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해지기 어려워지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죠"
“살다 보니까 도덕을 얘기하긴 쉬워요. 그런데 남한테 강요하거나 자기가 내세우는 도덕보다 좀 더 겸손한 의미에서, 교훈을 뺀, 누가 뭐래도 자기만의 기준이 있고, 어떤 꼴을 당해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내 품위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박찬욱(59) 감독은 자신의 11번째 장편 연출작 ‘헤어질 결심’(6월 29일 개봉)을 “고전적이고 우아한 사랑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이 영화로 올해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그를 지난달 24일 화상 인터뷰했다. 그는 “정치적 메시지나 감독의 어떤 주장을 포함하지 않은 순수한 영화, 화려한 볼거리나 기교 없이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소를 간결하게 구사해 깊은 감흥을 끌어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도 했다.
정치적 주제가 두드러진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중 ‘헤어질 결심’은 영화란 매체의 아름다움을 되새기게 한 영화로 주목받았다. 주인공은 남편 살해 혐의를 받는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와 담당형사 해준(박해일). 요양보호사인 서래는 “죽은 남편이 산 노인 돌보는 일을 방해할 순 없다”며 남편 사망 다음 날에도 출근한다. 해준은 그런 서래에게 공감하고, 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싹튼다.
팜므파탈의 미인계 공식이 이 영화에선 일에도 삶에도 성실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으로 변주된다. 잠복수사와 취조가 연애 장면 같다. 진짜 속마음은 안개 속에 잠긴 듯하다. “나이 든다는 건 솔직해지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라는 박 감독은 저마다 “진심을 감추는 장면이 많은” 이 영화를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고 했다.
박 감독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가요인 정훈희의 ‘안개’(1967)에서 영화를 착안했다. “‘안개’를 송창식씨가 커버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이 곡이 정훈희와 송창식 목소리로 한 번씩 나오는 로맨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스웨덴 추리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예의 바른 형사 캐릭터가 겹쳐졌다.
Q : 제목(‘헤어질 결심’)은 어떻게 지었나.
A : “‘아가씨’(2016)도 그렇고, 정서경 작가와의 대화에서 제목이 떠오를 때가 많다. 보통 ‘결심’은 성공하는 일이 드물다. 끝내 헤어지지 못하거나 굉장히 고통스럽게 헤어질 거란 생각이 연상되고, 연상작용은 관객의 능동적 참여를 뜻하는 거니까 바람직한 제목이라 봤다.”
Q : 탕웨이·박해일 호흡의 밀도가 높더라.
A : “좋은 연기란 상호작용이다. 서로 기대고 의지해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두 사람은 천성이 워낙 사려 깊고 자상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라서 잘 맞는 것 같다.”(웃음)
Q : 중국인 서래가 사극 드라마로 배운 문어체적 한국말 대사가 독특한데.
A : “스마트기기를 한껏 활용하면서도 말투나 장소, 공간은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대비시키려 했다. 처음엔 웃음이 나올 수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요즘 내가 쓰는 말보다 더 정확하고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효과를 만들고 싶었다.”
Q : 닿을 듯 말 듯 한 행동, 눈빛만으로 성적 긴장감을 준다는 반응이 많다.
A : “에로틱한 느낌을 배우에게 주문하진 않았다. 관객이 그렇게 느끼는 건 결국 이런 감정이 얼마나 정신적인 것인가, 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은 부산과 안개 자욱한 가상도시 이포가 배경이다. 산에서 시작해 바다로 나아간다. 맞춤한 로케이션을 찾는 게 중요했다. “현대적인, 사실적인 배경을 갖는 동시에 이 영화가 특정 시기나 지역에 너무 국한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박 감독은 “10년, 20년 후 다른 나라에서 봐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지니고 싶었다. 보편성이랄까”라고 했다.
Q : 박찬욱 영화의 여성 캐릭터가 매력적인 비결은.
A : “캐릭터를 만들 때 ‘남성이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한다’라거나 ‘여성이 이렇게 행동해도 되나’ 식의 생각을 해본 적 없다. 한 명 한 명 개인일 뿐이다. 독특한 것은 사실 여러 성격의 조합에서 나온다. 우리가 다양한 측면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Q : 해준의 후배 형사 역에 코미디언 김신영을 캐스팅했다. 새 얼굴 발굴 노하우라면.
A : “그런 건 없다. 운이다. 김신영씨는 좀 특별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팬이었기 때문에, 늘 마음속에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지난달 29일 개봉한 ‘헤어질 결심’은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며 나흘간 누적 39만 관객을 모았다. 액션 블록버스터 ‘탑건: 매버릭’의 흥행세에 다소 밀렸다. 박 감독은 “전문가 리뷰가 좋은 것은 직업적으로 뿌듯한 일”이라면서도 필모그래피를 더할수록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관객”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굳이 극장에 와서 시간을 내 영화를 보는 그 관객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죠.” 백발이 성성해진 거장의 고백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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