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지용제'는 어떻게 지역 문화자산이 됐을까

은평시민신문 정민구 2022. 7. 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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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 이호철 문학상 제정 취지 좋지만.. 지역과 더 가까워져야

[은평시민신문 정민구]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이 서울 은평구에 제정된 지 올해로 6년째다. 고 이호철 작가는 남과 북의 분단을 잇는 통일의 길목 은평구에서 50년 이상 거주하며 분단 현실을 비롯해 민족, 사회 갈등에 관한 집필활동을 하다 지난 2016년 타계했다. 은평구청은 지난 2017년 그의 문학적 뜻을 기리기 위해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분단 문학의 거장 이호철 작가의 통일 염원 정신을 기리고 이어가기 위해 분쟁·여성·난민·차별·폭력·전쟁 등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함께 사유하고 극복하는 세계적 작가들을 대상으로 수여한다. 

남과 북을 잇는 통일로를 품고 있는 지역 특성상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의 출발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다만, 문학상 제정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낮은 인지도 문제는 본래 문학상 제정의 취지와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는지 다시 점검할 때다.

이에 지역민과 함께하는 이호철 문학상이 되기 위해서 전국에서 오랜 기간 운영되어온 권위 있는 문학상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살펴보려 한다. 첫번째 방문지는 정지용 시인의 고향 충북 옥천이다.  

세종문화회관에 정지용이 울려 퍼지다
 
ⓒ 은평시민신문
호수, 향수 등의 시로 잘 알려진 정지용 시인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월북 시인이라는 오명으로 '정X용', '정O용'처럼 그의 이름 석 자가 정확히 인쇄된 시집이 나오지 못했다. 시인은 지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은평구 녹번동 126-10 인근에 거주하며 작품활동 했다.

전쟁 직후 강제 납북됐는데 6·25 이후 생사가 불분명해지면서 '월북설'에 휘말리고 40여년간 정부는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해 작품 모두를 판금하고 학문적인 접근조차 금지했다.

정부는 정지용 시인을 금지시켰지만 그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추앙하는 문단·학계·유가족·매스컴 등이 거듭 정부에 해금을 촉구했다. 지난 1978년부터 고 이어령 선생 등 문인을 중심으로 '문학사 바로잡기 운동'이 펼쳐졌고 이들은 관계 당국에 계속해 진정을 넣었다.

각계각층이 정지용 해금을 요구하던 상황에서 지난 1988년 1월, 해금보다 먼저 이루어진 게 있었다. 당시 문화공보부의 '납본 필증' 허가다. 깊은샘 출판사의 <정지용 시와 산문>이 문공부로부터 납본필증을 받게 됐고, 이를 계기로 출판계는 '실질적 해금'이라고 반겼다.
 
 옥천 문화원에 설치된 '지용시비'
ⓒ 은평시민신문
정지용문학상을 주관하는 '지용회' 사무국장이자 깊은샘 출판사 박현숙 사장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그동안 출판도 제대로 된 정지용 이름으로 못했는데 출판 허가가 났다는 게 해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공부에선 출판 사실 확인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당시 동아일보와 일간스포츠에서 '해금'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같은 해 3월 31일에 공식적인 해금 조치가 이루어졌다"고 부연했다. 

해금을 맞이한 다음 달인 지난 1988년 4월에는 김수남·박두진·구상·김남조·유안진 등으로 구성된 '지용회'가 결성됐다. 지용회는 정지용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이었는데 정지용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함께 노래 부르는 '지용제'를 열었다.

박 사장은 "성악가 박인수씨가 노래 불렀는데. 정말 멋졌던 기억이 난다. 또 박인수·이동원 이런 가수들이 향수를 부르면서 정지용이 대중화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서울에서 시작한 지용제, 정지용 고향 '옥천' 향하다
 
 제33회 지용제 모습.
ⓒ 은평시민신문
제1회 지용제는 특이하게도 지난 1988년에 두 차례 열렸다. 첫 번째는 당시 5월 15일(1988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고, 두 번째는 6월 25일(1988년) 충북 옥천에서 열렸다. 옥천은 정지용이 태어난 곳이다. 해금 이후 서울에서 열린 지용제에 당시 옥천문화원 박효근 원장이 '지용제' 옥천 이동과 관련해 지용회 측에 꾸준히 요구하면서 지용제가 옥천에서 열릴 수 있게 됐다.

옥천문화원 50년사에 나온 박효근 전 문화원장 인터뷰에 따르면 "그냥 옥천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식한 게 재산이다. 억지 써서 가져왔다"라며 지용회를 옥천으로 옮겨온 이유를 밝혔다.

이안재 옥천문화원 사무국장은 박 전 문화원장의 선견지명이 옥천의 백년대계를 그릴 수 있었던 결정적 판단이었다고 강조했다. 이 사무국장은 "정지용 시인의 장남인 정구관씨가 해금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옥천문화원과 교류가 있었다"면서 "그때 박 전 원장이 정지용을 알게 됐고, 서울에서 열린 지용회를 방문했을 때 옥천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자산이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옥천문화원 이안재 사무국장.
ⓒ 은평시민신문
박 전 원장의 안목 덕분에 옥천은 지용제라는 큰 문화자산이 생겼고, 정지용 시인이라는 큰 인물을 고향에서 기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지용제가 처음으로 옥천에서 열렸을 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군사정권 분위기가 남아있던 탓이다. 정지용 시인이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옥천군 내 정치인들이나 보수단체에 환영받지 못했다.

이근배 지용회 전 회장은 "보통 이런 행사를 하면 지역의 정치인들이나 군수 등이 내빈으로 참석하고 인사도 하고 행사에 참여하는 게 일반적인데 아무래도 당시에 정지용이 소위 '빨갱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래도 점차 정지용의 문학적 가치가 알려지고 월북이 아니라는 연구가 나오면서 지역의 정치인들이 참여하게 됐다"라고 덧붙였다.

정지용문학상 인기와 장수 비결
 
 2017년 지용제 30주년을 맞아 정지용문학상 시상식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제29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자는 김남조 시인이다.
ⓒ 은평시민신문
지난 1988년 처음 지용제가 열리고 정지용을 기리기 위한 '정지용문학상'은 그로부터 1년 뒤인 지난 1989년에 제정되어 34년째 이어오고 있다.

정지용문학상은 전국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문학상이다. 비결을 두고 문학상을 주관하는 지용회 관계자들은 "외압에 흔들림 없이 깨끗하고 투명한 심사 과정"이라 한목소리를 냈다.

지용회가 주관하는 정지용문학상 심사는 예심과 본심으로 나눠진다. 예심에선 최근 2년 동안 국내에서 발표된 시 가운데 우수한 작품 15편에서 20편여 선정하고 본심에선 작품 작가들의 이름을 가린 채 심사한다.

본심에서는 작품성만을 따지는데, 수상작 선정에 가장 크게 고려되는 점은 정지용 시인 시의 특징과 같은 '낭송하기 좋은 시'다. 낭송하기 좋다면 좋은 시고, 좋은 시는 곧 낭송하기 좋다는 이유다.
 
 유자효 지용회장.
ⓒ 은평시민신문
유자효 지용회 회장은 "정지용문학상은 시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뽑는 것"이라며 "심사위원들이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공정하게 심사해 수상작을 선정해 오랫동안 이어져 올 수 있고 결국 훌륭한 작품이 선정되다보니 문학인들이 받고 싶어 하는 상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용제에서 지역주민들이 함께 노래하고 먹거리를 즐기며 시를 낭송하는 축제를 통해 정지용을 기렸기 때문에 그 시너지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 덧붙였다.

박현숙 사무국장은 전국에서 많은 문학인이 지용제에 참여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그는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박태상 교수가 꽤 오랜 기간동안 시문학버스를 운영하면서 전국의 재학생들이 옥천을 찾아왔다"라며 "매년 대형 관광버스 10여 대가 올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으니 지역 상인들도 좋아하고 주최측도 만족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라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지역주민 사랑받는 문학상이 되려면...

지역문학상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재정 문제다. 이들은 지역주민들에게 사랑받는 문학상이 되려면 보다 더 적극성을 갖고 지역주민에 밀접한 행사·학술제·대중성 있는 국내 작가 수상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근배 전 지용회장.
ⓒ 은평시민신문
이근배 전 지용회 회장은 20년 넘게 지용회를 이끌면서 사비로 순금 메달을 만들어 수상자에게 주기도 했다. 그는 "첫 지용제 때 후원금 모금이 많이 됐지만 나중엔 메달 만들기가 어려워 사비로 하기도 했다. 그리고 옥천 예산으로 1000만 원 지원받다가 현재는 2000만 원이 됐다"고 말했다.
박현숙 사무국장은 "지용회는 민간에서 일관되게 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꾸준히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지용회도 앞으로 후배들이 이끌어줘야 하는데 누군가가 힘써주면서 이끌어주는 게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
 
 지용회 박현숙 사무국장.
ⓒ 은평시민신문
이어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이 지역주민들에게 친숙해지고 잘 알려질 방안을 제언했다. 박 사무국장은 "아무래도 시는 짧고 소설은 길다 보니 소설 문학상은 전국적으로도 운영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라면서 "게다가 이호철 선생은 분단문학이다 보니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이 '통일', '평화' 등을 주제로 한 제정 취지는 정말 훌륭하다. 이런 좋은 취지를 살리기 위해선 문학상이 주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라며 "하나의 방법은 본상 수상자를 외국 작가로 국한하지 말고 국내 작가 선정을 통해 주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놔야한다"고 강조했다.

30여 년간 정지용문학상 운영해온 실무자 박 사무국장은 행정에서 문학상을 직영 운영하는 것도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행정에서 직접 문학상을 운영하다 보면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휘청일 수밖에 없다. 출판사나 언론사를 통해서 운영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이호철 선생의 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 전 지용회 회장 역시 "세계의 유명한 제3세계 작가들에게 평화, 여성주의 등을 주제로 상을 주는 취지는 좋지만 역시나 국내에선 잘 모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본상을 국내 작가들에게도 주거나 공동 수상하는 방식을 고려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유자효 회장도 "이호철 선생은 은평의 아주 소중한 분이다. 그분의 문학이 우리 민족의 분단사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선 큰 자산"이라면서 "이호철 선생의 문학적 가치가 지역과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다양한 학술제나 지용제 같은 행사가 필요하다. 그래야 지역에서도 접근성이 좋아질 수 있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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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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