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C 청산도 무당집 과부, 과거길 표류 선비와 '정'을 나누다
해양문학의 진수 '표해록' 산문 양식의 조선 로맨스
‘그녀는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가 앉는다. 처음에는 엄숙한 말로 준절히 거절하는 것이 도무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의 은근한 이야기를 듣고는 추파를 굴리는 듯 하더니 이야기하는 품도 점점 누그러 진다. 혹은 수줍어 하며 교태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짐짓 노한 체하며...그러나 잠자리에서 서로 기쁨을 나눔에 미쳐서는 마음이 혼곤히 흐뭇해져서 성내어 꾸짖던 소래는 뚝 끊어진 지 오래고 다정스런 마음이 끓어올라 견딜 수 없다...’(18세기 문헌 '표해록' 중에서)
남녀의 이 은근한 색정은 1771년 전남 완도군 청산도라는 섬에서 실제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이다. ‘남녀유별’이라는 성리학 기반의 조선 사회로서 파격적인 묘사가 아닐 수 없다.
18세기 중후반. 제주도 향반 장한철이라는 인물과 평생 청산도를 떠나 본 적 없는 섬 과부 의 애절한 사랑. 그 과부는 ‘조씨의 딸’로 문헌에 기록됐다. ‘조씨의 딸’은 청산도 무당의 딸이기도 해서 팔자가 예삿 여인이 아닌 셈이다.
장한철은 영조 때 인물로 제주 애월면 애월리 출신의 지방 관리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지방공무원에 합격하고 중앙부처 근무를 목표 삼아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지방 인재였다. 물론 그는 어린 나이에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기록상으로 추정하면 20대 후반쯤 됐다.
이 장한철은 향시에 장원 벼슬한 후 지역 향반과 집안 어른들의 지원에 힘입어 1770년 12월 25일 한양에서 치러지는 과거 길에 오른다. 제주 포구에서 일행 29명과 함께 뭍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게 된다. 폭풍을 만나 일엽편주가 되어 망망대해를 떠다니다 지금의 오키나와 어느 무인도(‘호산도’라 표현했다)에 닿아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이들은 ‘로빈슨 크루소’(1719년 발표)가 되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날만 기다린다.
그들은 지나는 선박에 구조 신호를 보내며 학수고대했다. 다행이 한 척의 배가 접근했다. 왜구들이었다. 그들은 구조는커녕 물건을 다 빼앗고 전원을 알몸으로 만들어 나무에 매달고 가버렸다.
그럼에도 조선 조난자들은 천행으로 월남 상선에 발견되어 알몸 객사를 면할 수 있었다. 그 월남 상선은 조선인들로선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범선이었다. 배 안에서 돼지, 닭 등을 기르고 채소를 심어 먹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처음엔 대접도 좋았다. 하지만 월남 선원들의 적대감에 조선 조난자들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선주 측 중국 관리자는 조선인 조난자들을 곱게 제주도에 돌려보내자고 하나 월남 선원들은 “예전 탐라국(제주) 관리가 제주에 표류한 월남 왕자를 죽이고 상선의 보화를 약탈했다”며 그 복수로 이들 또한 살려 두어선 안된다고 흥분했다.
다행히 장한철이 중국인 관리자와 한문 필담과 기지로 간신히 종선을 얻어 제주 한라산이 보이는 바다에 내려진다.
하지만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았다.
제주도 해역을 벗어나 청산도 인근 바다에서 또다시 표류하게 된 그들은 물결 흐름대로 떠내려 갔다. 하늘을 향해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으나 거센 파도에 묻혔다. 그리고 높이를 알 수 없는 거센 파도에 밀린 배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물고기밥 신세가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천운이 따랐던 8명이 절벽 바위를 붙잡고 살아남았다. 표류자들의 지도자였던 장한철도 목숨을 구했다.
장한철은 청산도 표착 전 굶주림에 시달리며 비몽사몽 간에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춘몽이었다. 여인의 자태는 손에 잡힐 듯 유혹적이었다. 물귀신이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기사회생한 여덟 명의 조난자들은 청산도 섬사람들의 도움으로 안정을 찾아 제주 귀향을 준비했다. 청산도 백성들은 이웃한 신지도 진(鎭) 수령의 지휘를 받는 무지렁이가 대부분이었다. 장한철은 청산도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남자가 적은 데 비해 여자의 수가 더 많다. 고깃배가 쉴새 없이 드나드는데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이 섬엔 둔장(屯長)과 검찰(檢察) 각기 한 사람이 있어 섬을 다스렸다.’ 청산도 사람들은 완장 찬 이들에게 착취를 당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순박했다. 제주 선비이자 벼슬아치인 장한철의 학식에 감복해 떠받들었다. 조난자들도 장한철의 지혜로 살아 돌아왔으므로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봉했다.
장한철과 일행이 자신들의 구사 일생을 조상 덕이라 여기고 청산도 당집을 찾아 기원할 때 아름다운 여인이 그들 앞에 선녀처럼 나타났다. 그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 여인, 바로 ‘조씨의 딸’이었다.
장한철은 사람을 넣어 그 여인의 어머니와 여인의 몸종 매월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 전하고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설복했다. 딸이 불쌍했던 여인의 어머니는 신분 귀한 사내가 딸을 유혹하는 것을 못본 척 했다. 싹싹한 매월이 중매쟁이처럼 오갔다.
매월이 장한철에게 말했다.
“손님께서 꿈속에 아씨를 만났다는 얘기를 전하였더니 그 말을 듣고는 마치 마음속으로 애정을 느끼는 것 같아서 별로 준절히 물리치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장한철은 당촌(堂村) 매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여인의 방으로 들었다. 여인은 장한철을 보고 짐짓 노한 체하며 말한다.
“죽일 년 매월이가 날 팔았구나.”
극한의 생존자와 섬 과부의 운우지정은 매화 꽃 달빛 그늘이 창살에서 사라질 즈음 끝났다.
장한철은 품안 여인에게 “처음에는 매월을 죽일 년이라고 꾸짖더니...뒤에 와선 매월이 밖에서 추워 얼어죽겠다고 마음 아파 함은 어쩐 일이냐?”고 농을 했다.
그러자 여인은 교태를 띠고 수줍어 할 뿐 대답이 없이 그의 가슴을 파고 들며 말했다.
“하늘이 전생에 못다한 연분을 이으라고 오늘 밤 다정하게 만날 기회를 주셨는가 봅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잇더라도 백년고락을 오직 선비님만 받들어 누리고 싶습니다만...”
이에 장한철은 한 숨 쉬며 말했다.
“월로(月老:연분을 맺어주는 신령)께서 혼인할 시기는 겨우 한 번만 빌려준 모양일세. 그럼에도 연리지가 어찌 우리가 아닐까 보냐. 그러나 슬프게도 네가 어머니를 버릴 수 없듯이 내가 여기 산다한들 고향 그리워 하는 마음이 생길 테니 이 또한 어쩌겠느냐? 다음 생에 북두칠성에서 견우와 직녀로 만나는 것이 소원이구나.”
“내 낭군님의 사정을 어이 모르겠습니까. 저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남풍이 불 때 좋은 소식이나 전해주십시오. 저는 꼭 5년 기한으로 뭍 장흥에 나가 낭군님의 과거 합격을 소원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두 연인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섬을 떠난 장한철은 한양에 가 과거를 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4년 여를 더 준비한 끝에 급제할 수 있었다. ‘탐라실기’에 제주 대정현감과 강원도 취곡 현령을 지냈다고 기록되었으나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또한 청산도에서 한양 과거길을 배웅하던 ‘조씨의 딸’을 장흥에서 다시 만났는지도 알 수 없다. 훗날 장한철은 자신이 겪은 내용을 ‘표해록(漂海錄)’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그 ‘표해록’은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시작과 같은 작품이다. 해양지리서와 설화집로써 가치가 높다. 1959년 서울대 정병욱(1922~1982) 교수가 소장자 장응선(당시 애월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부터 문헌을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 청산도 근대지도. 1920~30년대 제작된 세밀 지도로 당시 당락리가 ‘표해록’에 기록된 ‘당촌’으로 보인다. 당집 과부 여인의 집이 있던 곳이다. 그 당락리(또는 당리)는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인공 세 명이 당리 돌담길에서 ‘진도아리랑’을 걸판지게 내지르며 놀던 청산도 미장센이다.
한편 청산도 동쪽 해안 단애는 장한철 일행이 표착하려다 배가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으로 추정된다. 애초 10명이 절벽 바위를 붙잡고 살아 남았으나 이중 2명이 폭풍우 속에 해안 절벽을 오르다 떨어져 숨졌다. 장한철과 청산도 주민들 그들을 거두어 당집에서 장사를 지내주었다.
laka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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