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 구도 본격화, 기로에 선 아시아 국가들은 '각자도생'[우크라충격파⑫]
사우디와 중동국가들, 美에 안보보장 요구
튀르키예·인도네시아 등은 중재외교 자처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우크라이나 사태 전후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과 중국과 러시아를 대표로 하는 권위주의 진영간의 ‘신냉전(New cold war)’ 구도가 본격화되면서 양쪽 진영 모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아시아 국가들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러시아의 명분없는 전쟁과 민간인 학살 문제 등 주로 인권문제를 부각시켜 자유주의 진영의 확대를 꾀하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철저히 각 지역 및 국가가 처한 상황과 국익에 맞춰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의 대다수 국가들은 인도와 같이 중립외교를 원칙으로 내세우며 양쪽 진영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중동국가들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에 안보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튀르키예(터키)와 인도네시아처럼 중재외교를 자청하며 대외이미지 쇄신을 꾀하는 국가들도 나타나고 있다.
향후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진영 확대를 위해 더 많은 국가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포섭하려 들 것으로 예상되면서, 아시아 국가들의 외교 형태도 더욱 분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인권’보다 ‘석유’와 ‘무기’가 소중한 인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서방과 중·러,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외교를 표방한다고 밝히면서 철저히 국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인권과 자유주의 등 가치를 중심으로 진영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이런 가치연합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지적이다.
지난 3월 2일 유엔(UN)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발표했을 때도 기권한 바 있다. 당시 규탄 결의안에는 141개국이 찬성하고 러시아를 포함한 5개국이 반대했으며, 중국과 인도, 이란, 이라크를 비롯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35개국은 기권표를 던진 바 있다.
특히 인도는 미국 주도의 대중견제를 위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군사협의체인 쿼드(Quad) 가맹국가임에도 대러제재에는 좀처럼 동참하지 않고 있다. 그 이면에는 러시아로부터 들여오는 값싼 원유와 무기가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인도 세관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지난 2월말 이후 3개월간 러시아산 석유 수입액을 집계한 결과, 전년동기대비 5배 이상 늘어난 51억달러(약 6조6340억원)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계속해서 늘리고 있다. 인도는 또한 무기 수입의 절반을 러시아로부터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대부분의 아시아 내 개발도상국가들은 철저히 국익에 따라 진영논리를 선택한다. 인권과 같은 가치보다는 어느 쪽이 더 많은 이익과 안보편익을 줄지가 관건"이라며 "인도와 반대로 전형적인 독재국가인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유엔의 러시아 규탄 결의안은 물론 대러제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 美 출구전략 되돌리려는 중동국가들중동국가들은 소극적인 중립정책에서 한발 더 나아가 우크라이전을 지렛대 삼아 미국에 적극적인 안보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은 6일 이란에서 동아시아로 석유·석유화학 제품 수억달러 상당의 수출을 도운 15개 기업 및 단체, 개인 등을 추가 대이란제재 대상으로 올렸다고 밝혔다. 13일부터 16일까지 이어지는 바이든 대통령의 이스라엘·사우디 방문일정에 맞춰 이들 국가의 요청대로 대이란 강경조치를 취한 것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앞서 지난달 말 나토 정상회의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과 사우디 등 중동순방을 이스라엘이 강력히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중동 순방의 목적은 중동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합을 강화하는 것이며, 중동평화와 이스라엘 안보에도 좋은 일"이라며 "이스라엘이 사우디 순방을 강력하게 요구해왔다"고 강조한 바 있다.
사우디와 이스라엘 등 중동 내 미국 동맹국들은 미국이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추진해온 중동출구전략에서 벗어나 다시 적극적인 중동 안보에 대한 군사개입에 나서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순방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의 실권자로 알려진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와 면담할 예정이다. 사우디측은 빈살만 왕세자에 대한 면책권 부여와 이란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철회, 이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예멘 후티반군에 대한 테러조직 재지정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중재외교 자처한 튀르키예·인도네시아튀르키예와 인도네시아처럼 까다로운 중재외교를 자처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국가들도 나오고 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지난 4일부터 5일까지 스위스 루가노에서 열렸던 ‘우크라이나 재건회의’에서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 제2도시인 하르키우 지역의 재건에 지원을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흑해 곡물무역로 재개 협상에도 유엔과 함께 주요 중재자로 나선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중재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그간 친러행보로 서방과 마찰을 빚어온 튀르키예의 이미지는 물론, 미국으로부터의 안보지원과 같은 국익도 챙겼다는 평가다. 앞서 지난달 29일 미 국방부는 튀르키예 정부가 지난해 9월부터 줄기차게 요청해온 F-16 전투기 현대화 프로그램 판매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현재 해당 사안은 미 의회의 인준 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올해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인 인도네시아도 전례없는 중재외교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30일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잇따라 접견하며 양측에 오는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 초청하고, 휴전협상을 촉구했다.
인도네시아 역시 그동안 인도와 같은 비동맹·중립 노선을 외교정책의 기본원칙으로 선언했지만,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적극적인 중재외교에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곡물가격 폭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문제 해소와 함께 중국과 서방의 경제적 지원과 투자유치를 목적으로 한 외교행보로 풀이된다. 이와함께 G20 의장국 지위와 내년부터 시작되는 아세안(ASEAN) 의장국 지위를 활용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로 분석되고 있다.
◆ 반도체 동맹 강화하는 日·대만일본은 최근 중국의 대만에 대한 군사도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 형성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의 대만침공이 현실화될 경우, 주요 제조업과 연계된 반도체 분야가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대만 반도체 제조업체인 TSMC는 지난달 24일 일본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반도체 연구개발센터를 개소했다. 사업비 370억엔(약 3550억원)의 절반 규모인 190억엔은 일본 정부가 지원했다.
이와 함께 TSMC가 일본 소니, 덴소와 공동으로 운영할 반도체공장도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 건설 중에 있으며, 공장은 오는 2024년 12월부터 가동될 예정이다. 공장 건설비용 약 1조1000억엔 중 절반가량인 4760억엔은 역시 일본 정부가 지원키로 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이 지난 3월 한국과 일본, 대만정부에 개별적으로 제안한 ‘칩(Chip)4 동맹’ 구축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해당 동맹은 이미 앞서 지난 5월,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가 구축된 상황에서 미국과 아시아 반도체 제조국들끼리의 협력을 강화하고 중국에 대한 억제력을 키우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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