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으로 가는 원웨이 티켓, 백제 금동신발
[임영열 기자]
▲ 2021년 4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금동신발 중 유일하게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
ⓒ 문화재청 |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표현하는 말로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옛 고승의 선시(禪詩)처럼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도 일생 동안 모아 놓은 모든 것들을 버리고 빈 손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렇기에 망자들이 세상과 작별할 때 마지막으로 입는 옷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우리에게 죽음 이후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래서일까.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은 '죽음' 그 너머의 세계를 화두로 삼고 있다. 태생적 결핍과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누구라도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은 채 유순하게 죽음의 강을 건넌다.
▲ 2009년 9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전라북도 고창 봉덕리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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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후반부터 한반도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그 수량이 늘어나며 절정에 이른다. 특히 절대 권력을 가졌던 왕들의 무덤에서는 일상생활용품은 물론이며 금·은·동으로 장식된 무기·관모·장신구 등 호화로운 부장품들이 대거 발견됐다.
5세기 최고의 명품 구두, 고창 봉덕리 금동신발
▲ 고창 봉덕리 금동신발 발견 당시 모습. 금동신발은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고유의 금속공예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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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고창 봉덕리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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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은 약 50여 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문화적 전성기를 누렸던 백제시대 만들어진 두 쌍의 신발이 2021년 4월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백제·마한지역에서는 19 쌍의 금동신발이 출토됐다. 대부분 훼손된 채로 발견되었으나 두 점은 거의 원형 상태로 수습돼 백제 고유의 문양과 공예문화의 독창성을 밝힐 수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2009년 9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전라북도 고창 봉덕리 고분을 조사하던 중 5세기 중반에 조성된 석실묘에서 무덤 주인공의 양쪽 발에 신겨진 신발 한 켤레가 거의 원형 상태로 출토됐다. 신발 내부에서는 직물조각과 함께 피장자의 뼈가 확인됐다.
▲ 1971년 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비의 금동신발. 발바닥에 스파이크가 박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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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발굴됐던 무령왕과 왕비의 신발처럼 바닥판과 좌우측판·발목깃판으로 구성되었고 바닥에는 1.7㎝ 높이의 스파이크 18개가 박혀 있다. 내부는 비단 재질의 직물을 발라 마감했다.
▲ 2014년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 인근의 정촌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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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가 장식된 나주 정촌 고분 금동신발
2014년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 인근의 정촌 고분에서도 금동신발 한 쌍이 출토됐다. 복암리 고분군은 영산강 유역 백제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고분군으로 정촌 고분은 1500여 년 전 만들어진 백제 마한 지역의 무덤이다. 땅 위에 봉토를 만들어 무덤을 축조한 '분구묘(墳丘墓)' 형태로 조성됐다.
▲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백미는 발등에 장식된 용머리 장식이다. 용은 사후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승천(昇天)’의 상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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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발견 당시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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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의 좌우 옆면의 육각문에는 용·봉황 등 상상 속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몸 하나에 얼굴이 두 개인 '일신양두(一身兩頭)'와 새의 몸통에 사람의 얼굴이 달린 '인면조신(人面鳥神)'의 문양이 있고 발바닥에는 연꽃 문양이 있다.
몸체 곳곳에 새겨진 용은 머리에 뿔이 있고 귀는 타원형이며 입은 벌리거나 다물고 있다. 용은 사후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승천(昇天)'의 상징이다. 영원불멸을 기원하는 고대인들의 사후 세계관이 반영됐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에 새겨진 '일신양두'와 '인면조신'문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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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근거로 볼 때 6세기 전후 시점에 영산강 유역 사회는 여성의 지위가 지역 수장급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다부진 체격으로 영산강 유역을 호령하던 이 여인은 백제인일까. 마한인일까.
서기 550년까지 나주 영산강 유역 일대는 마한인들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후 약 100여 년간 백제에 복속되었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에 병합되었다. 국립나주박물관 측은 이 여인을 마한인으로 보고 있다.
▲ 무덤 주인공의 두개골을 분석한 결과 이 금동 신발의 주인공은 키 146cm 정도의 체격을 가진 40대 여성으로 밝혀졌다. 이를 근거로 재현한 여성 수장의 모습 |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라 금관이 실제 왕들이 평소 머리에 썼던 실용품이라기보다는 죽은 왕의 얼굴을 가리는 '데드 마스크(Dead mask)'였듯이, 백제 금동신발 역시 영생의 소망을 담아 죽은 자의 발에 신겼던 장례용품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1500년 동안 깜깜한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금동신발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승을 떠나는 망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 저승으로 가는 '원웨이 티켓(One–way ticket)'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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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131호(2022년 7.8월)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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