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단체 신지형도]경쟁과 협력의 역사.."독자 활동영역 개척해야"
정치권과 유착 과거 극복도 과제
[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 국민의힘은 지난 6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반도체·미래차 등 신산업에 대한 지원과 규제 혁신을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윤석열 정부의 미래 패러다임 구축에 뜻을 같이하며 반도체 등 미래먹거리 첨단산업 지원책 마련을 뒷받침하겠다"고 강조했다. 윤 정부의 경제 정책 파트너로 전경련을 선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코로나19 여파로 미뤄졌던 한일 재계 협력에서도 전경련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다. 전경련은 지난 4일에는 일본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과 3년 만에 한일재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지속가능사회 실현을 위한 한일 협력 등 양 국 간 경제협력과 관계개선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전경련의 역할과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경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던 대한상공회의소의 역할이 축소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하지만 전경련이 과거 '재계 맏형'의 위상을 회복하기 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산적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경련처럼 재계 총수가 연이어서 회장직을 맡으면서 그 역할이 커지고 있는 대한상공회의소가 당장 경쟁자로 꼽힌다. 경제계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전경련과 대한상의의 미묘한 경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중복되는 회원사·비슷한 역할 "두개의 태양 필요한가"
법정 경제단체인 대한상의와 순수 민간단체인 전경련의 역할이 최근 중복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독자적으로 벌이는 사업이 있지만 점차 서로 간의 영역이 사라지면서 눈치싸움이 심화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대한상의와 전경련은 이달 제주도에서 나란히 포럼을 개최한다. 대한상의가 오는 13~15일간 제주 해비치 호텔 앤드 리조트에서 '제45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을 열고, 이어 전경련이 20~23일 롯데호텔 제주에서 '전경련 최고경영자(CEO) 제주하계포럼'을 개최한다. 휴가철을 맞아 회원 기업 대표들을 초청해 경제 현안을 논의하고 친목을 다지기 위한 목적도 비슷하다.
최근 경영계에서 화두로 떠오른 '기업가정신'에 대해서도 두 단체는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한상의는 지난 5월 '신기업가정신'을 선포했다. 기업이 기후변화와 사회 양극화, 공급망 재편, 코로나19 발생 이후 사회적 문제들을 함께 풀기 위해 동참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신기업가정신 선언문도 내놨다.
전경련도 기업가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전경련은 지난 1996년 기업윤리헌장을 제정하면서 "우리 기업은 창의와 활력이 넘치는 기업가정신을 발휘하여 경영과 기술을 혁신하고 투명한 기업경영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는 바람직한 정경문화를 정착시켜 건강하고 튼튼한 기업으로 키워 나가야 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작년 10월에는 경영학계와 함께 '대한민국 기업가정신 르네상스 포럼'을 개최, 기업가정신의 회복과 재확산에 대한 공감대를 마련했다.
또 최저임금 결정이나 한미 정상회담, 누리호 발사 성공에 이르기까지 사회, 경제적 현안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평을 내는 것 역시 두 단체의 역할이 중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분야에서도 탄소중립 가치 창출, 중소기업 지원,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 등 대동소이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정부의 경제 정책 수립과 기업 애로해소를 위해 여러 경제 단체들이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면서도 "미국 등 해외 경제단체의 경우에서는 독자적인 이슈나 연구 프로그램 등으로 차별화를 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경유착·재벌 대변인' 굴레에서 벗어나야
전경련은 이병철 삼성 회장 주도로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로 만들어질 당시에서부터 지난 박근혜 정부까지 정치권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등장한 과도기 정부가 삼성과 삼호그룹, 럭키화학, 현대건설 등 기업 총수 24명을 부정축재자로 지목해 조사를 실시, 탈세혐의 기업인들이 무더기 연행되는 일이 발생했다.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풀어줬는데, 기업인들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단체를 결성해야 한다고 느꼈고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전경련이다.
우리나라 각계를 대표하는 기업과 업종별 단체들이 회원으로 소속, 국내 경제·산업 성장을 주도해왔다. 울산공업단지·수출산업공단·종합무역상사 등 설립을 제안하는 등 그동안 크고 작은 경제 변화를 주도해왔다.
하지만 탄생부터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 출발하다 보니 정경유착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두환 일해재단 자금 모금과 노태우 대선 비자금 지원, 이회창 불법 정치자금 제공,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한 기금 마련 등 뿌리깊은 정경유착이라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정치권의 요구와 재벌의 이익이 맞닿으면서 어둠의 역사가 만들어진 셈이다.
결국 삼성과 현대자동차, SK, LG 등 4대 그룹이 모두 전경련에서 탈퇴했으며 회원사도 600곳 안팎에서 450곳 정도로 줄어들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경제단체장 신년간담회, 해외 순방 일정 등에서 전경련을 '패싱'하는 모습이 연출됐고, 그 역할은 대한상의가 대신하게 됐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경련이 잃어버린 역할이 되찾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당선인 시절 가진 경제단체장 모임을 전경련을 통해 추진하는 것을 계기로 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행보를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며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경제단체가 '재벌의 대변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아직까지 전경련을 탈퇴한 4대그룹이 복귀하지 않은 이유도 이러한 부담이 작용하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전경련 가입과 관련해 "여건이 되면 고려할 수도 있는 것 같다"면서도 "지금으로선 여건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아 아직 가입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경제단체마다 각기 다른 경제계 목소리를 대변하기 때문에 전경련의 정부 활동 참여는 필요하다고 본다"면서도 "다만 전경련은 앞으로 기업들의 참여 유도를 위해 활동 영역을 다각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현길 기자 ohk041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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