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빅블러 시대의 프라이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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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를 죽이려고 손소독제로 닦은 지폐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위조지폐로 오인될 수 있다.
코로나 공포가 지배했던 시기에 위조지폐 수가 늘어났을까.
소독약 묻은 '가짜 위조지폐'가 늘었을지 몰라도 실제 위조지폐 수는 크게 줄었다.
이는 지폐와 스마트폰, 필기구까지 소독하는 사람들이 늘었을 뿐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해로운 소독약을 수시로 뿌리는 데 아무런 불만도 터뜨리지 못했던 코로나 시대를 지나온 부작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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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를 죽이려고 손소독제로 닦은 지폐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위조지폐로 오인될 수 있다. 소독제에 있는 글리세린 성분이 지폐의 길이를 좀 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이러스 없애려고 지폐를 소독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올해 1월 미국 브리검영대학은 지폐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주입한 뒤 바이러스 검출량 변화를 조사했다. 연구 결과는 ‘바이러스 주입한 지 30분이 지나면 99.9993% 감소한다’는 것이었다. 24시간이 지나면 극소량의 코로나 바이러스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코로나 공포가 지배했던 시기에 위조지폐 수가 늘어났을까. 아니다. 그 반대였다. 소독약 묻은 ‘가짜 위조지폐’가 늘었을지 몰라도 실제 위조지폐 수는 크게 줄었다. 지난해 발견된 위조지폐는 176장에 불과했다. 전년 대비 96장 감소했다. 위조지폐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가장 적었다. 팬데믹 기간에 직접 상점을 찾는 대신 온라인 거래를 더 많이 하다 보니 지폐를 직접 꺼내 쓸 일이 급감한 덕택이었다. 현금은 신용카드와 스마트폰의 등장에다 코로나19 시대까지 겹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머지않아 손에 쥘 수 없는 디지털화폐만 쓰는 시대를 맞을지 모른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중국뿐 아니라 한국의 중앙은행에서도 디지털화폐 발행을 연구하고 있다. 디지털화폐 장점은 데이터 위변조가 어렵다는 점이다. 디지털화폐 잔액이나 거래 정보를 기록하는 장부를 분산해 저장하는 방식은 범죄자들의 위변조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
문제는 디지털화폐가 현금과 같은 완전한 익명성을 보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현금에는 꼬리표가 달리지 않는 반면 디지털화폐에는 돈 흐름을 일일이 파악할 수 있는 장치를 달아 놓을 수 있다. 정부 입장에선 검은돈 세탁을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내 돈이 언제 어디에서 쓰이는지 추적 중인 상황은 분명 프라이버시권 침해에 해당한다. 사용자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다. 유럽중앙은행이 2020년 10월부터 4개월간 유로존 19개 국가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디지털 유로화 도입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우려가 나타났다. 디지털 유로화가 갖춰야 할 것을 묻는 설문조사 결과 첫 순위에 ‘거래정보 비공개’가 꼽혔다.
그러나 결제 대상과 금액, 위치 등 개인정보를 노출할지 말지 등을 선택하는 프라이버시권은 이미 상당히 약화된 상태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산업의 발달에다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시대가 밀려온 탓이다. 프라이버시권은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더 뒷전으로 밀린 모습이다. 이는 지폐와 스마트폰, 필기구까지 소독하는 사람들이 늘었을 뿐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해로운 소독약을 수시로 뿌리는 데 아무런 불만도 터뜨리지 못했던 코로나 시대를 지나온 부작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전 국민의 삼시 세끼 동선이 확인 가능한 사회에서 살고 있었다.
코로나 확산기를 거치며 탄력을 받은 빅블러 시대에 발맞춘 윤석열정부가 규제 혁신을 추진한다고 한다. 경쟁력 있는 금융산업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규제 청산 작업이 진행될 전망이다. 단 차별화된 고객 맞춤형 금융상품을 만든다는 업계 민원을 들어 광범위한 개인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하고 사용하도록 해선 안 된다. 스페인 독감 이후 100여년 만에 닥친 팬데믹 앞에서 ‘불가피’하게 훼손됐던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이 5년 만에 바뀌는 정부의 정책에 또 무너질 수는 없다.
김경택 경제부 차장 pty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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