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일본 언론, 어떻게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나 [일본史람]
[박광홍 기자]
1907년 7월, 한국통감부가 기안하고 이완용 내각이 추인한 '신문지법'이 공포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신문 발행은 허가를 필요로 하게 됐고, 당국에 의해 '문제적 언론사'로 지목될 경우 발행 정지를 비롯한 법적 제재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을사조약 이래 대한제국의 전권을 사실상 장악했던 제국 일본의 한국통감부는, 국가와 제도를 넘어 민간의 언로까지 통제함으로써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 군용기에 타고서 자료화면을 촬영하는 뉴스 카메라맨 전선에서 촬영된 뉴스 영상은 일본 대중의 전의를 고취시키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
ⓒ 일본 뉴스 영화사 |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면, 당시 언론은 그저 국가폭력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만 했던 존재로만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언론인의 책임이란, 언론인들이 시대에 남긴 족적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평가되는 게 아니다. 당시 언론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폭력의 시대에 편승했던, 폭력의 시대를 조장했던 국가폭력의 수족 중 하나였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사들이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군으로의 지원을 장려했던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은 일본 사회에 있어 이른바 '15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세계최종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주를 확보해야 한다고 믿었던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중좌를 주축으로 한 과격파 장교들은 본국 내각의 승인없이 독단적으로 군사행동을 벌였다. 일본이 1945년 패전에 이르는 길고 긴 전란의 수렁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관련 기사: 한국 역사의 그림자... 겉과 속 달랐던 '만주국군'의 비극).
▲ 각 전쟁 개전을 기점으로 상승하는 신문발행 부수 전쟁은 언론사들에게 있어 기회였다. 그래프에서는 만주사변, 일중전쟁, 일미개전을 계기로 신문 발행부수가 비약적으로 급증하던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언론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편승하고 대중을 선동했다(출처: NHK스페셜 '일본인은 왜 전쟁으로 향했나') |
ⓒ NHK스페셜 |
뜻밖의 호황을 맞이한 언론사들은 신문 판매실적을 올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만주에서의 승전보를 취재해 보도했다. 세계경제대공황의 휴유증을 앓으며 따분한 일상을 살아가던 대중들은 언론에서 뿌려대는 애국주의적 구호에 열광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만주사변은 결코 원한 적이 없었던 불의의 사태였다. 내각은 전선이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고 군사충돌을 빠르게 수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독단적인 진격은 계속되었다. 고공행진하는 판매량에 취해있던 언론사들 역시 이 시점에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본국 정부를 무시하고 사실상 불법으로 군사행동을 계속하는 관동군을 지지할 것인가, 비판할 것인가.
다수의 언론사들은 모처럼 찾아온 '대박'의 기회를 걷어찰 생각이 없었다. 대중이 원하는 언론사 논조는 분명해 보였다.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었던 이들은 만주와 몽골을 병탄하려는 관동군의 독단을 구국의 위업으로 예찬했다. '만몽(만주와 몽골)은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자극적 표제의 호외가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1920년대에 도래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물결 속에서 군부 견제를 위해 목소리를 냈던 그들이, 이제는 오히려 군부 과격파들을 칭송하는 아이러니가 도래했다.
심지어는 중국 측의 도발이 아닌 관동군의 자작극으로 만주사변이 발발하게 됐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음에도 당시 언론사들은 끝내 사과나 정정보도를 내지 않았다.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그들은 진실 앞에 침묵했다. 일부 언론사들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미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대중들에게 비판적 보도는 매국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모처럼 용기를 냈던 이들은 사회적 압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숙여야 했다. 언론 스스로가 조성한 사회 분위기가 되려 언론을 침묵시키게 된, 웃지 못할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언론이 만들어낸, 언론도 어찌하지 못하게 된 대중의 열광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파멸적 결말로 끌고 들어갔다.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을 일본의 침략행위로 규정했고 세계 각국은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외교관들은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각 열강들과 타협하여 만주 문제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의 합리적인 목소리는 일본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언론사는 국제연맹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자극했고, 대중은 분노했다. 분노한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언론사는 다시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끔찍한 악순환이었다. 사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외무성은 결국 국제연맹 탈퇴를 발표해야만 했다. 국제연맹 탈퇴 소식에 언론과 여론은 쌍수를 드는 사이, 일본이 망국의 길로 성큼 들어서고 있다는 위기감은 손쉽게 가려져버렸다.
▲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고노에 총리 일본방송협회 총재였던 고노에 총리(가운데)는 미디어를 이용해 일본의 정국을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를 위해 그는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을 참고하였다고 전해진다. |
ⓒ 아사히구라후 |
한때 개혁 정치가로 기대를 모았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는 언론과 여론의 관계를 예리하게 짚어냈다. 일본방송협회의 총재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총리로 집권하고 국가의 전권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고노에 총리와 휘하 방송인들은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 사례를 연구하여 이를 일본 정치에 녹여냈다. 일본과 중국간에 전면전이 벌어지자 고노에 총리는 히틀러나 괴벨스가 그러했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곁들여 대국민 연설을 벌이며 이를 라디오로 송출했다. 마침 라디오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고노에 총리의 연출은 크게 성공했다. 난폭한 지나(중국에 대한 멸칭)를 응징해야 한다는 전쟁의 당위성은 시대정신처럼 자리잡았다.
만주사변 때 흥행을 맛보았던 언론사들은 중일전쟁으로 마련된 기회에도 적극적으로 편승했다. 일본군이 난징에서 벌인 '비전투원 살상 행위'가 영미권 언론에 보도되며 뭇 사람들의 공분을 샀지만, 일본 내에서는 '영웅적 황군'이 중국의 수도에 일장기를 휘날리게 됐다는 프로파간다 기사만이 보도됐다. 특파원들이 중국전선에 나가 일본군의 승전을 중계보도하는 뉴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유흥거리가 됐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린 것은 특별고등경찰이나 헌병대와 같은 국가폭력 뿐만이 아니었다. 언론보도는 일본 대중을 그들만의 세계에 가두었다. 울타리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된 대중은, 중일전쟁의 종결을 요구하며 일본을 규탄하는 세계 각국의 움직임을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반미 반영 분위기가 고조됐다. 대중의 입맛에 맞춰 언론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미디어를 이용해 정국을 휘어잡고자 했던 고노에 총리조차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들끓기 시작한 여론의 추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이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위해 특사를 보내오자 고노에 총리는 답답함을 드러냈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중일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던 육군 측은 독일과의 밀착에 반색했다. 그러나, 이는 만주사변 이래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왔던 외교관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 "사이 좋은 삼국"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우호를 선전하는 엽서. 왼쪽 상단부터 히틀러, 고노에, 무솔리니의 사진이 실려있다. |
ⓒ wiki commons |
일본의 히틀러를 꿈꾸었던 고노에 총리는 무력했다. 폭발하는 반미 반영 여론을 거스른다는 것은, 대중선동을 통해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했던 고노에 총리 스스로의 정치적 생명을 꺾는 행위와도 같았다. 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망설이던 고노에 총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언론은 독일군의 파리 함락 소식을 전하며 친독 분위기를 한껏 부풀렸다. 1940년 9월 27일, 일본-독일-이탈리아 3개국의 군사동맹이 발효됐고 대중은 만족했다.
비록 중국 문제로 갈등이 있기는 했으나, 영일동맹 이래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맺어왔던 영국은 일본의 이런 선택에 경악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을 어르고 달래며 타협안을 제시해왔던 영국은, 이 삼국동맹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미국 역시, 일본의 위험성을 확인하고 보다 더 강경한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1941년 초.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일본 대중의 6할은 '아직 미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여론조사에 응답했다. 이때가 어쩌면 파멸을 피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창 시동이 걸려있던 반미 반영 보도에는 끝내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전쟁을 원치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는 거리를 가득 채운 시끄러운 선동문구들에 묻혀버렸다. 미국과의 전쟁을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한 고노에 총리는 육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임했다.
그 뒤를 이어 총리대신에 오른 것은 육군의 영수였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대장이었다. 그는 대미강경론을 주장하면서도 내심 전쟁을 피할 돌파구를 원했지만, 이미 정세는 기울어진 상태였다. 미국의 양보가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피하려 든다면, 그 자신이 꼼짝없이 매국노로 지탄받고 끌어내려질 판이었다. 그는 결국 쉬운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관련 기사: 일본이 풀어야 할 괴로운 '근본 질문').
1941년 12월 8일, 대본영(大本營: 태평양 전쟁 때, 일본 천황의 직속으로 군대를 통솔하던 최고 통수부)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전쟁 개시를 국민들에게 발표했다. 미 태평양 함대와 영국 동양함대의 궤멸 소식에 언론과 여론은 환호했다. 그렇게 제국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