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때아닌 4.3희생자 '사상 검증', 반발하는 제주
[황의봉 기자]
▲ 지난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 74회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윤석열 당선인이 추념사를 하고 있다. |
ⓒ 인수위사진취재단 |
지난 12일, 4·3 수형자 68명(군사재판 67명, 일반재판 1명)에 대한 특별재심에서 검찰은 이 중 4명이 무장대 활동을 했거나 의심되는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검찰은 "희생자 결정 과정에서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제시한 기준을 따랐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재판을 한 번 더 열어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위원회)가 어떤 기준으로 희생자 여부를 결정하는지 들여다보겠다"고 한 것. 4·3 희생자의 결정 권한은 국무총리 산하 4·3위원회에 있는데, 검찰이 그 적법성 여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이날 검찰이 문제를 제기한 4명은 박근혜 정부 시절 극우단체들이 4·3 평화공원에 '불량 위패'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 당사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4·3 단체 관계자들은 검찰이 극우단체 주장을 근거로 뒤늦게 희생자 4명에 대해 딴지를 걸고 나섰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제주 4·3도민연대는 "국무총리 산하 4·3위원회의 희생자 결정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시대착오적인 생트집을 잡고 있는 제주지검은 국민과 제주도민, 4·3유족이 무섭지 않은가"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군법회의에 의해 자기 변론, 자기방어권도 행사하지 못한 채 형무소로 끌려간 이들의 사상을 누가 검열하려 하는가, 74년 전 사건에 대해 고인이 된 이들을 또다시 죽이려 하는 검찰의 희한한 발상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제주도 내 48개 단체로 구성된 제주4·3기념사업회도 성명을 내고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4·3영령들을 다시 법정에 소환해 사상과 이념을 검증하겠다는 검찰의 어처구니없는 발상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비판했고,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도 "이미 희생자로 결정된 이상 다른 4·3 희생자와 동일하게 특별재심을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 4·3 당시 적법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불법'적으로 진행된 재판에 대한 재심이지, 4·3 희생자의 사상과 삶을 검증하는 재판이 아니"라고 일갈했다.
▲ 제주 4.3 당시 불타 잃어버린 마을이 된 곤을동. 입구에 표석이 서있고 마을엔 집터만 남아 있다. |
ⓒ 황의봉 |
현재까지 정부가 인정한 4·3 희생자는 1만 3000명이 넘는다. 검찰의 이번 문제 제기는 정부 공식기구에서 희생자로 결정한 사안에 대해 검찰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어서 그 의도가 주목된다. 제주 지역사회는 검찰 태도 변화의 이면을 주시하는 분위기다. 단순히 제주검찰 담당 검사의 문제 제기인지 아니면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후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 전개와 관련성이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제주는 다시 4·3을 둘러싸고 홍역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검찰이 말한 헌재가 제시한 기준이란, 성우회 등이 제기한 4·3특별법의 위헌심판 청구를 헌재가 2001년 9월 27일 각하 결정하면서 이례적으로 희생자 명예 회복 제외대상자를 예시한 것이다. 즉, ▲ 수괴급 무장경력 지휘관 및 중간 간부 ▲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 간부 ▲ 주도적·적극적으로 살인·방화에 가담한 자를 꼽았다.
헌재의 의견표명 직후인 2001년 10월 11일 4·3위원회가 희생자심사소위원회를 출범시켜 '희생자 제외 대상' 논의에 들어가자 보수단체가 들고일어나 "무장 폭도가 희생자로 둔갑해서는 안 된다"며 심사기준을 강화하라고 압박하고 나섰다. 반면 4·3 유족회 측에서는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4·3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심사소위를 거쳐 4·3위원회에서 최종 확정한 희생자 제외대상은 ▲ 제주 4·3사건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으로 정하되 "이 경우 그러한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헌재가 표명한 의견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압축하고 객관적 증거자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억울하게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를 최소화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희생자 인정'과 수형자들이 특별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받는 등 최근 들어 활기를 띤 4·3 해결 노력이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제주도민들의 바람이다.
이번에 문제제기를 하고 나선 검찰과 달리 재판부는 "국가기관인 4·3위원회의 희생자 결정은 행정처분의 성격을 갖는다. 즉 검찰과 법원은 희생자 결정에 대해 적법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자칫 검찰이 사상 검증에 나섰다는 누명을 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재판장인 장찬수 부장판사는 "지금 검찰의 행태는 음주운전 단속을 하다가 면허증을 제시한 운전자에게 '면허증이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따지는 것과 비슷한 억지를 펼치고 있다"며 "검찰만 국가기관이 아니다. 4·3위원회도 국가기관이며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 4.3 평화공원에 설치된 대형 동백꽃. 탐스러운 꽃봉오리가 한 순간 툭 떨어지는 동백은 4.3때 스러져간 희생자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
ⓒ 황의봉 |
한편, 오는 7월 20일에는 4·3위원회 전체 회의가 처음으로 제주 현지에서 열릴 예정이어서 검찰의 문제 제기에 이어 어떤 분위기가 조성될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새 위원장인데다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 등 당연직 정부 측 위원들이 참석하는 첫 회의여서 향후 4·3과 관련한 새 정부의 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체 회의에서는 유족 추가신고를 통해 접수된 인원에 대해 '유족 결정'을 할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특히 4·3사건의 피해로 인해 호적(가족관계등록부)이 잘못 등재된 분들이 많다. 호적에 등재되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된 사람들이 나중에 초등학교 입학 등으로 호적을 등재할 필요가 생겼을 때, 이미 아버지가 사망한 상태여서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5촌 삼촌, 7촌 삼촌 밑으로 호적을 등재한 경우다. 4·3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외아들이어서 가까운 친척이 없는 경우엔 외가 쪽으로 등재돼 성(姓)이 바뀌기도 했고, 증조할아버지 밑으로 등재돼 아버지보다 한 항렬 위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호적도 있다.
이에 대해 4·3특별법은 4·3 피해로 인해 호적이 잘못된 사람들은 '다른 법령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위원회의 결정과 대법원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호적을 정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절차를 위임받은 대법원은 대법원규칙에서 호적 정정 대상자를 '희생자'로 국한시켰다.
정작 호적 정정이 필요한 사람들은 유족인데 엉뚱하게 규칙을 제정함으로써 4·3특별법이 제정된 지 22년 동안 특별법에 의거해 호적을 정정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따라서 희생자의 '사실상의 자녀'들은 유족임을 인정받지 못했고, 최근 개정된 4·3특별법에 따라 시행되는 보상금도 받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
이에 4·3위원회 김종민 위원은 지난 4월 6일 <제주의소리>에 '김명수 대법원장께 쓰는 편지… 4.3유족 호적정정 가로막는 대법원 규칙'을 기고했고, 대법원은 이 기고문에서 지적한 대로 대법원 규칙을 개정해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4·3특별법 시행령 별지서식(호적 정정 신청서 양식)에는 여전히 호적 정정 대상자를 '희생자'로만 못 박아 놓고 있다. 시행령은 국무회의에서 제정하면 된다. 따라서 오는 20일 처음으로 제주에서 열리는 4·3위원회 때 참석하는 장관들이 모두 국무위원이므로 이 자리에서 시행령 개정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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