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기업은 왜 직원들의 '낙태'를 지원해주나[찐비트]
[아시아경제 정현진 기자] 미국 기업들이 잇따라 직원들의 낙태를 지원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이른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하자 기업들이 직접 움직인 건데요. 1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넷플릭스, 테슬라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낙태를 포함한 중요한 의료 서비스와 관련해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고요. 나이키, 스타벅스, JP모건, 골드만삭스, BP, 셸까지 글로벌 기업들이 업종 구분없이 잇따라 미국 직원들의 '원정 낙태'를 지원하겠다고 했어요. 낙태를 하러 다른 주로 갈 경우 이 비용을 환급해주는 것이 대표적인 지원 대상 중 하나에요.
작년부터 이어진 논쟁…"고용주 혜택이 비용 감당할 유일한 방법"사실 국내에서 기업들이 원정 낙태 자금을 지원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미국 기업의 이러한 지원 움직임은 지난해부터 시작됐습니다. 당초 미국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임신 24주까지 임신 중단이 허용됐는데요. 여성의 자아결정권을 이유로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것이었죠. 하지만 지난해 텍사스주에서 임신 6주 후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사실상 낙태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에 이 지역에 있던 기업들이 법 시행에 반대해 다른 주에서 낙태를 하고자 하는 직원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먼저 나섰어요.
미국에서는 주로 고용주를 통해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번에 기업들이 잇따라 발표한 낙태 비용 지원도 직장 의료보험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이러한 기업의 지원 여부가 낙태 비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죠. CNN은 "낙태를 하고자 하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조만간 이 시술에 접근하기 위해 주(州)를 이동해야할 수 있고 이미 비싼 의료 서비스 비용에 비용을 추가할 수 있다"면서 "많은 고용주들의 혜택 패키지는 이들이 낙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기업 행동주의 요구 거세…올해 ESG 주주제안도 쏟아져미국 기업들이 이처럼 나서는 이유는 바로 기업 행동주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최근 수년간 기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이러한 사회 이슈를 놓고 기업의 입장을 공개하길 바라는 소비자·직원 등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데요.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나 올해 플로리다주의 동성애 규제 정책 등에 대해서도 기업들이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는 압박들이 쏟아졌었죠. 실제 이번 판결 폐기 이후 아마존에서는 직원들이 경영진에 "낙태를 금지하는 주에서 영업을 중단하라"고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모리스 슈바이처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 교수는 지난달 24일 CNBC방송에 "모든 주요 기관은 의료보험을 갖고 있다. 문제는 어디까지 커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원정 낙태를 위한 부분까지 포함할 것인가"라면서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기업 수장들에게 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평가했어요. 그는 기업 리더들이 침묵을 지키는 게 어렵게 됐다면서 이러한 결정이 기업으로 하여금 소송을 당하게 하거나 소비자 또는 직원들의 반발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주의 강화 분위기는 올해 미국 기업들의 연례 주주총회에 제시된 주주제안에서도 확인 가능한데요. 미 악시오스가 지난달 컨설팅 회사인 조지슨의 데이터를 받아 하버드가 분석한 데이터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올해 러셀3000 지수 내에 있는 회사의 연례 주주총회에 제안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주주제안 수는 924개로 사상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어요. 2020년 754개, 2021년 837개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이죠. 옥스팜의 코로나19 백신 접근권 확대나 아마존의 인종평등 정책 감사, 맥도날드의 돼지 사육 환경 개선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4월 기업이 단순히 수익을 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주주제안이 갈수록 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주주들의 찬성률도 올라간다고 전했어요.
여기에 인재 확보전이 치열하다는 미국의 노동시장 상황도 맞물려 있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관심 있는 인재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업이 이를 지지하는 입장을 내놓고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이죠. 미국 인적자원관리협회(SHRM)은 고용주들이 낙태와 관련한 지원을 두고 "인재 확보를 위한 지원책의 일종"이라고 해석했는데요. 산드라 수처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경영대 교수는 지난달 28일 미 정치매체 더힐에 "고용주들이 스스로 물어보고 있다. 내가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일부 직원들이 떠날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입장을 표명하게 됐을 때) 이와 관련한 소송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법적 문제와 인재 유치 사이에서 고용주들이 고민하게 된다는 겁니다.
기업엔 소송·정치권 충돌 등 리스크도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와 관련한 논란은 당분간 미국 사회에서 지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실 기업들은 이번 입장을 내면서도 정치적인 논쟁이나 소송이 걸릴 리스크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낙태라는 명확한 표현 대신 의료 서비스, 가족 계획 등으로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고요. 페이스북의 모회사인 메타의 경우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조건을 달기도 했습니다. 메타는 직원들에게 이번 낙태 관련 판결에 대해 내부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도 금지해 직원들이 공개 반박하는 일도 있었어요. 월마트, 코카콜라 등 일부 글로벌 기업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NYT가 보도했죠.
정치권과의 충돌 가능성도 있어요. 낙태를 금지한 주 정부나 낙태 반대 단체들이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나오고 있죠. 공화당 성향으로 낙태권에 반대해 온 텍사스 주 의회 의원들은 이미 낙태 관련 지원을 약속한 시티그룹에 경고를 보냈고,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지난달 로건 그린 리프트 대표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원정 낙태 시술을 지원할 경우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어요. CNN은 "낙태 관련 기업의 혜택이 공화당과의 관계를 악화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기업들은 갈수록 큰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과거 주요 사회적 논쟁이 있을 때 한발 뒤에 서 있었던 기업들이 이제는 전면에서 목소리를 내야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공급망, 물류·인력난 등 경제 이슈를 해결하는 것 뿐 아니라 사회적 현안에 대한 '현명한 해답'을 내놓아야하는 미션을 받아든 기업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 지 주목됩니다.
편집자주 - [찐비트]는 ‘정현진의 비즈니스트렌드’이자 ‘진짜 비즈니스트렌드’의 줄임말로 조직문화, 인사제도와 같은 기업 경영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외신과 해외 주요 기관들의 분석 등을 토대로 신선하고 차별화된 정보와 시각을 전달드리겠습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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