출국시키려 했다는 걸 알았다. 이런 일이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밀린 월급과 퇴직금을 주지 않는 사장만의 사업비결이라는 것도 알았다.

절대 갈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일을 계속 할 수는 없었다. 계속되는 '감시와 협박'에 라제쉬는 숙소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라제쉬가 만난 사람도 최미숙 노무사였다. 노무사 사무실에서 체불 임금 진정서를 접수하고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사무실로 경찰이 들이닥쳤다. '불법 체류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며, 경찰들은 라제쉬의 양손에 수갑을 채웠다. 라제쉬는 출입국위반사범으로 외국인보호소로 구금되었다.

졸지에 미등록 체류자가 되어 보호소에서 보낸 시간은 아홉 달이었다. 보호소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얘기해줄 수 있냐고 묻자, 라제쉬는 '감옥에 간 걸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라제쉬가 있던 화성보호소는 새우꺾기 고문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새우꺾기 고문은 없었지만 감옥이었다는 라제쉬 말에 다른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나는 죄를 짓지도 않았고 실수한 것도 없는데 왜 감옥에 들어가야 돼요? 너무 슬펐어요. 나는 여기에 일하러 왔는데 월급도 빼앗기고 자유도 빼앗겼어요. 일할 수 있는 기회도 다 빼앗겼어요. 일 년 넘게 가족들한테 돈을 못 보내주고 있는데 어떻게 지내는지도 잘 몰라서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라제쉬 구금과는 별개로 노동부에서 진정 조사가 시작됐다. 첫 번째 출석 요구일에는 노무사가 대신 출석해 체불액 1억 4천여 만원을 산정했는데, 라제쉬 구금으로 근거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다 사장 김씨는 '임금 미지급액 없다.', '퇴직금만 일부 덜 줬다'라며 체불을 부인했다.

체불은 없다던 김씨는 노동부 출석 이후 화성보호소에 구금돼있는 라제쉬를 찾아갔다. 자신의 신고로 구금된 라제쉬를 앞에 두고 그는 '내가 돈 안 주면 넌 못 받아'라고 협박했다가 '나 돈 없어, 못 줘'라고 하더니 마지막에는 '1년 6개월 치 월급을 줄테니 합의하자'라며 회유의 말을 했다. 합의금으로 제시한 1년 6개월 치 월급은 2600만 원, 노무사가 정산한 체불액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돈 벌 목표 하나로' 한국에 왔지만 라제쉬는 1년 반 넘게 일을 못하고 있다. 가족들만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괴롭다고 했다. 보호 일시해제 결정서에 찍힌 '취업불가' 네 글자가 너무 크다.
ⓒ 최미숙 노무사
 
진정 조사를 이유로 노무사는 라제쉬의 보호 일시해제를 신청했고, 6개월 만에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구금된 지 9개월 만에 보호소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해제 기간은 3개월이었다. 그는 얼마가 될지 모르는 체불 임금과 퇴직금을 받기 위해 해제 기간을 연장해 가며, 빚을 져가며 진정 조사를 받고 있다.

라제쉬의 목표는 창카와 마찬가지로 '밀린 돈도 다 받고 취업비자도 받아 계속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제쉬는 구직 비자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한국에서 일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른 요리사들은 체불액을 덜 받더라도 다시 취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힘들지만 조금 기다려도 보람있다고 얘기하는 이유다.

라제쉬는 얼마가 됐든 퇴직금을 받는 즉시 한국을 떠나야만 한다. 노무사 말대로 '최대한 많이 받아서 출국하는 방법밖에 없다.' 라제쉬는 강제퇴거 당한 미등록 체류자이기 때문이다.

라제쉬는 한국에 처음 오려고 짐을 쌀 때, 특별히 필요한 게 있을까 싶었다고 했다. 굳이 걱정되는 게 있었다면 고기를 먹지 않는 그가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한국에 올 때 그는 가방 안에 렌틸콩과 쿠키를 가득 채워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산 지 6년째, 색이 바랜 커다란 그의 백팩은 창카의 것과 아주 비슷했다. 두툼한 서류뭉치와 다 쓴 통장, 근무일지가 빼곡하게 적힌 다이어리가 들어있는 것마저도 똑같았다. 한국행을 준비하며 가방에 쿠키를 넣던 라제쉬는 자신이 불법 체류로 구금될 수도 있다는 걸 짐작이나 해봤을까? 생계 부양의 꿈과 희망이 자기 두 손에 수갑을 채우고 자기 삶을 통째로 구속할 수도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해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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