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들이 보는 탈세계화
WSJ "인플레, 탈세계화가 진짜 원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에 대한 서방의 제재는 세계화를 후퇴시킬 겁니다. 경제적 연계가 줄어들면 세계는 더 낮은 수준의 성장과 혁신을 겪을 겁니다. 가계와 기업의 실질 투자 수익률도 모두 하락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미국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의 애덤 포센 소장이 지난 3월 포린어페어즈에 기고한 글이다. 최근 전 세계적인 탈세계화 기조에 미국 경제계에서는 ‘세계화의 종식이 다가오고 있다’는 분석이 연이어 쏟아지고 있다. 포센 소장은 코로나19 확산 초기였던 2020년에도 ‘코로나 경제 전쟁(매경출판)’을 통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취약해진 세계 경제에 ‘경제민족주의’라는 또 다른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세계화가 2000년 이전 수준으로 회귀할 수 있으며 앞으로 세계 경제의 ‘블록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오크트리자본운용 공동 창업자인 하워드 막스 회장도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세계화가 역내 공급망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며 비슷한 맥락의 주장을 해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은 세계화 기조 속에 각국 경제가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값싸게 생산해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됐으며 기업들은 ‘가장 싸고 쉬운 공급망(Just in Time)’보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공급망(Just in Case)’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는 진단이다.
최근에는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세계화를 다시 추진해야 한다”면서도 이미 코로나19 사태로 세계화의 동력이 약해진 측면이 있다고 인정해 전 세계 경제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팬데믹과 공급망 병목
▷슬로벌라이제이션 불러와
지난 5월 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2022, 이하 다보스포럼)에서도 ‘탈세계화’ ‘세계화의 종식’ ‘디커플링(탈동조화)’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이곳에 모이는 세계 기업인과 투자자들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분위기였지만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 세계 공급망 혼란을 겪은 뒤에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지난 30여년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속화했던 공급망 글로벌화가 사실상 종결되고 지역주의, 국가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공급망이 등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다보스포럼을 앞두고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는 탈세계화에 대한 언급이 부쩍 늘었다. 데이터 분석 업체인 센티에오에 따르면 올 1분기 실적 발표와 콘퍼런스콜 기간 동안 ‘온쇼어링’ ‘리쇼어링’ ‘니어쇼어링’ 등 언급이 2005년 이후 17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팬데믹을 겪은 뒤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다국적 기업 최고 경영자와 투자자들도 30년간 이어진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있다며 우려했다.
이들 기업인과 투자자가 FT와의 인터뷰에서 진단한 탈세계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붕괴, 러시아 제재에 따른 에너지·곡물 등 국가 안보 문제 부상, 중국과 미국의 갈등에 따른 블록화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조제 마누엘 바호주 골드만삭스 인터내셔널 회장은 “팬데믹으로 미국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됐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며 “이런 상황은 세계 경제의 디커플링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호주 회장은 또 “과거에는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해 세계 각국에 생산기지를 두는 ‘오프쇼어링’이 대세였다면, 최근에는 해외로 이전했던 생산시설이 자국으로 돌아오는 ‘리쇼어링’에 더해 ‘니어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 등 탈세계화의 흐름도 분화하고 있다”는 분석을 덧붙였다.
아시아 최대 제약 회사인 일본 다케다제약의 크리스토프 웨버 대표도 “기업들이 원가 절감을 위해 생산을 아웃소싱하던 공급망에서 지정학적 위험을 줄이는 공급망으로 옮겨 가는 추세”라며 “기업이 원하는 것은 보다 지속 가능한 형태의 세계화”라고 말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각국 경제가 완전히 갈라선 것은 아니라고 진단한다. 팬데믹과 공급망 병목 현상 속에서 세계화 속도가 후퇴하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sation)’ 정도로 본다는 인식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느리다(Slow)’와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sation·세계화)’ 합성어로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2019년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거시경제에도 파장
▷‘바이 아메리칸’ 이후 美 물가 상승 전환
탈세계화든, 세계화 후퇴든 경제계가 그에 따른 공급망 변화를 우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플레이션 공포’ 때문이다. 공급망과 재고 관리 방식이 급격히 변화할 경우 거시경제에까지 파장이 미쳐서다. 단순히 과거보다 비용이 증가해서가 아니라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글로벌 공급망의 대규모 재편은 본질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강조했다. 포센 소장은 “세계화가 종식되면 세계화에 힘입어 성장한 각 국가와 기업들의 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 글로벌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혁신 또한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역시 ‘세계화 후퇴는 물가 상승의 또 다른 원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단기 물가 급등 원인으로 흔히 공급망 차질과 노동 공급 부족, 재정 확대가 꼽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탈세계화 또는 반(反)세계화가 진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세계화가 물가를 낮춘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학계에서 제기돼왔다. 무역장벽이 낮으면 기업이 보다 저렴한 제품을 수입하기 위해 경쟁하고, 이 과정에서 물가가 하락한다는 논리였다. 반대로 해석하면 탈세계화 현상이 물가를 올릴 가능성도 다분하다는 의미다. 씨티그룹 분석에 따르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감소하던 미국 가계 유지비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한 2017년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2017년 1월~2020년 3월 가계 유지비는 3% 올랐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8.5%나 뛰었다.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유럽과의 관세 분쟁을 끝냈지만 중국과의 무역 전쟁 기조는 유지하면서 탈세계화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은 여전한 상황이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게리 클라이드 후프바우어 이코노미스트는 “바이든은 트럼프의 무역 정책 지속에 더해 국산 원자재 사용, 전기자동차·배터리회사 친노조 정책 등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며 “이런 무역 정책이 지속된다면 미국 CPI 상승률이 0.5%포인트가량 오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골드만삭스도 세계화 후퇴로 미국의 근원물가가 최대 2% 더 올라갈 것으로 추정했다. 또 IMF는 2019년 당시 무역 정책 불확실성만으로도 세계 GDP가 1% 가까이 감소했으며 추가적인 붕괴는 막대한 글로벌 비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세계화로 미국 등 선진국과 신흥 시장·개발도상국(EDMC) 간 불평등이 더욱 심화된 가운데, 최근의 물가 상승 압력이 EDMC를 부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그동안 세계화로 모든 국가가 낙수 효과를 누릴 것이라던 믿음이 탈세계화를 거치며 깨지고 있다”며 “국제통화기금 회원국의 특별인출권(SDR)을 저소득 국가에 재배분하는 식으로 부채 관리를 도와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다운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6호 (2022.07.06~2022.07.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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