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의 세계가 펼쳐진다..서브컬처 홀릭
# 7월 6일 홍대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AK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면 다른 층과 다른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복도 양 옆으로 애니메이션 캐릭터 모형이 줄을 지어 손님을 맞이한다. 캐릭터 안내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한국 서브컬처 마니아들의 성지 ‘애니메이트’가 나온다. 각종 애니메이션 피규어, 만화, 소설 등을 취급하는 이곳은 만화와 라이트노벨을 보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러야 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매장 안에는 각종 피규어와 소설, 만화책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벽면 한쪽은 아예 ‘BL 소설’ 분야로 채워졌다. 평일 오전임에도 가게 안은 인파로 북적인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를 사러 온 남성 고객부터, 만화책을 보는 여성 고객 등 구성도 다양하다. 애니메이트 관계자는 “대학교를 시작으로 중·고등학교까지 방학을 시작하면서 평일에도 이곳을 찾는 고객이 늘었다”며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가게를 방문하는 고객도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문화인류학 용어에서 파생
본래 서브컬처는 문화인류학에서 사용하는 단어다. 우리나라 말로 풀이하자면 ‘하위문화’ 정도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집단의 특수한 영역에서 다른 것과는 구분될 만큼 특이하게 나타나는 생활양식을 가리킨다. 전체 사회 구성원 가운데 해당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 명확하게 갈리면, 이를 ‘서브컬처’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경상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경상도 문화’가 있다고 치자. 이 문화는 한국 사회 내에서 공유하는 구성원(경상도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구성원(타 지역 사람)이 명확하게 갈린다. 이때 경상도 문화를 한국 문화의 ‘하위문화(서브컬처)’라고 할 수 있다.
서브컬처의 뜻은 콘텐츠 업계로 넘어오며 완전히 달라졌다.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라이트 노벨(그림 삽화가 들어간 가벼운 소설) 등 일부 마니아층만 즐기는 장르를 통칭하는 말이 됐다. 시작은 일본이다. 일본 내에서도 유난히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BL 장르를 비롯한 라이트 노벨을 즐기는 이들을 보고 ‘서브컬처’를 향유한다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중문화(매스컬처)가 아닌 하위문화(서브컬처)를 즐긴다는 뜻이었다. 특정 대상만 강하게 파고든다는 의미로 오타쿠(おたく)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한국 콘텐츠 업계가 일본에서 쓰이는 ‘서브컬처’ 개념을 들여오면서 국내에서도 똑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폭발
1970년대부터 서브컬처 마니아, 이른바 ‘오타쿠’들이 등장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서브컬처의 전파 속도가 느렸다. 1998년까지 일본 만화와 영화, 음악 수입을 법으로 규제해온 탓이다. 이후 김대중정부가 대중문화 개방, 인터넷 보급 정책을 실시하며 ‘서브컬처’는 한국 사회에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 이때 국내에 들어온 드래곤볼, 슬램덩크, 포켓몬스터 등 콘텐츠는 사회적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극장가까지 점령했다. 지브리스튜디오가 제작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했다. 이어 ‘에반게리온’ ‘건담’ 등 작품도 연타석 흥행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끌어올렸다.
2000년대 초반 활기를 띠던 서브컬처 시장은 2010년대 들어서 급속도로 위축됐다. 반일 분위기가 강해진 데다, 서브컬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게 원인이었다.
특히 2010년 방송에 등장한 한 애니메이션 마니아가 특정 캐릭터를 향해 애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상한’ 부류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캐릭터가 그려진 쿠션과 함께 외출에 나서고,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결혼할 것이라고 밝힌 그의 모습은 서브컬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서브컬처 마니아들을 조롱해 부르는 ‘오덕후(오타쿠 발음을 한국식으로 변형)’ ‘십덕후(오덕후의 2배라는 뜻)’라는 용어가 퍼진 것도 이때부터다.
▶코로나19 유행으로 부활에 성공
▷콘텐츠 업계 먹여 살리는 효자로
‘그들만의 문화’로 잊혀가던 ‘서브컬처’는 코로나19 유행 이후 부활에 성공했다. 공연, 콘서트, 영화 등 주류 문화가 침체기에 빠진 틈을 치고 들어왔다.
신호탄은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2021년 한국에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관람이 제한되는 와중에도 214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이어 2022년에는 ‘극장판 주술회전 0’이 64만 관객을 동원하며 서브컬처 부활에 시동을 걸었다. 영화 업계에서는 “코로나19로 죽은 극장가를 애니메이션이 먹여 살린다”는 말까지 나왔다.
애니메이션 다음으로는 웹툰, 라이트 노벨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남자의 동성애를 다룬 ‘BL’ 장르가 급속도로 성장했다. 콘텐츠 업계에서 소비력이 큰 2030 여성 고객 지지를 받으며 세를 키웠다. 리디에서 연재된 ‘시맨틱 에러’는 올해 2월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돼 대박을 터트렸다. 오리지널 드라마는 왓챠에서 8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드라마 공개 첫날 원작 웹소설 거래액이 916% 폭증했다. 웹툰도 첫 주 거래액이 전월 동기 대비 312% 증가했다.
‘서브컬처’의 대세화는 6월 게임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가 국내 시장을 휩쓸며 정점을 찍었다. ‘1위까지는 힘들 것’이라는 게임 업계 예측을 깨고 양대 마켓 인기 순위 1위, 앱스토어 매출 1위, 구글 플레이스토어 매출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서브컬처 콘텐츠가 급부상한 이유로 업계 관계자들은 ‘OTT의 부상’과 ‘플랫폼’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넷플릭스와 왓챠, 티빙 등 OTT에서 손쉽게 애니메이션을 접하게 되며 자연스레 서브컬처 문화에 빠졌다는 소비자가 증가했다는 분석이다.
“과거 만화나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벨을 보려면 인터넷 사이트를 일일이 뒤져야 해 불편함이 컸다. 일부 마니아를 제외하고는 서브컬처 콘텐츠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콘텐츠 플랫폼이 나오며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넷플릭스나 왓챠에서 누구나 쉽게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BL 소설도 카카오페이지나 리디에 접속하면 접하기 쉽다. 허들(장애물)이 낮아진 만큼 온·오프라인을 망라한 콘텐츠 소비자층도 증가한 것이다.”
대원미디어 관계자의 분석이다.
서브컬처 용어 설명
*아니메(Anime) 일본에서 제작한 만화영화를 가리키는 말.
*덕후 특정 분야의 마니아. 예를 들어 건담 콘텐츠를 좋아하면 ‘건덕후’라 부름.
*십덕후 오덕후(오타쿠)의 2배라는 뜻으로, 콘텐츠를 과하게 파고드는 사람.
*BL boy's love의 줄임말로 남자 동성애를 묘사한 소설이나 만화 작품.
*GL Girl's love의 줄임말로 여자 동성애를 묘사한 소설이나 만화 작품.
[반진욱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7호 (2022.07.13~2022.07.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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