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만두가 서비스? 짜장면보다 2배 비쌌다..1965년 메뉴판 사연
모든 것은 이 낡은 메뉴판에서 시작되었다. 1965년 가격표라니, 그것도 손으로 쓴 메뉴판이라니. ‘보꾼밥’은 볶음밥일 텐데 ‘소마면’은 뭐고 ‘잡탕’은 또 뭘까. 유난히 노포 좋아하는 박찬일 셰프가 늦은 밤 이 사진을 보내왔다.
“목포에 이 메뉴판 걸고 장사하는 중국집이 있다 하네. 내려갑시다. 지금 메뉴판이 따로 있겠지만, 그 시절 음식 몇 개는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메뉴판이 나랑 나이가 같아.”
1965년 가격표가 걸린 중국집은 전남 목포 목포오거리에 있다. 전국구 빵집 ‘코롬방제과’ 건너편에 자리한 ‘중화루’다. 중화루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중국집이다. 이른바 ‘중깐’으로 유명하다. 1947년 개업했으니, 올해로 76년째인 노포다. 대표 왕윤석(63)씨는 화교 출신이다. 중국 산둥(山東)성에 살던 할아버지가 구한말 들어와 뿌리를 내렸고, 왕씨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1947년 작은할아버지가 개업한 중국집을 1950년 아버지가 인수했고, 1995년 지금 대표 왕씨가 물려받았다. 왕씨는 “가게를 맡은 건 30년이 안 되지만, 중학교 때부터 볶음밥을 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Q : 중깐부터 얘기할까요? 워낙 유명하니까. 중깐이 뭡니까.
A : ‘중화식당 간짜장’의 준말입니다. 처음 우리 집 이름이 ‘중화식당’이었거든요. 언제부턴가 중국집 간판에 ‘루’ ‘각’ ‘원’ 이런 글자가 붙더라고요. 제가 가게를 맡고서 중화루로 바꿨습니다. 중국집이 원래 고급 요릿집이었잖아요. 청요리라고 했었지요. 목포오거리가 잘나가던 1970년대엔 접대와 회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4·2·8’이라는 코스 요리가 있었어요. 냉채 요리 4가지, 샥스핀·해삼쥬스 같은 고급 요리 2가지, 그리고 탕수육·난자완스 같은 대중 요리 8가지. 이렇게 14가지 코스 요리가 끝나면 마지막에 가벼운 식사로 나오는 게 중깐이었습니다. 기스면과 중깐 중에서 고르는 거였어요.
Q : 일반 간짜장과 다른 게 있나요.
A : 중깐이 훨씬 손이 많이 갑니다. 면부터 다릅니다. 중깐은 면을 가늘게 뽑습니다. 코스 요리 다 먹고 또 먹는 음식이어서입니다. 면이 가늘어야 부담이 덜하잖아요. 짜장 소스에 들어가는 채소와 고기도 잘게 잡습니다. 돼지고기는 아예 다진 고기를 쓰고요. 유니짜장과 비슷한데, 또 다릅니다. 유니짜장은 굵은 면을 씁니다. 중깐은 소스를 볶을 때 전분을 넣지 않고요. 중깐의 핵심은 속도입니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면을 뽑습니다. 면 삶을 때도 데치듯이 빨리 삶고, 후딱 헹군 다음에 계란후라이와 오이채 얹고 바로 냅니다. 소스도 센 불에 빨리 볶습니다. 면이 가늘어 잠깐 놔둬도 금세 퍼지거든요. 먹을 때도 후다닥 비벼서 빨리 먹는 게 좋습니다.
중깐 맛은 어떨까. 짜장면을 발랄한 맛에 먹는다지만, 중깐은 기대보다 더 발랄하다. 씹을 때 식감이나 목을 넘길 때 기분 모두 가볍고 경쾌하다. 가는 면이 주는 효과다. 짜장 소스는 강하고 달다. 빨리 볶아서 불맛이 나고, 양파 향도 은은하게 돈다. 즉석에서 요리했기 때문에 향이 남은 게다. 노랗고 가는 면 위에 올라간 계란후라이와 오이채가 정겹다. 배가 불러도 남기기가 어렵다. 양이 적지 않은 데도, 술술 잘 넘어간다.
Q : 중화루 대표 메뉴인데 옛날 메뉴판에는 ‘중깐’이 없습니다.
A : 당연하죠. 코스 요리 손님에게만 내는 특별 요리였으니까요. 메뉴판에 중깐이 들어간 건, 20년도 안 됐습니다. 메뉴에 없어도 중깐을 시키는 손님들이 있었어요. 건달이 그랬지요. 옛날엔 이 동네에 건달이 많았어요. 메뉴에 없는 음식을 시킨다는 건, 일반 손님은 모르는 음식을 안다는 뜻이잖아요. 자기들도 먹어봤다, 이거죠. 건달이 주문하면 싫은 내색 없이 바로 내줬습니다. 목포오거리 건달 단골집이라고 하면, 불편한 것보다 편한 게 더 많은 시절이었으니까요. 다 옛날 얘깁니다.
사실, 목포오거리 주변만 해도 중국집 여러 곳에서 ‘중깐’을 한다. 심지어 ‘중깐 원조’라고 주장하는 집도 있다. ‘출출할 때 중간에 먹는 가벼운 짜장’이 ‘중깐’이라고 기억하는 목포 사람도 꽤 된다. 그러나 왕 대표의 설명이 훨씬 구체적이고 믿음이 갔다.
Q : 목포의 다른 중국집에서도 중깐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A : 다 같이 잘 되면 좋지요. 요즘에는 중깐 먹겠다고 서울에서 젊은 손님이 많이 내려옵니다.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요? ‘목포 하면 중깐’ 이렇게 알려지면 좋잖아요. 중화루가 원조라는 사실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Q : 메뉴판은 누가 쓴 건가요? 글씨가 참 정갈합니다.
A : 지역에서 서예 하는 선생님이 써 주셨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세요. 아버지가 중국어로 불러준 음식 이름을 한글로 받아적은 겁니다. 그래서 어색한 표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난자완스밥’의 난자완스와 ‘남짱원스’는 다른 음식이 아닌데 다른 음식처럼 돼 있습니다. 볶음밥이 ‘보꾼밥’이 된 것도 그렇고요.
Q : 메뉴판에서 지금은 낯선 음식이 여럿 보입니다. 소마면이 뭔가요?
A : 옛날 짬뽕이에요. 쉽게 말해 백짬뽕. 보세요. 메뉴판에 짬뽕이 없잖아요. 소마면이 짬뽕입니다. 옛날 짬뽕은 지금처럼 빨갛지 않았어요. 우동이나 울면처럼 하얬어요. 우동은 전분이 안 들어가서 국물이 가볍고, 울면은 전분을 써서 되직하고요. 소마면에는 전분이 안 들어가지만 국물이 묵직합니다. 고기를 볶고 국물을 내면 무거워집니다.
박찬일 셰프에 따르면, 짬뽕은 원래 초마면(炒碼麵)이었다. 여러 재료를 볶아 국물을 낸 뒤 면을 넣은 요리를 이른다. 하나 중화루처럼 소마면(燒碼麵)이라 부르는 중국집도 꽤 있다. 초마면이 산둥 지방 발음으로 소마면처럼 들려 소마면이 됐다는 주장도 있고, 소마면이 초마면보다 발음하기 편해 부르다 보니 소마면이 됐다는 설도 있다. 화국반점·거원반점 같은 부산의 오래된 중국집에선 백짬뽕을 ‘수소면’이라고 부른다. 박찬일 셰프는 “초마면·소마면·수소면 모두 여러 재료를 함께 볶은 뒤 물을 넣어 끓인 면 요리”라고 설명했다.
Q : 잡탕, 댄뿌라도 신기합니다.
A : 잡탕은 팔보채에요. 팔보채가 8가지 해물과 채소가 들어간 요리잖아요. 잡탕도 조리방식이 같아요. 대신 칼질이 달랐어요. 팔보채는 사각으로 썰고, 잡탕은 편으로 썰었어요(옆으로 길게 썼었다는 뜻). 댄뿌라는 고기튀김이에요. 소스를 붓기 전의 탕수육이라고 하면 크게 틀리지 않아요. 댄뿌라가 튀김이잖아요. 돼지고기나 소고기, 튀기면 다 댄뿌라라고 했어요. 간장에 찍어 먹는 안주였습니다. 잡채도 안주로 나오는 고급 요리였지요. 탕수육은 주방에서 소스를 부은 다음에 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부먹’ ‘찍먹’ 같은 건 없었어요.
Q : 만두 가격이 이해가 안 됩니다. 1965년엔 군만두·물만두(각 120원)가 우동·짜장(각 60원)보다 두 배나 비쌌네요.
A : 그땐 가게에서 만두를 빚었으니까요. 지금은 중국집 대부분이 공장에서 만드는 만두를 쓰잖아요. ‘군만두 서비스’가 그래서 있을 수 있는 거고요. 우리 집은 이제 만두를 안 해요. 공장 만두를 쓸 순 없고, 일손이 모자라 만들 수도 없어서. 옛날엔 주방에서 다 직접 했어요. 닭도 가게 뒤에서 키워서 썼고, 면도 손으로 뽑았죠. 수타를 무슨 기술처럼 말하던데, 옛날엔 기술도 아니었어요. 다 그렇게 했으니까.
한창 잘나가던 시절, 중화루에선 열대여섯 명이 일했었다고 했다. 지금은 왕씨 혼자 주방을 책임진다. 직원은 아르바이트생 포함해 3명이 전부다. 왕씨는 “군대 갔다 온 아들이 사회생활 좀 한 뒤에 가게를 맡아주면 좋겠는데, 아들이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메뉴판은 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낯선 이름의 음식은 뭘까, 국물이 있을까, 맵지는 않을까, 아니 차가울까, 뜨거울까. 입안에 고이는 침만큼 궁금증이 커진다. 메뉴판이 상상력을 일으킨다면, 낡은 메뉴판은 추억을 소환한다. 57년 전 메뉴판을 보고 오래전 아빠 손 잡고 갔던 중국집이 생각났고, 짜장면 곱빼기 따위는 거뜬히 해치웠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온 얼굴에 얼룩 묻히며 짜장면을 삼키던, 이제는 훌쩍 커 버린 아이의 어릴 적 얼굴도 겹쳐진다. 박찬일 셰프의 말마따나, 추억의 팔 할은 음식이다.
목포=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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