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발 지진… “美합중국이 ‘美분열국’으로”
진보성향 주들은 낙태권 보장과 탄소배출·총기 규제 오히려 강화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 기후변화, 총기 규제, 성소수자 권리, 종교적 표현의 자유 등에 대해 보수적인 판결을 잇따라 내리면서 미국 사회의 분열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일(현지 시각)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자극을 받아, 미국이 레드-블루 축을 따라 갈라지고 있다. 낙태, 기후변화, 총기 등의 문제에 있어 진보와 보수 ‘두 개의 미국’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CNN도 같은 날 “연방대법원이 ‘레드 아메리카’와 ‘블루 아메리카’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줬다”고 보도했다.
공화당의 상징색이 빨강, 민주당의 상징색이 파랑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보수 성향의 주(州)를 ‘레드 스테이트’,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진보 성향의 주를 ‘블루 스테이트’라고 부른다. 그런데 보수 성향 대법관 6명,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으로 구성된 미 연방대법원이 최근 보수적 판결을 이어가면서 주정부의 성향에 따라 서로 완전히 다른 정책을 추진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뉴욕타임스는 “연방대법원 판결에 쫓겨 미국은 완전히 반대되는 사회, 환경, 보건 정책을 추진하는 분리된 나라들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미 합중국이 아닌) 미 분열국(the Disunited States)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낙태 문제다. 지난달 24일 연방대법원은 임신 6개월이 되기 전까지는 보편적 낙태권을 보장했던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49년 만에 폐기했다. 이후 앨라배마, 아칸소, 미주리, 사우스다코타주 등은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따른 예외조차 인정하지 않는 전면적 낙태 금지를 시행했다. 오클라호마, 텍사스, 웨스트버지니아, 아이다호, 미시시피, 노스다코타, 테네시, 와이오밍, 플로리다, 조지아 등 중부와 동남부의 레드 스테이트들도 낙태 금지·제한에 나섰다.
반면 블루 스테이트에서는 낙태권을 더욱 강력히 보장하거나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미 중부에서 드물게 블루 스테이트인 콜로라도와 일리노이는 주변 주에서 낙태 시술을 받으러 오는 여성들의 피난처가 되겠다고 천명했다.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뉴멕시코 등은 다른 주의 낙태금지법으로부터 낙태 시술자나 환자를 보호하는 법안이나 행정명령을 도입했다. 델라웨어, 뉴저지, 뉴욕, 워싱턴, 하와이 등의 주에서도 낙태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비슷한 현상은 기후변화 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30일 미 연방대법원은 화력발전소가 밀집한 웨스트버지니아주 등 공화당 주지사가 있는 18주 정부와 일부 석탄 회사들이 환경청(EPA)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레드 스테이트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석탄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 등의 탄소 배출을 EPA가 규제하는 것은 권한을 넘어서는 일로, 미국 의회나 의회에서 명확하게 권한을 부여받은 기관이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메인,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뉴저지, 로드아일랜드 등의 동부 주들은 ‘지역 온실가스 이니셔티브’를 통해 탄소 배출 저감 이슈에 연대(連帶)했다.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등 서부 해안의 블루 스테이트들도 ‘태평양 연안 협력체’를 만들어 청정 연료 기준과 무공해 자동차 도입 등에 협력하고 있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와이오밍, 웨스트버지니아 등 화석연료를 생산하는 주들이 더 많은 석탄, 원유, 천연가스의 탐사와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총기 규제에서도 연방대법원은 지난달 23일 사전 면허 없이 공공장소에서 총기를 휴대할 수 없도록 한 뉴욕주의 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 후 델라웨어, 로드아일랜드와 워싱턴DC 등은 일부 무기와 대용량 탄창 등을 금지해서 총기 규제를 오히려 강화했다. 반면 텍사스와 뉴햄프셔 등에서는 총기 규제를 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성 소수자 문제에서도 앨라배마 등의 레드 스테이트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전환 치료나 교육을 금지하려는 데 반해, 캘리포니아 등의 블루 스테이트는 관련 권리 보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는 “역사학자들은 비슷한 순간을 찾는 데 고전하고 있다”며 “노예제를 둘러싼 19세기의 분열이나 1930년대 뉴딜 정책 시대의 행정부와 대법원 간 충돌” 등이 그나마 유사한 사례라고 언급했다. 미 연방대법원 판결로 가속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분열은 오는 11월 중간 선거에서도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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