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만 14번..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 응우옌득상을 기억하라
[권현우 기자]
베트남 호치민시는 2021년 코로나19로 약 3개월간 봉쇄되었다. 당시 베트남 정부가 도시 통제를 위해 군대를 동원했을 정도로 상황이 엄중했다. 호치민시에 사는 나를 걱정한 한국군 피해자분들이 안부 전화를 했을 정도였다. 그중에는 호치민시 외곽에 살고 있는 퐁니·퐁녓학살 피해자 응우옌득상도 있었다.
"너희 가족은 무사하니? 우리 동네는 온통 확진자야. 코로나에 걸려서 죽을까 너무 겁이 나는 걸. 허허허."
그때도 응우옌득상은 심각한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다. 그는 통화 내내 유쾌한 목소리로 나의 안부를 빌어주었고 우리는 코로나가 끝나면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맨 오른쪽)이 담긴 사진(다낭박물관 전시 중)을 들고 있는 응우옌득상 |
ⓒ 한베평화재단 |
베트남이 코로나 사태의 극심한 혼란에서 빠져나와 안정을 되찾은 2022년 5월의 마지막 날, 나는 응우옌득상의 집을 찾았다. 그날은 나에게 조금 특별했는데, 12년간 지내온 베트남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던 날 저녁이었기 때문이다.
공항으로 가던 길에 그의 집을 방문했고 나의 아내와 30개월 된 아이도 응우옌득상을 함께 만났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예전보다는 말랐지만 건강해 보였고 우리 세 가족의 방문에 무척 기뻐했다. 아이가 있어서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출국을 앞둔 터라 마음에 여유는 없었지만, 응우옌득상과 나누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애틋했고 훗날에도 이 순간들이 기억에 남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2개월 전 응우옌득상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가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당시는 위드 코로나 정책 속에서 호치민시뿐만 아니라 한국도 확진자가 폭증했던 대혼란의 시기였다. 가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응우옌득상만 확진이 되지 않았다. 그는 "내가 확진된 아내와 포옹도 했는데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어. 하하"라고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은 내 확진 소식을 듣고 너무 무서워서 마스크를 쓰고 작은 방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어. 아픈 내가 넣어준 음식을 먹고 죽은 듯이 일주일을 버텼지"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응우옌득상은 당시의 일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했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음을 무척 두려워했다고 했다. 그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그의 아내는 "아저씨는 (학살) 트라우마가 있잖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14번 수술 끝에 살아남은 생존자, 그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한국군에게 총을 맞고 14번 수술을 했어. 그런데 한 번은 의사도 아닌 의대생 녀석이 수술을 했는데, 잘라낼 필요가 없는 여기 신장을 실수로 잘라버렸다니까!"
그날도 응우옌득상은 자신의 학살 피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나를 만나면 늘 먼저 피해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보통의 피해자들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 응우옌득상은 가슴에서 무언가 불끈 솟구치는지 두서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털어놓을게. 먹고 바로 죽을 수 있는 약 같은 게 있다면 콱 삼키고 죽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 나는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5분만 지나면 내가 어디 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거든. 오토바이를 탈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지.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자주 해. 그런 약 어디 없을까? 하하하."
그는 비참한 심경을 유쾌한 듯 기괴한 어조로 이야기했고 약을 이야기할 때는 과장된 손짓을 취했다. 그는 같은 이야기를 내 아내에게도 되풀이했다. 나보다 베트남어를 잘하는 아내도 분명 느꼈을 것이었다. 저런 어조와 몸짓은 응우옌득상이 전쟁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기 위해 나름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이다.
▲ 2016년 여름, 평화기행단이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왼쪽)을 방문했을 때 마침 고향에 온 응우옌득상도 함께 만났다. 당시 그는 참가자들에게 복부의 총상 자국을 보여주었다. |
ⓒ 한베평화재단 |
나는 그동안 응우옌득상을 다섯 번 만났고 그가 졸도하는 것을 세 번 보았다. 그는 갑자기 쓰러졌다. 피로를 호소하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실신하기도 했다. 그를 처음 만난 2015년에는 학살 이야기를 하던 중 쓰러졌고, 2018년 퐁니·퐁녓학살 제삿날에는 무리한 탓인지 쓰러졌다. 가족들의 품에 안겨 방으로 옮겨지는 그를 세 번이나 봤던 나였기에 한국에서 응우옌득상의 방한 가능성을 물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그는 분명 학살 피해로 인해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다.
응우옌득상의 호치민시 집에서 퐁니·퐁녓 학살 따이한 제사가 열리면 호치민시에 사는 그의 친인척들이 모이곤 했다. 제사와 음복연이 끝나면 남자들끼리는 술상이 이어지고 여자들끼리는 다과 자리가 이어졌는데 나는 두 자리를 오가며 그들과 기일을 함께 했다. 부엌에서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응우옌득상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가보니 약간은 취한 그가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고 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다름 아닌 아리랑의 후렴구였다. 내가 놀라워하자 그는 껄껄껄 웃으며 즐거워했다.
학살 사건이 있기 전, 한국군과 어울릴 때가 있었는데 그때 배운 한국 노래를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한국군 학살 피해자가 가족의 제삿날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한국의 전통 민요를 듣고 있으니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잠시 후 친인척들이 없을 때 나는 물었다.
"그날 아저씨는 한국군이 시키는 대로 방공호에서 밖으로 나갔을 뿐인데 왜 바로 총을 쏘았을까요."
그러자 그의 안색이 차갑게 변하더니 거친 말투로 대답했다.
▲ 퐁니·퐁녓 학살 희생자 기일(2019년 2월), 응우옌득상의 집 2층에 마련된 희생자 제단. 가운데 사진은 사건 당시 34살의 나이로 목숨을 잃은 그의 어머니 판티찌. |
ⓒ 한베평화재단 |
공항으로 갈 시간이 되어 나는 그에게 그동안 더 자주 찾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더니 호치민시의 친인척들과 동네 이웃들에게 오늘 내가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가져오더니 호치민시에 사는 자신의 조카들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인사를 나누게 했고, 퐁니 마을에 있는 삼촌에게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주고받게 했다. 나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나의 방문이 그에게 결코 작은 의미가 아니었음을 말이다.
대한민국은 응우옌득상을 기억하라
다가오는 8월, 1968년 2월 12일 베트남전 퐁니·퐁녓학살 사건의 피해자이자 응우옌득상의 여동생인 응우옌티탄이 한국 법정에서 학살 피해를 증언한다. 그의 삼촌이자 사건 당시 남베트남군 민병대원으로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시신을 수습한 82세의 응우옌득쩌이도 법정에서 증언한다.
이번 재판은 원고 응우옌티탄이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벌이는 국가배상소송으로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 마지막엔 이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약을 먹고 죽고 싶었던 수많은 날을 살아낸, 이 재판의 또 다른 원고나 다름없는 응우옌득상이 베트남에서 이번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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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한베평화재단의 <아카이브 에세이 '숨'> 연재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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