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낙태권 폐지 뉴스를 보며 떠오른 책

허형식 2022. 7. 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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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선택: 낙태죄 폐지를 위한 연대의 이야기'를 읽고

[허형식 기자]

요즘 미국이 심상치 않다. "나의 몸, 나의 선택(My Body My Choice!)"을 외치며 미국 곳곳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유명 밴드 그린데이의 리더 빌리 조 암스트롱은 미국 시민권 포기까지 포기했고, 할리우드 스타들은 여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키웠다.

지난 6월 24일 미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로 보장받았던 '임신중단권'을 49년 만에 뒤집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다 후퇴한 것일까? 진보적인 성향의 조 바이든 대통령의 임기 중에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미국 연방대법관 9명 중 3명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기 중에 뽑았던 보수적인 성향의 대법관이다. 그들을 포함해 총 6명의 대법관이 "임신중단 불법화는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손을 들어준 것. 

미국은 그렇다 치고 한국은 현재 임신중단이 합법일까? 불법일까? 정답은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닌 '무풍지대'라는 사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 중 임신중지를 한 여성을 처벌하는 269조 1항과 여성의 요청에 따라 임신중지에 조력한 의료인을 처벌하는 270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헌법재판소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헌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해당 법 조항이 효력을 잃는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아직 법 개정안은 상정되지 못한 상태다.

이런 와중에 우연히 책 <선택-낙태죄 폐지를 위한 연대의 이야기>(이후 <선택>으로 표기)를 발견한 건 운명인 걸까? '르 몽드'가 "<선택>은 안타깝게도 다시금 현안이 되어버린 투쟁의 기나긴 역사를 재조명한다"고 추천한 이유가 궁금해져 서둘러 책을 열었다.
 
▲ 선택 표지 선택 표지
ⓒ 위즈덤하우스
 
<선택>은 한국보다 앞서 낙태죄를 폐지(1974년)하고 몸의 권리를 쟁취한 프랑스 여성들의 기나긴 투쟁의 현장을 그래픽노블이라는 형태로 보여준다.

공동 작가 중의 한 사람인 데지레 프라피에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와 낙태죄 폐지 전후 프랑스의 상황, 활동가들의 인터뷰, 신문과 포스터 등 당시의 자료 등이 어우러져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의 결정적 장면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데지레 프라피에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가 이야기의 핵심 뼈대다. 데지레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관심을 못 받은 채 살아왔는데, 자기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집보다는 기숙학교, 위탁가정, 공동 홈 등에 잠깐씩 머무르며 여러 사람을 만나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정확히 몰랐다.

마침내 1974년 '베유 법'이 통과되면서 임신중지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데지레는 어머니의 고백을 통해 비밀을 알게 된다. 어머니는 "나도 세 번이나 낙태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미처 말하지 못한 나머지 비밀은 집의 낡은 다락방의 편지 더미에서 발견된다. 데지레는 낙태의 실패로 태어났던 것. 마침내 그동안 본인이 느꼈던 소외감의 원인을 깨닫게 된 그는 어머니와 화해한다. 그리고 스스로 데지레(Desiree, 원했던 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 시몬 베유 연설 장면 도서 <선택> 중33페이지에 실린 시몬 베유 연설 장면 촬영
ⓒ 위즈덤하우스
 
1974년 베유 법이 통과되는 장면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그려진다. 1974년 11월 24일 신임 복지부장관 시몬 베유는 남성 의원 469명, 여성 의원 고작 9명뿐인 국민의회에서 연설한다.
  
시몬 베유는 다수를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잘 알고 있었기에 베아의 인간성과 여성 인권에 대한 이론적 논쟁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온건한 태도로 주장을 밀고 나갔다. - 34p
 
하지만 남성 의원들의 공격은 악랄했다. "지금 제시된 법안을 따르면 끔찍한 꼴을 보게 될 겁니다. 죽은 태아의 시체들이 쓰레기통에 넘쳐날 걸요!", "생명불가침을 망각한다면 나치 인종주의와 다를 게 뭡니까!", "낙태라는 안타까운 상황을 스스로 각오한 여자는 여자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요!". 시몬 베유가 살던 건물 현관에는 '유대인 뒈져라'는 낙서가 그려졌다.
이 책을 그저 '임신중지를 선택할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기나긴 싸움을 담은 작품이라고만 이해해선 안 된다. 한국어판 해제를 담당한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대표)이 책에 남긴 글을 발췌하고자 한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 선택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처벌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여성만이 그 선택에 대한 도덕적·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이 선택을 처벌로써 가로막아온 국가의 의도는 무엇인지, 임신의 유지 혹은 중지라는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들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 처벌의 결과로 여성들에게는 어떠한 불평등과 차별, 강요, 폭력, 낙인이 계속되어왔는지, 여성들의 성 건강과 피임, 임신, 임신중지에 관련된 보건의료의 현실은 어떻게 더 낙후되고 위험을 방치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역사와 현실이 바로 이 '임신중지를 선택할 권리'라는 말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인 것이다.
-119p
 
<선택>을 덮고 뒤늦게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떠올랐다. 한국 사람들이 대단히 외면하고 싶어하는 '청소년 임신'이라는 소재를 꺼내 든 건 대단히 노희경 작가다웠다. 하지만 이들 부부가 출산을 선택한 건 다소 아쉬웠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임신중지가 당연한 권리이고, 그에 상응한 사회적, 의학적,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다면 이들 부부가 출산이 아닌 다른 선택을 고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시청자들은 다른 결말을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내심 아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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