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독립50대] 시어머니에게 오이지를 부탁한 남편, 왜 그랬을까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편집자말>
[장순심 기자]
6월은 매실의 계절이다. 제철인 6월에 채취한 매실은 가장 영양이 많다고 한다. 매실은 청이나 장아찌, 술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 인기가 많은 식재료다. 좋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아직 한 번도 내 손으로 담가 본 적은 없다. 잘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 자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매실액을 많이 쓰지 않지만, 청과시장 가게마다 푸르고 탐스러운 매실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 담가 먹을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사고 싶고 내친김에 담가 볼까 하는 마음도 든다. 우리 집은 장이 예민한 딸만 가끔 매실청을 찾고 조금씩 요리에도 사용하지만 일 년에 한 병이면 충분하다. 담그겠다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사정이 그러니 매실의 풍성함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편이다. 게다가 내가 하지 않아도 어머니께서는 매년 매실철이면 전화로 매실청이 필요하냐고 물어오신다. 올해도 거절하기도 어려워 아직 남았다는 말로 의사를 전했지만, 얼마 후 매실이 도착할 거라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던 중이었다.
▲ 어머니의 오이지 애매한 거절로 통화가 끝난 며칠 뒤에는 영락없이 오이지가 도착한다. |
ⓒ 장순심 |
며칠 전, 남편이 "어머니에게 오이 사서 오이지 담가 달라고 말씀드렸어" 했다. 묵은 오이지를 버린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새삼 오이지를 담가 달라고 했다니 일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따라오는 남편의 말이 사뭇 진지했다. 어머니께서 앞으로 얼마나 그런 것을 담가 주시겠냐며, 일거리 삼아 부탁을 드렸다고 했다.
곧 도착할 그 많은 오이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미리 걱정부터 하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남편의 설명이 이어졌다. 언젠가 우리도 담가서 아이들에게 보낼지도 모르니 이참에 만드는 법을 익혀두는 것도 좋지 않냐고. 또 지인이 부탁한 것도 있어서 나누면 된다고 덧붙였다. 올해는 어머니의 오이지를 끝까지 제대로 먹어보자고 새삼스러운 다짐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오이는 물론 매실까지 사서 어머니께 가져갔다. 매실은 해를 넘겨도 버려질 염려는 없으니 두고두고 천천히 먹으면 된다. 묵을수록 더 깊은 맛을 내는 것이 매실의 매력이기도 하니까.
그동안 조금씩 쌓인 매실을 얼마 전 친지들에게 나누었더니 맛이 특별히 좋다며 반겨서 내심 뿌듯했다. 매실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담가 먹어도 늘 부족하다며 챙겼다. 나는 처분해서 좋고 그들은 받아서 좋은 나눔이 될 수 있었다.
올해 어머니 연세는 87세다. 손도 크시고 베푸는 것도 좋아하시고 솜씨도 있으셔서 아는 사람들은 뭐든 하면 욕심을 내며 서로 가져가려고 한다. 감식초도, 양파즙이나 은행나무 술이나 더덕술도 담그면 다른 이들이 모두 가져갈까 봐 우리 것은 따로 챙겼다가 보내주실 정도다.
자식들을 위해서 담그시지만 다른 이들이 먼저 보고 조르면 주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은근히 서운해 하시는 눈치셨다.
뜻하지 않게 오이지가 많이 들어와 한동안 아삭하고 짭조름한 오이지무침으로 밑반찬을 대신했다. 그렇게 먹다 보니 받은 오이지를 모두 먹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먹으면 이렇게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확인했던 것 같다. 김장하듯 오이지를 많이 담그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것 같고.
오이지가 모두 짭짤하고 같은 맛이라고 생각하지만 오이지를 담그는 레시피도 집집마다 모두 조금씩 달랐다. 친정 언니는 소금물을 팔팔 끓여 생오이에 바로 붓는다고 했고, 거기에 매실도 넣고 소주도 넣는다고 했다. 그래야 겉은 잘 삭고 속은 탱글탱글하며 골마지(간장, 된장, 술, 초, 김치 따위 물기 많은 음식물 겉면에 생기는 곰팡이 같은 물질)가 끼지 않는 아삭한 오이지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 청과물 시장에 널린 매실 청과시장에 가서 가게마다 푸르고 탐스러운 매실 열매가 좌판 가득한 것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 |
ⓒ 픽사베이 |
어머니께 매실과 오이지를 부탁드리며 우리는 청과물 시장에도 여러 번 갔고 어머니에게는 더 자주 다녀왔다.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사실상 거의 처음이라 어머니는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재료를 사기 위해 들어가는 것들의 양을 물으며 주재료와 부재료의 양을 가늠하기도 했고, 그렇게 통화를 하며 어머니와 일상적 대화가 많아지기도 했다.
늙은 아들의 어리광일지라도
오이지든 매실액이든 담그고 싶으면 나중에라도 인터넷에 무수히 떠도는 레시피를 따라 하면 된다고 평소 생각했지만, 남편은 어머니의 레시피가 중요하다고 했다. 어머니의 것이 좋다며 다른 레시피는 어머니의 맛이 아니라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어머니의 음식을 맛볼 수 있겠냐고도 했다. 사는 동안 자식을 위해 줄 수 있는 것을 마음껏 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자식에게는 효도가 될 수 있다나. 때문에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어머니께 또 부탁드릴 거라고. 또 어머님이 담가주신 것을 반기며 잘 먹는 것도 자식의 도리고 효도가 될 수도 있다니 묘하게 설득도 됐다.
남편의 말은 궤변이지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요즘 어머니에게 일거리를 드리며 통화도 더 자주 하고 더 자주 어머니께 들른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고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먼 후일, 어머니의 레시피를 흉내내고 어머니의 손맛을 얘기하며 지난 시간의 이야기들을 떠올릴지도 모르니 남편의 말은 맞을 것이다.
남편도 나도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이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다르게 헤아려 보는 것 같다. 이전이었다면 어머니를 핑계로 귀찮아서라도 하지 않았을 일들을 지금은 일부러 부탁드리고, 시장에 가고, 매실과 오이를 들고 나르고, 가져가고 다시 가져오는 것을 즐긴다. 이러한 일이 뒤늦게 철든 자식이 어머니께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어리광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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