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히든캐스트(93)] 박혜민 "데뷔작 '모래시계', 더 없이 소중한 작품이죠"
뮤지컬에서 주연배우의 상황을 드러내거나 사건을 고조시키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코러스 혹은 움직임, 동작으로 극에 생동감을 더하면서 뮤지컬을 돋보이게 하는 앙상블 배우들을 주목합니다. 국내에선 ‘주연이 되지 못한 배우’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5월 26일 대성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모래시계’는 1995년 24부작으로 방영한 동명의 TV드라마가 원작이다. 유신정권 말기부터 6공화국 출범까지를 배경으로 5·18 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등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작품 속에는 운동권 학생, 기자, 시민군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래시계’를 통해 데뷔한 뮤지컬 배우 박혜민은 앞서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혜린의 비서, 카지노 딜러, 고등학생 등 다양한 역할들로 무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맡은 역할들의 각각의 비중은 크지 않지만, 놀랍게도 박혜민은 주·조연 배우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단 한 순간도 무대에서 죽어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그의 마음가짐이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낸 셈이다.
-먼저 뮤지컬 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해요.
저에게 뮤지컬이라는 꿈이 생긴 계기는 아주 특별한 일이었어요. 초등학교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보러 갔을 때 일이죠. 뮤지컬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 극을 보는 내내 들었던 그 기분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심장이 온몸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달까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당장이라도 무대에 뛰어 들어가서 함께 하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마치 제 안에 세포들이 하나 하나 살아서 춤추는 기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그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CD를 사서 듣고 따라하고, 꾸준히 사랑하다 보니 지금의 제가 된 것 같아요. 저는 공연 보기 전에 기도를 할 때면 늘 이렇게 기도하곤 해요. ‘주님, 제가 저 무대에 꼭 설 수 있게 해주세요!’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가지고, 준비하던 시절은 어땠나요?
뮤지컬이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증폭된 제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뮤지컬을 공부하면서 제 한계를 자꾸 마주하게 되는 거예요. 상황 속에서의 나는 기분이 다양하게 변화하는데, 노래로 표현하면 한계가 오는 거죠. 예를 들자면, 음정은 고음이지만 악상과 작곡가의 의도를 보아 작은 소리로 힘 있게 부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미치겠더라고요. 넘버 안에서 다양한 변화를 주고 싶은데 제 한계가 자꾸 소리에서 느껴지다보니 답답한 마음에 거의 매일을 울면서 지냈던 시절이 생각나요.
물론 지금도 많이 부족하죠. 하지만 이제는 그 때보다 몇 걸음 더 걸어가서 그런지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꾸준함과 성실함만이 올라가는 계단을 밟을 수 있으니까요!
-현재 공연하고 있는 ‘모래시계’가 데뷔작이죠. 데뷔 소감을 들려주세요.
네, ‘모래시계’와 함께 하는 매순간이 감사하고 정말 행복해요. 늘 꿈꾸던 무대를 밟게 되는 순간이 온 거잖아요. 특히 첫 공연 날 ‘overture’(극이 시작하기 전에 오케스트가 연주하는 음악)가 시작될 때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아직도 생생합니다. 공연 첫 날, 무대에서 첫 발을 디뎠을 때 기분이요. 벅찬 이 감정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처음’이라는 단어가 평생 기억에 남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많이 어설펐겠지만 빠르게 적응하려고 노력했고 더 정확하게 하려고 반복 연습을 했던 것 같아요. 창작이라 가능한 고민들과 과정들이 너무 행복했어요. ‘모래시계’를 하고 있는 이 순간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처음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맞아요! 오디션을 진행하고, 이틀 후에 전화 한통이 왔어요. PD님께서 합격했다는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셨는데 저는 다음 오디션이 또 진행되는 줄 알고 ‘뭘 준비하면 될까요?’라고 되물었죠(웃음). 사실 최종합격이었는데 말이죠. 전화를 끊자마자 저는 그대로 힘이 풀려 한참 주저앉아 있었어요. 미팅 가는 날까지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더라고요. 미팅을 하고 나서야 완전히 받아들였어요. ‘나의 시작이 모래시계라니!’ 말도 안 되게 행복했죠.
-‘모래시계’라는 작품에 참여하기 전, 원작 드라마도 보셨나요?
사실 작품에 참여하기 전에는 명대사 몇 줄과 유명한 배우님들이 나오는 클립 영상들만 몇 차례 본 게 전부였어요. 합격 소식과 동시에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시작했고, 그 때 그 시절의 시대적 배경들을 많이 찾아보고 공부했어요.
-연습 과정은 어땠나요? 첫 작품의 첫 동료들이라 더 애착이 갔을 것 같은데요.
이런 좋은 프로덕션을 만났다는 사실에 늘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머릿속에 많은 분들이 떠오를 만큼 감사한 분들이 정말 많아요. 연습 과정은 창작이라 더 뜻깊었어요. 하나, 하나씩 찾아내고 완성해 나가는데 되게 보람차더라구요. 그래서 ‘모래시계’에 더 애착이 가고 스며들게 되는 것 같아요. 가장 감사한 건 스태프 분들이에요. 항상 저희보다 일찍 오셔서 분주히 준비 해주시고 배우들이 다치지 않게 하나 하나 신경 써주시는 부분들이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그래서 연습 때부터 지금까지 늘 감사함을 갖고 매순간 소중히 임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점들 덕분에 관계가 형성되고 좋은 호흡으로까지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웃음).
-작품에서 어떤 캐릭터들을 맡고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저는 시민군, 고등학생, 운동권 학생, 혜린 비서, 카지노의 딜러, 주주, 기자로 등장합니다. 그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은 형광 민트색 점퍼를 입고 등장하는 운동권 학생이에요. 우선 제 나이와 가장 유사해서 접근할 때 공감대가 많았죠. 그리고 유독 뜨거운 마음을 갖게 하는 인물이에요. 옷의 힘인가?(웃음) 이 옷을 입으면, 절대 지고 싶지 않은 마음과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들이 요동치면서 눈을 반짝이게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학생들이 술을 마시며 놀기도 하고 뜨겁게 시위를 하다가 끌려가기도 하는 모습이 무대에 차곡 차곡 쌓여 빌드업이 될 때 제 마음이 가장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저로 온전히 돌아오면 모든 순간이 감사해지죠.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희가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요
-말씀하신 그 ‘민트색 점퍼’를 입은 운동권 학생 역 덕분에 주·조연 배우만큼이나 비중이 크다고 느껴졌어요. 그만큼 임팩트가 크다는 의미에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단 한순간도 무대에서 죽어 있지 않으려고 해요.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고 매순간 살아 있는 인물이 되려고 합니다. 인물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잠깐 등장을 하더라도 진짜를 하려고 노력해요. 이러한 점들이 어필이라면 저만의 어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도 들려주세요.
큰 상황에서부터 인물의 기분까지 좁혀 들어가는 것 같아요. 첫 번째로는 정확한 상황을 먼저 인지하려고 해요. 시대적인 배경부터 인물이 처한 상황까지 전부요. 그러다 보면 그 인물이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찾아지더라고요. 그리고 목표를 정합니다. 제가 행동을 할 수 있는 목표를 찾고 다양한 행동들을 찾아봐요. 인물이 다 다르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라도 다르게 바꿔보려고 시도해보는 것 같아요. 다양한 행동들이 쌓이다 보면 인물이 보이게 되는 것 같아요. 저의 유니크함을 믿고 과감하게 그려 나가려고 합니다.
-많은 캐릭터들을 연기하기 위해선 준비할 것도 많겠죠?
맞아요. 아무래도 인물이 많다 보니까 그들을 다르게 그려 내기 위한 고민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처한 상황부터 정확하게 인지하고 손가락 하나라도 바꿔 보고 다양한 행동들을 찾고 많이 시도해봤어요. 같은 행동이라도 상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니까 그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뮤지컬 배우로서 무대에 설 때의 마음가짐도 궁금해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매일 기도를 해요. 오늘도 제가 이 무대에 설 수 있음에 너무 감사하고, 거짓됨이 아니라 진짜를 할 수 있게 말이죠. 그리고 단 한 장면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하자는 생각을 되뇌며 조용히 첫 등장을 기다립니다.
-‘모래시계’에서 가장 애정하는 넘버(혹은 장면)가 있다면?
‘새로운 시대’라는 넘버를 가장 애정해요. 그 넘버는 운동권 학생들과 귀빈들이 나눠져서 교차로 보여지는데, 제가 하면서도 가장 마음이 아픈 장면이에요. 귀빈들이 더 부유하고 행복하게 누릴수록 시위하는 학생들이 더 처절하게 보이게 되죠. 일단 넘버 자체도 너무 좋고, 교차로 그려 놓은 장면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가장 잘 담은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앙상블로서 작품에 참여하면서의 고충도 있나요?
앙상블로서 힘든 점은 없었어요. 다양한 인물을 그리는 것도 재미있고 많은 배우들과 각자 다르게 호흡을 맞추는 것도 너무 좋아요. 한 가지 찾자면 ‘퀵’이죠! 의상을 아주 빠르게 체인지 하는 일이에요. ‘몇 초 만에 옷을 갈아입고 다음 씬에 나가는 일이 정말 가능한가?’ 라는 생각을 연습실에서 했었는데, 가능하더라고요. 하하. 처음 퀵 할 때가 가장 떨렸던 것 같아요. ‘만약 갈아입지 못하고 나간다면…’이라는 상상하기도 싫은 일들을 생각하면서 미친 듯이 갈아입죠.
-가장 보람이 큰 순간은요?
저는 앙상블이 주는 힘이 정말 큰 것 같아요. 다른 공연들을 보면서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경험도 앙상블의 합창과 그들이 주는 에너지를 보고 많이 느꼈는데 그 속에 제가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낍니다. 이 작품 역시 앙상블들이 한 장면에서 목표를 향해 쏟아낼 때 정말 희열이 느껴져요. 그게 앙상블이 주는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시즌에 또 ‘모래시계’에 참여하게 된다면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으신가요?
훗날 저에게 그런 감사한 일이 주어진다면 ‘영진’이라는 캐릭터를 마주해보고 싶어요. 영진이는 정말 야무지고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멀리서 지켜보는 듯해도 이 상황을 누구보다 아파하며 애쓰고 있는 인물이죠. 모든 인물이 다 매력 있지만 주어진다면 ‘영진’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꼭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이나 캐릭터가 있나요?
예전부터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 있어요. 뮤지컬 ‘맘마미아’인데요, 극중 ‘소피’라는 캐릭터가 너무 맑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맑은 성격 속에 성숙함이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을 꼭 해보고 싶어요. 그 중 ‘Thank you for the music’이라는 넘버의 가사를 너무 좋아해요. 제가 늘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담긴 노래랄까요. 정말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이기에 기회가 된다면 꼭 참여해보고 싶어요!
-롤모델로 삼고 있는 배우도 있을까요?
초등학교 때부터 조승우 배우를 좋아했어요. 많은 분들이 공감할 부분이지만 조승우 배우의 섬세하고 진실된 연기와 노래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저에게 많은 배움을 주시는 것 같아요. 다양한 인물들을 늘 다르게 그리시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가만히 걸어 나오시기만 해도 그 압도적인 분위기가 관객을 휘어잡죠. 또 디테일한 정서들이 노래에 하나, 하나 다 녹아 있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무대에 서고 싶어요.
-박혜민 배우가 지금의 자리에 서있기까지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있다면?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언제나 제 편이 되어준 분은 엄마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마지막 학교까지 모두 떨어지고 엄마한테 제일 죄송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엄마는 괜찮다며 제가 하는 모든 일 뒤에는 엄마가 있다고 말씀하셨죠. 덕분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그 누구보다 제가 잘되길 언제나 바라시는 분이시죠. 어려움 끝에 제가 데뷔를 하게 됐고, ‘모래시계’로 무대에 서있는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보시면서 얼마나 행복해 하실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서 저는 더 노력하고 나아가고 싶어요!
-어렵게 오르게 된 ‘무대’가 박혜민 배우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궁금하네요.
저에게 무대란 ‘아주 신성한 공간’이에요. 어떠한 개인적인 일들이 있어도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저’만 남고 다 사라지게 돼요. 너무 신기한 경험이죠. 오직 무대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제가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벅찹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순간부터 내려오는 그 순간까지 너무 행복해요. 저는 죽기 전까지 무대 위에 있고 싶어요! 그만큼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사한 공간입니다.
-뮤지컬 배우로서 박혜민 배우의 신념이 있다면?
선한 영향력을 주는 배우가 되는 것. 뮤지컬을 하나 올리기 위해서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다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부터 늘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해버리죠. 언어가 곧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말처럼 항상 언어의 신경을 많이 쓰려고 해요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처럼요. 선한 행동들은 쌓이고 쌓여서 개인에게 영향을 주고 관객에게까지 전달이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해서 시작한 일들이 함께해서 더 행복하다는 생각을 늘 되뇌며 하루를 살아가려고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주는 배우이자 사람이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박혜민 배우의 목표를 들려주세요.
저의 가까운 목표는 지금 공연하고 있는 ‘모래시계’를 무사히 매듭을 짓는 일이에요. 언제든 돌아봤을 때 후회 없도록 말이죠. 공연하는 내내 하루가 갈 때마다 너무 아쉽습니다. 그만큼 공연하는 하루 하루가 저에게는 너무 소중해요. 그 날들을 온 마음을 다해 임하고 무사히 매듭을 짓고 싶어요. 최종 목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성 있는 ‘배우 박혜민’이 되는 겁니다. ‘믿고 듣는다’ ‘믿고 본다’라는 말들이 있잖아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이 수식어들이 제 이름 앞에 붙는 그 날까지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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