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아내의 부추전이 반갑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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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기자]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됐다. 온 종일 습하고 하늘이 어둡다. 비가 내리면 마음은 싱숭생숭해진다. 몸 컨디션이 무겁고 입맛도 간사해진다. 괜스레 음식 투정하는 것도 날씨 탓이다. 이맘때 기름 두른 '부침개'가 스멀스멀 유혹한다.
어릴 적 비오는 날이면 동네 골목마다 전 부치는 냄새가 진동했다. 철없는 애들도 이날만큼은 '밀가루 부침개'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우리집도 뒤질세라 밀가루 반죽으로 부침개를 만들었다. 식구들이 모여 부침개를 찢어 먹던 추억이 아직도 삼삼하다.
▲ 아내가 만든 부추전 |
ⓒ 이혁진 |
며칠 전 휴일 꿀꿀한 분위기를 파악한 집사람이 점심을 앞두고 말을 건넨다.
"오늘 부추전 어때요?"
"...."
"부추가 싱싱하니 드셔봐요"
"...."
내가 심드렁한데도 집사람은 어느새 밥상에 부추전을 내왔다. 향과 함께 파릇하게 구운 '부추전'이 먹음직스럽다. 한입에 달아난 입맛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게걸스럽게 먹고 나서야 집사람에게 미처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사실 집사람이 부추전을 해준다고 할 때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숨어있다. 한참 어려울 때 집사람이 부침개로 나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근 20년 전 내가 신병으로 투병하며 병원을 전전할 때 집사람은 호구지책으로 한동안 식당을 차린 적이 있다. 순전히 밥집 가게였는데 단골 손님 중에 비가 오면 빈대떡을 주문해 집사람이 이때 익힌 솜씨가 부침개였다.
▲ 아내가 부친 파전 |
ⓒ 이혁진 |
그러나 내게 부침개는 '트라우마 음식'으로 기억된다. 허구한 날 프라이팬을 앞뒤로 뒤집느라 집사람은 손목 관절에 이상이 생겼다. 뜨거운 기름에 덴 상처들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팔과 목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특히 손목관절은 병따개마저 스스로 따지 못할 정도로 손상되고 말았다. 부침개 솜씨를 익혔지만 평생 지고 갈 병도 얻은 것이다. 부침개가 아무리 먹고 싶어도 내가 집사람한테 얘기할 수 없는 이유다.
지금도 전집을 지날 때마다 퍼뜩 떠오른 것이 집사람 손목 관절이다. 나 때문에 얻은 병이라 생각하면 부침개는 고사하고 죄인이 된 기분이다. 집사람이 그런 상황에도 부추전을 부치겠다고 말한 것은 장마철 부침개 추억이 한몫 했을 터.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글썽거렸다.
부침개 속 상처와 눈물
▲ 아내가 만든 경상도 배추전 |
ⓒ 이혁진 |
간단한 재료로도 부침개가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한 것이 배추전이다. 배추전은 그럴듯한 재료가 없을 때 손쉽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만드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배추 물기를 적당히 날리고 바싹 구워내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이 배추전이야말로 요즘 장마철에 딱 어울린다.
난 집사람이 만든 부침개만 먹는다. 밖에서 만든 전은 전혀 먹지 못한다. 유명하다는 전집의 부침개는 대개 기름 범벅이다. 이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속이 거북해 질색이다.
집사람 부침개 노하우는 기름을 적당히 두르고 천천히 구워내는 것이다. 대신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시간이 맛이고 정성인 셈이다.
장마철에 집사람이 내 입맛을 살리려고 부추전을 소환했지만 솔직히 내 스스로 또 해달라고 조를 자신은 없다. 고소한 부침개 속에는 상처와 눈물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멋쩍게 답했다.
"여보, 부추전 잘 먹었어. 역시 맛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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