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야전(野戰)으로 돌아온 문삼화 연출
문삼화 연출은 서울여자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반복적인 직장생활이 싫다며 무작정 미국으로 날아가 5년을 버텼다. 한국으로 돌아와 유시어터에서 연출 감각을 기른 뒤 <사마귀>로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베스트 3에 선정됐다. <라이방>, <고령화 가족>, <세자매>, <일곱집매>,<지상 최후의 농담>, <정의의 사람들> 등의 대표적인 작품을 해왔다. 늦었다며 택시를 타고는 카카오톡으로 이동 지점을 실시간으로 알려왔다. 서울시 극단 단장, 예술감독(2020)으로 선임되어 공공극장 생활 2년을 마쳤다. 당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금 여기,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했었다.
“문삼화(文三和)라는 이름은 무협지 소설 등장인물 같다”고 첫 마디를 꺼내자 그녀는 “(웃음) 본명이에요.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데 석삼자, 화평할 화자를 써서 ‘문삼화’로 지으셨어요. 삼종지도(三從之道) ‘삼’자를 썼는데 그 길로 걸으면서 화목하게 살라고 지으신 이름인데 이름하고 완전 반대로 가고 있어요. 외동딸인데 부모님 말씀은 안 들은 것 같고, 결혼도 안 했으니까요. 연극 하는 것을 마흔 까지는 반대하셨는데 그 뒤로 포기하셨죠.”라고 응수했다.
연출 데뷔 작품을 <사마귀>(2003)로 한다면 연극연출가로 20년을 쉬지 않고 한해 세 작품씩 60여 편을 해왔다. 문삼화 연출은 서울시 극단 2년의 세월을 아쉬워하는 듯해 보였고 둘러서 얘기하지 않았다. 말은 시원시원했고, 눈치도 보지 않았다. 말을 담아두지 않고 털어내는 성격이었고 때로는 돌직구도 날렸다. ‘불가불가’를 기획할 당시 길가에서 마주친 연출은 파격적인 기획과 이철희 연출 조합에 예술 감독으로 상당한 기대감을 드러냈었고 작품 각색에 인색한 이현화 선생을 찾아가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80년대 ‘불가불가’를 현재로 재소환하면서 연출의 조합으로 파격적인 시선을 받을 것 같다고 말하자 “이현화 선생님도 각색에 대해서 유연해지시고 계시 다면서 몇 차례 더 찾아가 봐야 할 것 같다”며 예술 단장으로 기대감이 높아보였다. 연극평론 100편이 수록된 <동시대 연극 읽기>(연극과 인간)을 문삼화 연출한데 보낸 적이 있었다. 연출은 사석에서 “많은 작품 중에 내 작품만 없네”라며 웃으면서 돌직구를 던졌다. 그녀의 작품 중 6∼7개 작품을 봤는데 글로 인연이 닿지를 않았다. ‘연극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문삼화 연출 삶과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시기가 오지 않았다. ‘불가불가’ 공연을 본 뒤에는 그녀는 극장에 없었다. 2년의 서울시 극단 예술감독을 끝내고 나서야 문삼화 연출을 만날 수 있었다.
| 서울시라는 거대 구조에서 원칙과 규율은 견고하게 느껴졌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서울시극단 여성 단장은 김혜련 단장 이후 문삼화 연출이 처음 맡아서 해왔는데 2년 동안 서울시극단은 어땠나.
“적응 시간을 많이 보냈던 것 같아요. 연극이라는 직업은 변칙과 즉흥, 충동의 가치를 주는 직업이고 무대에서 의외의 변수가 많은 작업이잖아요.(문삼화 연출은 무대에서의 연출의 변화, 창의적인 무대의 과정과 연극적인 의외성 들을 긍정적인 의미로 변칙과 변수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텍스트를 분석할 때도, 창의적인 장면을 구상하다 보면 의외 적인 무대표현을 위해 변칙이나 변수 같은 것들을 기대할 때가 있어요. 시 극단은 시스템에서 움직이는 규율과 원칙이 기본적인 구조에요. 출퇴근부터, 작업도 시스템 안에서 할 수밖에 없고요. 처음은 원칙과 규율대로 하려니까 완전 싸움닭이었어요. 공무원들은 ‘당연한 방식’이었다면 ‘왜 당연할까?’ 질문을 던졌던 것 같아요. 서울시라는 거대 구조에서 원칙과 규율은 너무 견고하게 느껴지면서 적응 시간을 많이 보냈던 것 같아요.”
―어떤 원칙들이 힘들었나.
“코로나 때문에 공연을 못 하고 영상으로 돌리고 이럴 때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텼던 것 같아요. 공연은 못 할 수 있더라도 연습은 해 놓겠다. 연극은 과정도 중요하지 않으냐. 코로나19로 예측되니까 ‘아예 연습도 하지 마라’라고 하면 ‘난 연습은 하겠다’고 하는 거죠. 출·퇴근도 명확해야 하고요. 서울시 ’뉴딜 일자리 정책’은 연수 단원들의 근로 시간이 주 50시간을 넘기면 안 되잖아요. 연습 들어가면 그게 됩니까? 결국 뉴딜 일자리 정책을 포기했어요. 안 하겠다고 했어요. 연극인들이나 예술가들한테는 거리감이 있는 정책이죠. 작품들을 뒷받침해 주는 예술 행정직원들한테는 맞는 일자리 정책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서울시극단 예술 감독으로 선임되고 현장 연극을 할 때처럼 공격적으로 하셨군요(웃음)
“세종문화회관 본부 사무국 직원들이 되게 많이 피곤하셨을 거예요. 맨날 부대끼고 토 달고 막 이러니까 굉장히 힘드셨을 거예요. 한마디로 서울시라는 거대한 공무원 조직은 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점점 이해가 되더라고요. 예외를 인정해 줄 수 없는 것을 깨달으면서 적응이 될 만했는데 여기서 멈추니 아깝기도 해요. 그분들을 덜 괴롭히면서 할 법도 한대. (웃음)
―페이스북으로 보니 함께 했던 공무원분들이 퇴임식을 잘 마련해 주시던데.
“퇴임사는 ‘품어주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였어요. 유시어터 10년 연출부로 있을 때는 어떻게 하면 공연을 잘 만들 수 있을까? 이었다면, ‘뚱딴지’ 10년은 내 새끼 챙기느라고 바빴거든요. 작품과 극단의 존재 방식을 고민을 해왔는데 코로나19 이후에 극단 시대도 저물고 있다는 위기감 같은 게 느껴졌어요. 이 시대에 어떠한 방식으로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서울시 극단에서는 연극이라는 전체 환경에서 연극이 어떠한 생태계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을 했죠. 코로나 시대에 연극도 영상화로 지속되면서 연극이 정말 아날로그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질문을 강하게 하게 된 것 같아요. ‘진짜 박물관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멸종 희귀동물 보호하듯 진짜 보존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MZ세대들이 연극에 관심은 가질까’하는 연출가로 위기의식이 드는 거예요. 무대 대면 공연이 멈춰서면서 연극의 존재와 공연방식에 대해서 고민 들을 하기기 시작했어요. 이런 위기감이 들면서 서울시 극단에서 ‘연극의 시각 확장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연극의 생태계가 코로나로 다양화되고 변화되면서 전체적으로 시각이 확장됐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연극과 영상의 개념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내 작품, 내 새끼가 아니라 연극이 어떻게 하면 코로나 시대에 살아남을지 고민하게 돼요. 요즘 유튜브 시대이고, 드라마도 정말 잘 만들잖아요. 치료와 위로는 다 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어제도 유튜브를 보다가 잠들었다는데 매일 보거든요.” (그녀는 10분 이상의 강의 유튜브도 1.5배 이상의 속도로 본다며 웃었다.)
―연극 연출자가 드라마를 통해 치료와 위로를 받는군요.
“최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 위로는 드라마가 다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들도 잘 만들잖아요. 시대에 강렬한 질문들을 던지는 걸 보면 ‘연극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공공극장에 있으면서 더 하게 됐어요. 레퍼토리와 라인업을 어떻게 구성할까 라는 고민을 하면서 코로나 시대에 ‘어떤 연극을 해야 할까’까지 연결이 되었던 것 같아요. 연극의 영상화 시대에 연극의 생존방식을 다른 차원에서 책임감과 진지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라인업을 한 서울시극단< 오아시스>도 기존 연극하고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연극이거든요.”
―그럼, 연극은 이 시대에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모르죠. 그러니까 고민되는 거죠.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데 결국 연극은 관객과 현장에서 만나는 대면성에 있거든요. 한마디로 연극은 오리지널리티인데 복제나 복사 불가능하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2년 동안 공연으로 대면을 안 하고 살아보니까 적응되는 거예요. '줌' 회의가 편하고 카카오톡으로 일하는 것도 당연해졌잖아요. 문제는 그거죠. ‘그렇다면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하고 고민해 보면 관객을 극장으로 어떻게 끌어올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아요. 방송, 드라마, 영화에서 다하는 표현과 방식을 우리가 똑같이 하고 있다면 매력이 있을까요? 존재 방식에 답은 없을 수 있지만 ‘다른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공공극장에서도 웰메이드 연극, 셰익스피어 같은 작품도 중요한데 답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런 지점에서 예술감독으로서 힘들었던 것이 작품 라인업이었어요. 이 고민을 2년 동안 치열하게 했던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연극이 생존한다면 결국에는 연극의 특성을 차별화시킬 수 있는 작품으로 승부수를 봐야 한다는 것이죠.”
| 80년대 대표적인 연극 ‘불가불가’ 재소환하는 기획으로 홈런을 날리고 이철희 연출의 감각을 대중화 시킨 문삼화 연출.
― 80년대 대표적인 작품 ‘불가불가’(이현화작, 채윤일 연출)를 선택한 것도 차별화된 생존방식 이었군요.
“우리 연극계가 창작극을 지속해서 양산(量産)하고 제도를 통해서 육성시키는 것은 너무 좋죠. 그러나 순수창작극 활성화만 한다는 것은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발표된 창작극들을 더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가불가’를 기획하고 공연하게 된 것도 우리 작품들이 많은데 한 번 공연하고 끝난다는 거죠. 70∼80년대만 해도 대표적인 작품들이 너무 많은데 우리의 클래식은 없다는 거예요. 대표적인 해외작가 하면, 셰익스피어하고 안톤체홉이잖아요. 한때 우리 극은 <산불>,<소>같은 작품들이 클레식처럼 공연됐잖아요. 유치진, 차범석 이후 국내 대표적인 작가님들도 많은데 이분들 작품이 지속해서 공연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이현화 작가 작품도 대학 다닐 때 유명했던 분이시고 작품을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재공연을 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근삼 선생님 작품 정도가 대중적으로 공연이 많이 됐다고 할 수 있는데 새로운 해석으로 공연되는 클래식 작품이 없는 게 안타까웠어요. ‘올드’ 하고 ‘노땅’ 거야 하고 제껴 놓는다는 거죠. 순수창작극의 지원과 개발을 지속해서 해나가는 것은 중요하죠. 문제는 90년대 이전 작품들이 책장으로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는 거죠. 그냥 무대화하면 클레식의 의미가 없고요. 이 시대 이야기로 젊은 연출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극의 재발견’ 처럼요.
― 야전(현장)에서 국·공립에 적응하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던데.
“원칙과 규율적인 환경에 적응하는 건 매우 힘들었는데 작품 라인업을 짜는 건 흥미롭고 재밌었어요. 처음부터 연출을 다 하지 않고 딱 한 작품만 하고 그 외 작품은 섭외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예술 감독을 하면서 좋은 연출가 작품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게 흥미로웠어요. 서울시 극단 작품과 연출을 정한다는 것이 현재 연극계의 시대적인 고민도 하게 되니까요. 월급을 처음 받아봤잖아요.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는데 그때부터는 무섭더라고요. 수입이 정기적으로 들어오면 지출 규모도 맞춰지잖아요. 세 번째 받을 때부터 무섭더라고요 ‘적응되면 안 되는데,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이 들면서 진짜 무서웠어요. 제가 야전과 현장 정글에서 살면서 고정급여 없는 불확실한 미래와 빛, 마이너스에 익숙해져 있었던 사람인데. (웃음) 앞으로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50대가 넘으면서는 ‘선배의 역할’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후배들이 연극을 하면서 버틸 수 있도록 제도 개선과 함께 갈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는 나이가 되었고요. 앞으로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연극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죠.”
― 문삼화 연출이 공연한 서울시 극단 ‘정의의 사람들’ 평가가 갈리더군요.(한마디의 질문을 던지면 연출의 대화 리액션은 빨랐고 첫 말에는 강세가 크고 톤이 높으면서도 때로 질문을 던졌다)
“광화문 광장의 역동성이 있어요. 사무실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5층에 있었는데 평일에도 집회하는 사람들 많아요. 마이크로 집회가 열리면 진짜 시끄럽죠. 건너편에 미국 대사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미국 물러가라’고 외치는 역동적인 현장에서서울시 극단의 위치적인 상징성과 장점은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있다는 거죠. 광장에서 어떤 작품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평상시 하고 싶었던 ‘정의의 사람들’을 다시 생각하게 됐거든요. 이현화 작가님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클래식 작품은 동시대적인 시각으로 말해야 해서 작가가 제 창작을 한 거예요. 젊은 세대 ‘이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불평등’에 대한 얘기를 하잖아요. 정의를 위해서 목숨 바치던 명분의 시대에서 불평등의 시대를 말하고 마지막에는 ‘젠더 갈등’도 얘기를 하는데 이런 것들이 불평등의 구조와 인식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죠. 작품에서 전쟁의 이데올로기와 정의는 이 시대 ‘정의’와 달라지는 것까지 담고 싶었는데 마지막 부분이 호불호의 논점이 됐던 것 같아요.‘ 저렇게 갑자기’라고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젊은 관객들은 ‘굉장히 시원했다’고들 했는데 보수적인 연극인 분 중에는 ‘뭐야’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평가들이 전반적으로 괜찮으면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들렸던 것 같아요.”
― 서울시 극단도 안정적인 작품발굴과 공연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소리도 들리더군요.
“6억 5천 정도에서 10억 정도로 예산이 늘어난 것 같아요. 사업프로그램을 늘려서 예산을 증액하기는 했는데 예술 감독으로 기획하고 신설한 프로그램들을 코로나로 아예 못 했어요. 예산은 크든, 작든,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배우들과 외부 스태프들이 시 극단에서 작품을 하면 개런티를 국립극단 기준 정도로 기대하시는데 70%정도밖에 못 드렸던것 같아요. 앞으로 인건비를 좀 더 늘렸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한 작품에 최대 2억 원 정도까지 예산을 편성 할 수 있는데 구조적으로 출연료 인상이 어렵다면 무대세트나 기술적인 부분을 좀 줄이고 현실에 맞게 드려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예산을 편성할 때 다른 부분을 줄이고 인건비를 더 드려보려고 노력했어요. 1억도 아니고 인생이 바뀔 금액이 아니라면 연극인으로 대접 받는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고요. 그것도 공공극장의 역할이죠. 예산이 많고 적은 차이는 있겠지만 그 차이를 떠나서 서울시 극단을 통해서 배우와 스태프들이 지금보다는 좀 더 좋은 환경 속에서 시 극단이 운영된다면 좋은 작품들을 지속해서 개발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출연료는 지금 보다 더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 크고요.”
―서울시 극단 신임단장에 선임 됐을 때(2020.6) ‘동시대성’을 살리겠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 약속을 지키려고 ‘정의의 사람들’, ‘불가불가’, ‘천 만개의 도시’를 한 거예요. 작품들을 하면서 동시대성을 살리겠다는 밑그림은 그렸는데 확실한 알박기를 못 한 거죠.(문삼화 연출의 알박기는 다양한 예술 감독의 기획과 시 극단의 방향성을 살리기에는 기간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연극이 가진 현장성이라는 것이 시대와 역사, 세대와 관통하는 인간 본연의 본질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한국 사회의 정치와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불가불가’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개인적인 것으로 돌렸어요. 이제는 70∼80년대 군부 정권과 싸우고 있는 시대도 아니고 ‘그냥 연극이고, 옳은 거야’하면서 보는 게 아니라 내 얘기야, 혹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기획한 작품이었어요. 막연한 옳음과 너무 익숙한 질문보다는 우리들과 가깝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이현화 작, 이철희 연출의 <불가불가, 不可不可>는 반세기가 되어가도 ‘계백의 칼자루’로 한국 사회의 권력과 정치 현실을 베어내는 풍자의 날카로움이 번득거렸다. 이철희는 메타연극의 놀이성을 특유의 희극성으로 현재화해 동시대의 환부(患部)를 찌르는 알레고리로 진지한 장난기를 발동했다. 황산벌 전투에 나서는 계백과 부인, 임진왜란 10만 양병설 논쟁, 병자호란, 고려 정중부 무신의 난, 을사늑약과 고종, 독립군과 부인 고문 장면을 재소환해 80년대 후반 한국 연극의 문제작으로 대명사가 된 1987년생 ‘불가불가’를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선호하는 ‘MZ세대’의 놀이성으로 ‘불가불가’를 들고 광화문을 비추며 권력과 한국 사회의 정치사(史)를 환기(喚起)해 내고 있었다.
작가는 희곡의 원형을 고수하기로 유명하고 문삼화 연출은 80년대 후반 대표적인 작품 ‘불가불가’를 광화문 시대로 소환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작품을 공연하는 것 까지는 특별하지 않은데, 이철희 표 메타 연극성을 묶어 이현화, 이철희의 ‘불가불가’로 소환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이 조합은 연극계에 화제가 되길 충분했고 ‘다시 보고 싶은 불가불가’의 기대감은 컸다. 연출은 극장 전체를 ‘불가불가’ 리허설 공간으로 개방하고 관객은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현장으로 견학하러 온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 역사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관객은 ‘연극 속 연극’으로 진행되는 극중극 장면에서 배우들이 역사적인 역할로 분해 장면을 사실적으로 연습하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황산벌 전투, 임진왜란, 병자호란, 무신의 난, 을사늑약, 독립군과 부인의 고문 장면까지 연극의 최종 리허설을 위해 배우들은 동선 맞추기, 대사 연습, 소품 준비, 몸 풀기, 극 중 인물 되기 과정을 메타연극의 놀이 행위로 바라보게 된다. 마지막에는 계백이 오늘날 소환되어 왕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는 신하의 목을 치는 장면이다. 그 목을 쳐내야 권력은 국민을 보고, 국민은 국가에 신뢰를 보낼 수 있다. 가와 불을 위장한 불가불가의 모호함은 계백의 칼날을 비켜 갈 수 없으며 그 환부를 도려낼 때 시대는 공정과 상식, 정의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철희는 80년대 불가불가의 시대극 의상을 지어내고 극 중 극의 역사를 웃음으로, 때로는 동시대를 타격하는 정치권력의 시대로 역사를 제 환기하고 풍자시키는 감각적인 불가불가로 만들어졌다.
―80년대 뜨거웠던 ‘불가불가’를 2023년 광화문으로 소환한 아이디어와 이철희 연출의 조합과 기획이 좋다고 느껴졌다.
"80년대 연극을 지금으로 재소환 한다는 것은 제 기획이었어요. 연출을 확정하고 박조열 선생님과 다양한 작가 분들의 작품도 논의됐는데 이철희 연출이 ‘불가불가’를 대본으로 읽으면서 좋았던 기억이 있다면서 선택됐어요. 이철희 연출은 ‘웰메이드’ 연극하고는 상관없는 친구잖아요. 그게 너무 매력적인 거예요. 저는 이철희 연출이 동시대성 연출의 선두 주자라고 생각해요. 작품이 정해지기 전에 연출만나서 80년대 창작 작품 중에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풀어달라고 얘기를 했는데 적중한 거죠. 이철희는 연극 권위에 대한 저항과 반항도 있고요. 잘난 척하지 마, 뽐내지 마, 있는 척하지 마, 이런 게 있는 연출가여서 동시대성을 살려낼 수 있는 적합한 연출 중에 한 명이었어요. 연극계 분들은 굉장히 많이 오셨고 작품에 대한 평가도 좋았어요.
| 반복적인 직장생활을 버렸더니 연극 ‘연출가’로 살아가고 있어요.
―원예과(서울여대)를 들어갔는데 연극연출가가 되었군요. 문 연출은 캐릭터가 있어서 배우도 잘했을 것 같다.
“선배 중에 연극·영화를 전문으로 전공한 분들 보면 참 신기해요. 우리 때 연극영화과는 예쁘고 약간 날라리다운 분들이 갔는데 그런 점이 굉장히 궁금했던 것 같아요. 연극은 막연하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연극반에 들어갔고 연기는 세 작품 했어요. 그때도 연기보다는 연출이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스태프를 하거나 배우를 하게 됐어요. 졸업을 하고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다음 미국 아이오와로 가게 되었지요.”
―직장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미국 노던 아이오와 대학(University of Northern Iowa)로 날아갔군요. (문삼화 연출은 매우 솔직하게 얘기했고 미국시절도 이제는 보편화된 유학 시대에 부담스럽다며 피하고 싶어했다.)
“도망간 거예요. 병원 직장생활 3년 해 보니까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고 반복되는 일상생활들 하면서는 못 살겠더라고요. 살면서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는데 ‘직장 3년은 너무 확실하게 이 인생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뒤늦게 대학 때 연극을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는데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대학원을 생각해 봤는데 집에서 반대가 정말 심했어요. 일단 도망가자는 생각으로 유학개념이 아니라 어학연수로 생각해서 한국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랭귀지 스쿨부터 끊은 거예요. 영어에 적응이 되면서 아이오와대학 편입으로 들어가서 3년을 연출 전공했고 졸업하고는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 있는 아시아 레파토리 극장에서 2년 동안 현장에 있으면서 5년을 미국에 있었어요. 분위기가 개방적이면서도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레파토리들이 많으니까 6시부터는 꼭 연습이 있었거든요. 배우는 한 번도 안 하고 스태프로 매일 붙어 있으면서도 재밌고 신나서 일했던 것 같아요.
― 다시 영어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영어 강사를 하면서 연극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YBM ELS 시간강사였어요. 99년 초에 한국에 들어와서 한 6~7년은 영어로 먹고 살았던 것 같아요.(웃음) YMB에서는 한 2년 반 정도 했고 나머지는 문화센터에서 강의했는데 새벽부터 해야 하니까 너무 힘들어서 2005년부터는 영어 강사를 중단했어요. 더 이상 영어 공부를 하지 않고 영어를 쓰지 않게 되면서 감각은 떨어지는데 돈을 번다는 게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왠지 사기 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영어 강사를 안 했어요.”
―문삼화 연출은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유시어터’ 생활에서 배우 유인촌씨에게 고마움을 크게 표현했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글을 보면서 문화부 장관이 되기 전 17대 대선을 앞두고 ‘걷기 전령사’가 된 그를 해남 땅끝마을부터 하루 40KM 걸어오던 유인촌 전 장관이 스쳐갔다. 그 시절 ‘거창’(2007) 도로에서 만나 3시간 동안 걸으면서 ‘김건표의 스타토크’ 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 뒤 배우 유인촌은 MB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거쳤고 그 시절 서계동으로 이전한 국립극단은 4층 규모의 복합문화시설 사업계획을 두고 요즘 공청회를 열고 있다. 유인촌씨의 마지막 말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 걸을 겁니다’ 였다.
“저를 키워주신 분이죠. (문삼화 연출은 배우 유인촌과의 미국 인연을 설명해 나갔다) 아이오와 3년 있다가 미국이면 ‘뉴욕’이지 하고 무작정 간 거예요 처음 뉴욕 식당에서 일하다가 오프 오프브로드웨이 미국 애들하고 스테이지 극장 관리도 하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유인촌 대표님이 극단 유시어터 극장을 짓기 전에 뉴욕에 극장 구경을 오신 거예요. 우리 극장이 혜화동 1번지 같은 극장이어서 다양한 실험극도 올렸고 미국의 젊은 연극인들 작품이 많이 공연되는 극장이었어요. 그때 제가 있는 극장의 공연도 좋은데 한국 여자애가 무대 감독이라고 빨빨거리고 다니니까 인상이 깊었던 것 같아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시대에 맞도록 각색한 작품이었는데 굉장히 앞서 나갔던 작품으로 기억돼요. 음악극으로 만들었는데 작품이 신선했어요, 유인촌 선생님이 그 작품을 보시고는 ‘뉴욕은 어떻게 오게 됐냐?’고 물어보셨는데 그때 ‘미국까지 왔는데 뉴욕은 가봐야지 할 것 같아서 무작정 오게 됐습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셨던 것 같아요. 그때 인연으로 귀국하자마자 ‘햄릿’ 공연을 보고 인사를 드렸더니 바로 기억하시더라고요.(웃음) 그때 유시어터 창단 전이었고 성수대교 밑에서 가변무대를 설치하고 공연하던 때였는데 ‘너 조광화 알어?’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당연히 모르죠. 그때 조광화는 완전히 스타였는데. 그랬더니 조광화가 유시어터에서 작품을 하는데 같이해봐 해서 시작하게 된 거죠.”
문삼화 연출은 유시어터에 들어가면서 워크숍 공연 연출로 <청혼>(2000), <보석과 연인>(2000), (2001), <고도를 기다리며>(2002)를 거쳐 정식 연출 데뷔작 <사마귀>(2003, 알레한드로 시비킹 작, 문삼화 역, 극단 유시어터 제작) 으로 그해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 연극 베스트 3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라이방>(2004, 송민호 작)으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젊은 연출가 전 최우수 작품상으로<Getting Out>(2005)으로 서울연극제에 공식참가작으로 선정되면서 이 작품으로 연기상과 신인연기상을 받으면서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연출가가 된다.
― 연출 데뷔작품을 왜 <사마귀>로 선택했었나?
“칠레작품인데 스페인어로 쓰인 작품을 미국에서 영어 대본 읽고 너무 괜찮아서 번역해서 그 작품으로 연출데뷔작품으로 하게 된 거죠. 이 작품이 잘 나오면서 연출 문삼화를 각인시키는 작품이 되었는데 연극평론가협회 베스트 3을 받았잖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상을 받기가 힘든 건지도 몰랐어요. 쉬운 줄 알았죠. 그 이후로 이 상을 한 번도 못 받았어요. 연출 데뷔작인데 상을 받을 수 있어서 운이 되게 좋았죠. (웃음) 그 이듬해 연극 <라이방>하고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이거든요. <라이방>은 뜨거웠던 여름이었는데 진짜 돈도 없고 제작비가 없어서 고생했던 작품이에요. 더워서 배우들도 공연 직전에 찬물 샤워를 하고 공연에 들어갔었어요. 공사를 하기 전 밀양연극촌 극장은 양철 지붕 같았어요. 오죽하면 공연 직전에 찬물 샤워하고 들어갔겠어요. 연극제에 나가면 기대를 하잖아요. 우리는 밀양에 진짜 기대 없이 갔는데 이 작품으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거였어요. 이듬해에는 서울연극제에서 제 작품으로 연기상들을 받았고요. 유시어터에 들어간 게 서른셋 이였으니까 적은 나이가 아니었죠. 상 욕심도 없었고 작품에만 집중하면서 평가도 좋았던 것 같아요.”
| 공상 집단 뚱딴지와 문삼화 연출
문삼화 연출은 유시어터에서 연출로 시야(視野)를 넓히고 단련된 뒤 2008년에 ‘공상집단 뚱딴지’를 창단하게 된다. “극단 이름 지을 때는 심사숙고 하게 되잖아요. 저는 그냥 ‘뚱딴지’가 떠올랐어요” 1회 정기 공연으로 <너 때문에 산다>(최치헌 작)로 대한민국연극 대상 연기상을 받고 <언니들>(최치헌 작)으로 이듬해 희곡상을 받게 된다. 공상 집단 뚱딴지를 창단한 이후 2020년도까지 문삼화는 재공연을 포함해 60여 작품을 연출하게 된다. <고령화 가족>(2011, 천명관 원작, 공동각색, 뚱딴지 5회 정기공연), <일곱집매>(2012, 이양구 작, 극단해인, 뚱딴지 제작), <세자매>(2013, 안톤 체호프작, 문삼화 번역, 예술의 전당 제작) <지상 최후의 농담>(2015, 오세혁 작) 등으로 문삼화 연출을 각인시키는 작품이 되고 제16회 김상열 연극상(2014)과 한국연출가 협회 제3회 올해의 연출가상(2017)을 받는다. 연출가 협회는 “한국의 연극 언어와 무대 언어의 확장에 기여했으며 동시대의 인간, 연극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연출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 공상집단 뚱딴지를 창단하면서 예술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었죠.
“연출 초기에는 오만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연극은 달라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고요. 그때 ‘예술을 하고 싶었다’면 지금 완전히 바뀌었어요. 되돌아보면, 연출을 하면서 그 시절에는 가르치려고 들게 되더라고요. <거리의 사자>(2009)가 어두운 인생 밑바닥 얘기거든요. 고등학교 동창이 그 작품을 보고는 화를 냈어요. ‘내 삶도 힘들어 죽겠는데 극장까지 와서 이런 걸 봐야 하냐?’라는 말을 듣고는 전환점이 됐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 연극을 통해서 가르치려고 들었구나. ‘예술이 삶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구나’라고 생각했건 거죠. 그 작품을 계기로 삶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지게 되었는데 2010년에는 더 난해한 거 했어요(웃음). 작품을 하면서 저한테 질문을 계속 던졌던 것 같아요. 예술이란 이름으로 오만하게 가르치려고 들었던 내가, 결국 예술도 삶의 작은 부분으로 깨닫는 데는 몇 년이 걸렸던 거죠. <고령화 가족> 연출부터는 연극성과 연극의 재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연극을 통해 강렬한 질문은 던지되 위로가 위안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연출했어요. 지금은 너무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 싫어해요. 앞으로는 코미디만 하려고요.(웃음)
―<일곱 집 매>를 연출하면서 상복도 따랐다. 2013년 서울연극제 우수작품상과 여자연기상, 한국연극 베스트 7, 제1회 이데일리 문화 대상 연극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문삼화 연출의 시선도 크게 변화된 것 같다.
“이양구 작가가 저한테 제의를 해줘서 고맙게 생각하는 작품이죠. 이 얘기를 여자 연출이 해야 한다고 믿었데요. <일곱집매>는 이양구 작가 몫이 정말 커요. 3년 동안 할머니들 곁에서 발로 뛰면서 섰던 작품이에요. 성공은 작가하고 배우들한테 있어요. 저는 그냥 숟가락 얹었어요. 인류 보편적인 이야기 말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것들, 내 가족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들이 이 작품으로 방향이 된 작품이에요. 일곱집매 이후에는 제가 작가가 아니라서 한국 사회에 강렬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하고 있지는 못해요. 저한테 일곱집매는 이양구 작가에게 두고두고 고마운 작품이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충격으로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커졌다고요.
“사실 정치에 대해서 진짜 관심이 없었어요. 신문에서 정치 얘기는 보지도 않았고 문화면만 보고 살았어요. 정치참여는 색깔을 띠게 하고 예술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했어요. 생각해 보면 정치참여도 오만한 예술과 연관이 되는 것 같아요.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까지 외면해서는 진정한 예술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들이 들 때쯤 이양구 작가가 <일곱집매>를 주면서 사회현상에 관심이 많아지는 계기가 된 거죠.”
―문삼화 연출은 창작극보다는 번역극을 더 선호 한다는 글을 어떤 리뷰에서 읽은 적이 있다. 많은 연출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을 선택한다면.
“다양한 작품 연출을 많이 해왔는데 창작극보다는 번역극을 좀 더 한 것 같아요. 연출한 작품을 세어 봤는데 낭독공연, 워크숍을 포함해 60 작품을 했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문삼화가 연출로 변곡점이 되어 준 작품은 <라이방>, <고령화 가족>, <일곱집매> 정도 정도인 것 같아요. 라이방은 롱런한 작품인데 기획사가 붙었고 밀양연극제 갈 때 마음은 ‘맨땅에 헤딩’하자 였어요.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놀 수는 없고, 연극은 하고 싶은데 연극제라도 나가야 할 것 같아 완전히 게릴라전으로 성공한 작품이에요. ‘예술이 삶보다 클 수 없다’라는 거를 한 번 더 깨닫게 해준 작품들이었고요. 예술지상주의가 컸던 시절에 그 생각을 바꿔준 작품은 <고령화 가족>, <일곱집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출을 하면서 무대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까요.
“대중성을 목적으로 하진 않는데 작품으로는 친절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온전히 자기 시간을 내서 한 시간 반 이상 어두운 극장에서 버티고 있는 관객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연극이 친절하고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해요. 심각한 건 싫어하지만 진지한 건 좋아하거든요. 연극으로 진지한 얘기를 하되 어렵고 심각하지 않게 전달할 필요는 있다는 거죠. 저는 ‘작품이 어려웠어’라는 말을 제일 안 듣고 싶은 공연 평이에요. 어려웠다는 것은 관객소통이 작품으로 실패한 거죠. 차라리 ‘재미없었어’라는 말을 들으면 소통은 했는데 ‘재미는 없다’라는 건데, ‘작품이 어려웠어’라는 말은 뭔가 있어는 보이는데 연극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죠. 저한테 최악의 평은 ‘어려웠어요’ 예요.”( 웃음)
― 문삼화 연출이 창단한 공상집단 뚱딴지는 황이선 연출이 맡고 있는데.
“황이선 연출이 공상집단 뚱딴지를 맡으면서 잘하고 있는 것 같고요. 제가 극단 운영에 대해 관여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서울시 극단 임기가 끝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요. 시 극단에 있으면서 연출을 많이 못 했잖아요. 앞으로 연출할 작업을 고민 중에 있어요. 어차피 올해는 끝났죠. 지원금 신청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 올해는 연출을 하고 싶었던 작품 리스트를 보면서 어떻게 구체화할지 고민 중이죠. 서울시 극단에 가면서 한 4년 정도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상반기에 선거도 있었고, 작품들 라인업을 다 해 놓은 상태에서 적응이 될까 했는데 마무리가 돼서 아쉽기는 하죠.”
인터뷰를 마칠 때 쯤 YBM 영어 강사 시절 학생이었던 제자가 해마다 스승의 날에는 문자나 안부를 꼭 물어 온다면서 그 친구가 외국에서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장소로 찾아온 제자는 30대 후반처럼 보였고 여전히 문삼화 연출을 선생으로 대했다. 문삼화 연출은 “제가 학교 선생님도 아니었는데도 스승의 날에는 꼭 연락해 오네요”하면서도 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원예학을 전공하고 20대 후반에는 미국으로 날아가 도전적으로 생활하면서 연극인으로 운명을 바꾼 것처럼 보였고, 30대 초반 유시어터를 통해서는 연출가의 묵직한 감각을 키워낸 것 같았다. 공상 집단 뚱딴지를 창단하면서는 그녀의 연출 세계는 분명해 졌다. 당시 김상열 연극상 측은 “연출의 관점이 다양한 변화를 통해 동시대와 인간, 연극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면서도 연극계의 편향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나 있다”고 평가했다.
그 말처럼 몇 년 후면 나이 육십이 가까워지는 데도 문삼화 연출은 <사마귀>, <라이방>, <고령화 가족> <일곱집매>를 연출 할 때처럼 뜨겁게 돌아와 있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제자와 대학로 거리로 나갔다. 인터뷰를 정리하는 책상 옆에 천명관 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리>, <유쾌한 하녀 마리사>, <고령화 가족>, <고래>,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책 들이 꽂혀 있었다. <고래>를 통해 작가 펜이 됐고 문삼화 연출한테도 한국 사회와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날카로움과 웃음의 페이소스로 그려내려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문삼화는 부인(否認)하면서도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처럼 삼종지도(三從之道) 의 길을 때로는 무대와 일상에 돌직구를 던지며 걸어가고 있었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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