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은 좀 특별했다" 박찬욱 감독이 밝힌 캐스팅 이유
“살다 보니까 도덕을 얘기하긴 쉬워요. 그런데 남한테 강요하거나 자기가 내세우는 도덕보다 좀 더 겸손한 의미에서, 교훈을 뺀, 누가 뭐래도 자기만의 기준이 있고 어떤 꼴을 당해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내 품위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박찬욱(59) 감독은 ‘헤어질 결심’(6월 29일 개봉)을 “고전적이고 우아한 사랑 이야기”라 소개했다. 이 영화로 올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그를 지난달 24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박찬욱 "정치적 메시지 없는 순수한 영화 원해"
‘헤어질 결심’은 박 감독의 11번째 장편 연출작. 18년 전 ‘올드보이’로 칸에서 첫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후 ‘박찬욱 영화’의 인장처럼 여겨온 파격적인 섹스, 수위 높은 폭력 장면을 걷어냈다. “정치적 메시지나 감독의 어떤 주장을 포함하지 않은 순수한 영화, 화려한 볼거리나 기교 없이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소를 간결하게 구사해 깊은 감흥을 끌어내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면서다.
사회적 계급, 빈부격차, 난민, 아동학대, 불법 입양 등 정치적 주제가 두드러진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중 ‘헤어질 결심’은 새삼 ‘영화’란 매체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되새기게 한 영화로 주목받았다. 주인공은 남편 살해 혐의를 받는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와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 꼿꼿한 성미의 요양보호사인 서래는 “죽은 남편이 산 노인 돌보는 일을 방해할 순 없다”며 남편 사망 다음 날도 출근한다. 예의 바르고 직업의식 투철한 해준은 그런 서래에게 공감을 느낀다.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이 싹튼다.
Q : -‘헤어질 결심’이란 제목은 어떻게 지었나.
“‘아가씨’(2016)도 그렇고 정서경 작가와 대화에서 제목이 떠오를 때가 많다. 보통 ‘결심’이란 건 성공하는 일이 드물다. 살 뺄 결심도 잘 안 되고.(웃음) 끝내 헤어지지 못하거나 굉장히 고통스럽게 헤어질 거란 생각이 연상되고, 연상작용은 관객의 능동적 참여를 뜻하는 거니까 바람직한 제목이라 봤다. 더불어 얼마나 이 사랑이 힘들었으면 이런 결심까지 필요한 것일까 생각이 들 것 같았다.”
Q : -탕웨이, 박해일의 호흡 밀도가 높더라.
“좋은 연기란 상호작용이다. 서로 기대고 의지해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두 사람은 천성이 워낙 사려 깊고 자상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라서 잘 맞는 것 같다.”(웃음)
Q : -아이디어만 있던 상태에서 두 배우를 주연에 점 찍고 시나리오를 써나갔다고.
“근본적으로 다르진 않았다. 그전의 영화들은 항상 시나리오를 완성한 다음에 배우를 찾아갔지만 결국 캐스팅이 되고 나면 배우에 어울리게 각본을 또 고치게 됐다. 송강호면 송강호, 김옥빈이면 김옥빈을 알아가고 대화하고 토론하며 떠오르는 아이디어, 그분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각본에 끌어들인다. 배우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가면서 현장에서도 그것을 예민하게 관찰하며 반영하기 때문에 ‘헤어질 결심’처럼 캐스팅을 하고 나서 각본을 완성하는 거나 똑같았다.”
Q : -중국인인 서래가 사극 드라마로 배운 문어체적 한국말 대사가 독특한데.
“스마트폰‧스마트기기를 한껏 활용하면서도 말투나 장소‧공간은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대비시키려 했다. 처음엔 좀 웃음이 나올 수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요즘 내가 쓰는 말보다 더 정확하고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드는. ‘마침내’라는 흔한 단어도 생각해볼수록 운명적인 올 것이 온 것 같은 거창한 생각으로 가지를 뻗쳐나가는 그런 효과를 좀 만들어보고 싶었다.”
Q : -닿을 듯 말 듯 한 행동, 눈빛만으로 성적인 긴장감을 준다는 반응이 많다.
“에로틱한 느낌을 배우에게 주문하진 않았다. 관객이 그렇게 느끼는 건 결국 이런 감정이 얼마나 정신적인 것인가, 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Q : -영국 감독 데이비드 린, 히치콕 영화가 연상된다는 평도 있는데.
“린 감독의 ‘밀회’(1946)는 함께 ‘헤어질 결심’ 각본을 쓴 정서경 작가에게 참고하라고 제가 권한 단 한 편의 영화였다. 내용은 아무 상관 없지만 성숙한 남녀의 인내하는 사랑 이야기란 점에서 연결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히치콕 영화는 젊을 때 좋아했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각하진 않았다.”
엔딩신 동·서해 따로 찍어 한 공간처럼 합쳤죠
일제강점기 배경의 전작 ‘아가씨’가 귀족 집안의 대저택 세트를 주 무대로 했다면 ‘헤어질 결심’은 현대 도시 부산과 안개 자욱한 가상 도시 이포가 중심이다. 산에서 시작해 바다로 나아간다. 맞춤한 로케이션을 찾는 게 중요했다. “현대적인, 사실적인 배경을 갖는 동시에 이 영화가 특정 시기나 지역에 너무 국한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박 감독은 “10년, 20년 후 다른 나라에서 봐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지니고 싶었다. 보편성이랄까, 나중에 봐도 (관객이) 견딜 수 있는 영화가 하고 싶었다”고 했다.
특히 탕웨이가 연기한 서래는 이런 장소 변화와 호흡하며 시시각각 다른 눈빛과 감성 연기를 보여준다.
Q : -박찬욱 영화의 여성 캐릭터가 매력적인 비결은.
“캐릭터를 만들 때 ‘남성이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한다’거나 ‘여성이 이렇게 행동해도 되나?’ 이런 식의 생각을 해본 적 없다. 한 명 한 명 개인일 뿐이다. 독특한 것은 사실 여러 성격의 조합에서 나온다. 우리가 다양한 측면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럴 것이란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도 있어야 캐릭터가 생명력‧개성을 갖는다. 그게 지나치면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보일 테니까 적당한 선을 지켜가는 것이 필요하다.”
Q : -해준의 후배 형사 역에 코미디언 김신영을 캐스팅했다. 새 얼굴을 발굴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그런 건 없다. 다 운이다. 김신영씨는 좀 특별했다.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팬이었기 때문에, 정서경 작가와 제가 ‘색, 계’(2007)를 볼 때부터 탕웨이씨 팬이고 캐스팅하고 싶다고 늘 얘기한 것처럼 김신영씨도 늘 마음속에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지난달 29일 개봉한 ‘헤어질 결심’은 나흘간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며 누적 39만 관객을 모았다. 액션 블록버스터 ‘탑건: 매버릭’의 흥행 기세엔 다소 밀렸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내용이 어렵다”는 반응도 있지만, 호평이 우세한 편. 연출과 연기 칭찬과 함께 “여운이 길다”는 이가 많다.
박 감독에겐 가장 반가울 만한 반응이다. 그는 “전문가들의 리뷰가 좋은 것은 직업적으로 뿌듯한 일”이라면서도 필모그래피를 더할수록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관객”이라 거듭 강조해왔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극장에 와서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는 그 관객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 만족스러워하느냐가 뭐니뭐니해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죠.” 어느덧 백발이 성성해진 거장의 지극한 고백이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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