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침략기 노응규·정한용 의병장 친필 상소문·격문 확인

윤성효 2022. 7. 1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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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등 경남 일대 의병 활약, 현재 일본 소장.. 이태룡 박사 "반환 받아야"

[윤성효 기자]

 노응규의 친필 상소문, 정한용의 친필 격문
ⓒ 인천대
 
일제침략기(1894~1910년) 진주를 비롯한 경남 일대에서 활약했던 노응규(盧應奎, 1861~1907), 정한용(鄭漢鎔, 1865~1935) 의병장의 친필 상소문과 격문·전령의 원본이 확인됐다.

의병사를 연구해온 이태룡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연구위원 강효숙 박사와 함께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센터의 '태정관·내각 관계 문서'에서 노응규의 친필 상소문과 정한용의 친필 격문·전령을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지금까지는 이들 상소문과 격문이 일본인이 일본영사관 용지에 옮겨 적은 사본 형태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실려 있었고,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사진으로 찍어(영인본) 제작해 자료실(홈페이지)에 번역해 탑재해 놓았다.

이는 노응규·정한용 의병장의 친필이 아니고 일본인이 상소문과 격문을 베껴 쓴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된 것은 노응규·정한용 의병장의 친필 원본으로, 이태룡·강효숙 박사가 확인했다.

이태룡·강효숙 박사는 이들 상소문·격문을 출력해 친필 대조 과정을 거쳤다. 노응규 선생의 상소문은 그의 수기를 담은 책 <신암 유고>에 실려 있는 글씨와 일치하고, 정한용 의병장의 후손이 "친필이 맞다"고 확인한 것이다.

노응규 의병장의 상소문은 1896년 2월 27일에 쓴 것으로, 모두 한문으로 서술됐다. 주요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상소문에 적힌 '안의'는 지금의 '함양군 속면'을 말한다).

"(전략) 옛날 명나라 의종 황제가 청나라 군사에 욕을 당하여 물러가도 지킬 땅이 없고, 나아가도 공격할 수 없게 되자, 15살 된 공주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어찌 내 집에 태어났느냐?' 하고 왼손으로 그 얼굴을 가리고 바른손으로 칼을 뽑아 베어 죽였으니, 이 지극한 자애로써 공주로 하여금 견양(犬羊)의 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사옵니다.

지금 전하의 형세가 과연 의종 황제의 그날과 같으실진대, 온 백성을 불러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서 전하는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 서민은 관장을 위해 죽어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를 의종이 공주를 사랑하듯이 하면, 나라는 비록 망하더라도 의리는 망하지 않을 것이온데, 어찌하여 5백년 선왕의 백성을 몰아 원수를 섬기게 하고, 또 의복을 변경하고 머리를 깎게 하여 차마 염치없는 일을 하는 것이옵니까?(후략). 숭정(崇禎) 기원후 5회 병신 정월 15일(양력 2월 27일). 경상도 안의거(安義居) 유학 신(臣) 노응규."
  
 노응규 의병장 친필 상소문.
ⓒ 인천대
 
정한용 의병장의 격문인 <진주창의장 수루전격사(晋州倡義將收淚傳檄事)>의 주요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 장상(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인가? 나라의 공훈은 꼭 이루는 자에게서 공이 있을지니, 기회는 가히 때와 함께 얻어야 하고, 재능은 뒤에 찾을 것이 아니다. 소강왕(少康王)의 중흥은 소읍(小邑) 모두가 그의 큰 공훈을 기도한 결과요, 공명(孔明)의 세 번 패한 후에 서역을 제패한 큰 공으로 그의 이전 잘못은 덮어졌으므로 이에 지소(池沼)를 파고 성루(城樓)를 쌓고는 구제도를 회복하여 옛날 형세 그대로 일의 흐름과 상응하는 방법을 구하는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자연히 나타날 것이다. 광서(光緖) 22년 정월 12일. 진주본읍창의장(晋州本邑倡義將) 정한용."
  
 정한용 의병장 격문
ⓒ 인천대
 
'숭정'은 명나라, '광서'는 청나라 연호이고, '숭정 기원후 5회 병신'과 '광서 22년'은 모두 서기 1896년을 말한다.

"문화재 보물 지정할 만큼 귀중... 독립기념관에 보전되도록 해야"

이태룡 박사는 "1896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당시 진주는 한성·평양·대구와 더불어 4대 도시 중의 하나였고, 21군을 관할하던 진주 관찰부가 의병 수중에 들어갔다"며 "이 소식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도 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고 했다.

이 박사는 "1896년 경남 안의(함양)에서 거의한 노응규가 촉석성 안에 본부의소(本府義所)를 설치하고 나흘째 되던 2월 23일(음력 1월 11일), 진주에서 거의한 정한용이 촉석성 밖에 본주의소(本州義所)를 설치하고 상소를 올렸고, 이어 진주관찰부 관할 각군과 동래부에도 '진주창의장 수루전격사'라는 이름의 격문을 보내 의병 참여를 독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노응규가 창의한 지 1주일이 지난 2월 26일(음력 1월 14일), 두 의진에서는 함께 창의한 뜻을 하늘에 고하고 임진왜란 충신들을 모신 창렬사(彰烈祠)와 논개 사당인 의기사(義妓祠)에도 제사를 올려 지방 인심을 안정시켰는데,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인원은 1천여 명이라고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나타나 있다"며 "이튿날 노응규는 비로소 국왕께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고 했다.

노응규 의병장의 친필 상소문과 정한용 의병장의 격문·전령은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당시 비서원일기)에 실려 있지 않았다.

이태룡 박사는 그 이유에 대해 "고 려증동 교수(국문학 박사, 경상국립대)께서 <신암유고>를 엮을 때 했던 말이 생각 난다. 상소문에서 '전하는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라고 한 것처럼, 지나치게 과격해서 아마도 작성만 하고 보내지 않았거나 국왕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일제 관헌에 의해 빼앗겼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번에 확인된 노응규·정한용 의병장의 친필 상소문과 격문·전령의 원본은 모두 19매다. 원본은 현재 일본에 있다.

이태룡 박사는 "일제침략기 전기의병사에서 유일한 것으로 원본의 가치는 문화재 보물로 지정해야 할 만큼 귀중한 것이기에 장차 일본으로부터 반환을 받아 독립기념관에 보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노응규 친필 상소문과 정한용의 친필 격문을 든 이태룡, 강효숙 박사
ⓒ 인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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