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조 달러 넘는 中도 기준 미달..줄어든 외환보유액, 위기 신호?
경제에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달러값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13년 만에 1300원 선에 안착할 모양새다. 비상시 사용하기 위해 나라 곳간에 채워둔 외환보유액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줄어 들고 있다. 한·미 금리 역전이 눈앞에 다가오는 등 향후 진로도 험난하다. 위기 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하는 적정 외환보유액에 대한 우려에도 다시 불이 붙을 조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6월 말 기준 4382억8000만 달러다. 외환보유액의 절대적 수준은 낮지 않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5월 말 기준(4477억 달러) 전 세계 9위 수준이다.
불안감을 키우는 건 감소 폭이다. 6월 한 달 동안 94억3000만 달러가 줄었다. 세계금융위기인 2008년 11월(-117억5000만 달러)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지난 3월 이후 4개월간 234억9000만 달러 감소했다. 세계적인 강달러 현상으로 유로화 등 다른 통화로 구성된 외화자산의 평가액이 줄어든 데다, 원화가치 방어를 위해 돈을 푼 탓이다.
외환위기의 트라우마로 인해 외환보유액 감소에 예민한 반응도 있지만, 한은은 현재 외환보유액 수준에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한국 경제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현재 외환보유액은 대외 충격에 대응하는데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근거는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국제기구가 정하는 적정 보유액 기준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새로운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권고 외환보유액 수준을 2020년 이후 맞추지 못하고 있다.
IMF는 연간 수출액 5%, 시중통화량(M2) 5%, 단기외채 30%, 기타 부채(외국인 투자금 등) 15% 등을 합한 액수의 100~150%를 적정 외환보유액으로 판단한다. 이 기준을 적용한 한국의 외환보유액 비중은 2020년 98.97%로 내려간 뒤 지난해에도 98.94%를 기록했다. 2000년 이후 가장 낮다. 이 기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적정 외환보유액은 4680억~7021억 달러 수준이다.
다만 IMF의 적정 외환보유액 기준이 반드시 맞다고 볼 수만은 없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자본 거래가 늘어나면 적정 보유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다. IMF 기준으로는 외환보유액 세계 1위(3조1278억 달러·5월 말 기준)인 중국도 69%로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반면 체코(370%)와 페루(289%) 등은 기준의 2~3배 넘는 외환을 쌓아두고 있다.
적정 외환보유액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경제 상황 변화 등에 따라 산출 기준이 변하는 경우도 많다. IMF가 1953년 내놓은 적정 외환보유액 기준은 3개월 치 수입액 혹은 연간 수입액의 25% 정도다. 정상적인 무역거래에 필요한 수준의 외화만 갖고 있으면 됐다.
1999년에 나온 ‘그린스펀-기도티 룰’은 3개월 치 수입액에 더해 1년 안에 갚아야 할 단기외채(유동 외채)를 합한 액수를 적정 외환보유액으로 봤다. 2004년 국제결제은행(BIS)가 내놓은 기준은 여기에 외국인 포트폴리오 투자자금의 3분의 1을 더해야 한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BIS 기준 등을 고려했을 때 6000억 달러 이상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 9위 수준의 외환보유액을 유지하고 있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국내로 들어오는 달러인 경상수지 흑자 폭이 줄어들고 있어서다. 지난 5월 경상수지는 38억6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지만, 1년 전보다 흑자 폭은 65억5000만 달러 줄었다.
올해 1~5월 누적 경상수지 흑자 규모도 191억7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329억3000만 달러)에 훨씬 못 미친다. 올해 무역수지 누적 적자 폭도 159억 달러까지 불어난 상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 교수는 “외환보유액 수준도 중요하지만, 한국에 들어오고 나가는 달러의 흐름이 더 중요하다”며 “현재는 경상수지 흑자 기조가 계속되고 있어 큰 문제가 없지만 높은 국제유가가 계속되고, 미국의 긴축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져 반도체 등의 수출이 위축될 경우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 말 한·미 간 기준금리 역전될 가능성도 부담이다. 금리가 역전되면 외국인 자본이 유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외환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 원화가치 방어 등을 위해 당국이 개입하며 외환보유액이 빠르게 소진될 수도 있다.
올해 1분기에도 외환 당국은 환율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83억1100만 달러(약 10조 원)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순매도했다. 올해 2분기에는 달러값이 1300원을 넘어서는 등 변동성이 더 커졌던 만큼 매도 규모는 더 확대될 수 있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적정 외환보유액은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현재 한국 상황은 평소보다 외환보유액을 더 많이 갖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맞다”고 말했다.
외환보유액 감소는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강달러와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등으로 보유한 채권과 다른 통화 표시 자산 등의 평가액이 줄어드는 데다, 자국 통화가치를 끌어올리려는 역(逆) 환율전쟁 속 각국 중앙은행이 보유 외환을 푼 영향이다.
IMF의 세계 외환보유액 통계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세계 외환보유액(12조5501억 달러)은 지난해 말(12조9209억 달러)보다 2.9% 줄었다. 일본의 경우 6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1조3112억5400만 달러)로 지난해 말(1조4057조5000만 달러)보다 6.7%(944억9600만 달러) 감소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따르면 2000년 4월 관련 통계 작성 후 감소액과 감소율 모두 가장 높았다.
외환보유액을 많이 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외환보유액을 쌓고 유지하는 기회비용 때문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통안증권 등 채권을 발행해 확보한 원화로 시중에서 달러나 외화 표시 자산을 사들인다. 채권을 발행하는 만큼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한은도 외환보유액에 대해 “더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는 투자 기회를 잃는 비용이 발생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을 높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호주는 금융의 국제화 수준과 높은 신인도 등을 바탕으로 외환보유액을 555억8000만달러(5월 기준)만 쌓아두고 있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기업과 민간이 해외에서 달러를 조달할 능력이 충분하다면 외환보유액을 많이 쌓아두지 않아도 된다”며 “거시경제와 재정의 안정성, 금융시장의 회복 탄력성 등이 쌓아둔 외화가 얼마나 있는지 보다 훨씬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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