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버스' 아빠의 파업.. 0.3평 감옥에 갇힌 남자를 응원합니다

조혜민 2022. 7. 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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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 지지 '10000X10000 프로젝트' 동참하는 이유

[조혜민 기자]

어린 시절, 저녁 6시 퇴근 시간대가 다가오면 아빠는 차를 타고 엄마를 데리러 갔다. 차 뒷좌석에는 내가 있었다. 저 멀리서 엄마가 걸어와 차 문을 여는 순간, 운전석에 있던 아빠는 "투쟁!"이라고 외쳤다. 그럼 엄마는 "조용히 해!"라고 말했고 나는 낄낄 웃었다. 

'투쟁'이라는 단어를 내가 언제 알게 되었을까.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아빠를 통해 그 단어를 알았다. 경험하지 못한,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아빠의 '투쟁', 정확히는 아빠의 '파업'으로 그 단어를 알게 되었다. 

우리 아빠는 버스기사였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섰고 그다음 날 새벽 1시에 돌아왔다. 아빠의 일은 단순히 운전대에만 머물지 않았다. 차가 막혀서 도로에 묶여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 승객들의 짜증과 욕을 들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운전을 하다가 도로 한쪽에 버스를 주차한 후, 승객들께 몸을 숙이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후다닥 건물 화장실을 향해 뛰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던 아빠는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몇 년 전, 그런 아빠가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야,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2박 3일의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제주도 여행 갔을 때 찍은 가족사진
ⓒ 조혜민
 
'빨간버스' 운전기사 아빠의 파업 

퇴직하기 전인 2011년, 아빠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파업에 들어갔다. 무수히 많은 아빠의 파업을 봤었지만 당시의 파업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 지켜본 첫 파업이었어서 마음이 힘들었다. 당시 나는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아빠의 '빨간 버스'를 자주 타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파업이 시작되자 뉴스는 시끌벅적했다. 언론사들은 '시민들의 발 묶어', '시민들은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라는 말들로 아빠가 파업을 왜 했는지 보다, 파업으로 인한 '불편함'을 앞다투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인터넷 기사들에 달린 댓글에는 온갖 욕이 쓰여있었다. 

그 때 내가 가장 후회한 건 아빠에게 휴대전화 작동법을 적극적으로 알려준 것이었다. 아빠는 잠을 쪼개어 자며 일해야 했기에 휴대전화의 많은 기능 중 알람 작동법을 알게 되었을 때, 유독 좋아했다. 하지만 그 휴대전화을 통해 아빠가 마주해야 할 현실은 참담했다. 

'아빠도 이 댓글들을 보겠지.' 너무나 화나고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무렵, 한 댓글이 보였다. "파업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댓글을 쓴 사람의 이름을 보니 내 친구의 이름이었다. 아이디를 보니 내 친구의 별명이었다. 내 친구가 쓴 댓글이었다.

나는 아빠의 파업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정당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달라, 젊은 후배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빠의 요구였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런 한편, 나는 두려움을 갖곤 했다. 나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아빠의 파업을 이해받지 못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친구들에게 이 상황을 전하면서도 기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내 친구가 우리 아빠의 파업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며 댓글을 남긴 것이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아빠가 휴대전화를 볼까 걱정했지만, 사실 문제는 댓글이 아니었다.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은 온라인 공간에만 있지 않았다. 당시 파업은 버스 운행을 멈춰서는 것이 아니었다. 적절한 배차 시간, 승객들의 안전을 고려해 적정 승객 인원만을 태운, 말 그대로 '안전운행'을 하는 게 파업의 방식이었다. 버스기사들만의 파업이 아닌 우리들의 파업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출퇴근에 불편함을 느낀 승객들은 빨간버스를 타자마자 기사에게 욕을 했다.

이런 현실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빨간버스를 타지 않으려고 계속 피했다. 그렇게 피하다가 결국 피하지 못한 어느 날, 버스기사에게 욕을 내뱉은 승객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그렇게 종점에서 내린 나는 무작정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내게 그 말해주었다. "네 탓이 아니야."

돌아보면 아빠의 파업은 말 그대로 아빠만의 파업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군가에게 나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걸 일깨워주었고 또한 누군가의 파업에 마음을 보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지 않더라도 응원과 지지의 말을 보내고, 당신의 파업은 결코 당신만의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 곁에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보내는 것 말이다. 
 
 6월 24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유최안 부지회장이 가로·세로· 높이 1m의 철 구조물을 안에서 용접해 자신을 스스로 가둔채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 금속노조 선전홍보실
 
최근 SNS를 통해 한 사진을 보게 되었다. 철 구조물에 몸을 구겨 넣고선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쓴 종이를 든 대우조선 하청노동자의 모습이었다. 좁은 그 공간에 들어가기까지 너무 많은 어려움이 서려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명의 하청노동자가 가로, 세로, 높이 1미터 공간의 쇠창살을 만들어 스스로 몸을 가두고, 6명의 하청노동자가 15미터 높이의 난간에서 농성해야만 했던 현실에 이제야 귀 기울여본 나는 그저 부끄러웠다. 

사측은 '불황'이라며 하청노동자들을 내쫓고 임금을 줄여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호황'을 맞이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노조 측은 지난 5년간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임금 삭감률이 30%였다며, 1년이 넘도록 12차례 교섭했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작업 도구와 소모품조차 지급해주지 않아 직접 마련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지적했지만 사측이 그저 버티고, 파업을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는 게 노동자들의 증언이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은 요구사항은 너무나도 상식적이었다. '이제라도 임금을 돌려달라, 노조 활동을 인정해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그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그래야만 숙련공의 재생산과 세대교체가 불가능한 조선업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들만의 투쟁이 아닌 셈이었다. 

'파업할 결심'을 응원하는 방법 

파업하던 아빠를 보고 자란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였다. 그때, 내가 힘을 받았던 것처럼 지금 파업하고 있는 이들에게 힘을 주는 것.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우조선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자 '만민연대기금'에 동참하며 1만 원을 보냈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하는 '만민연대기금'(10000X10000 프로젝트). 한 사람당 1만 원씩, 그렇게 1만 명의 마음을 모아 파업하는 하청노동자 200명에게 1인당 50만 원씩 파업연대기금으로 지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 달 생계비로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하청노동자들이 지금의 투쟁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당신만의 파업이 아닌 더 나은 노동을 위한 우리의 파업이 될 수 있도록 지지하는 마음을 보내자는 제안이다. 모금은 이들의 월급날 전날인 7월 14일 자정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노조 측에 따르면, 프로젝트를 시작한 당일(6월 29일) 약 2800명의 시민들이 5400여 만 원을 보냈다고 한다. 이 흐름은 계속 이어져 모금 시작 이틀 만에 목표치 1억 원에 가까운 9900여 만 원이 모였고, 지난 2일 기준 1억8000여 만 원을 기록했다고 한다(관련 기사 : 1만원씩 1만명...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모금 통했다). 

"아빠의 파업을 보고 자란 아이는 커서 파업연대기금을 보내고 함께 하자고 외쳤습니다." 이 정도도 해피엔딩인 것 같지만 지금의 욕심을 보태어 한 줄 더 추가하고 싶다. "그렇게 그 아이는 만민연대기금을 통해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1만명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이다.

오늘도 투쟁에 나선 그들이 외롭지 않도록, 멀리서나마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대우조선해양 하청지회 후원 요청 웹자보
ⓒ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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