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부왕' 마지막 꿈 무너진다..'경암숲' 앞 기막힌 땅싸움
부산대 305억 기부 故송금조 회장
생전 마지막 꿈 '경암숲' 수난기
LH, 숲 깎아 옹벽도로 건설 추진
"땅따먹기식 수용권 행사 그만"
2023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한창 조성 중인 경남 양산 사송리 일대, 일명 ‘사송 신도시’에서 지금 기막힌 땅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부산의 기부왕으로 손꼽히던 송금조(1923~2020년) 회장이 설립한 경암교육문화재단과 공공주택지구 사업 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땅 수용 문제로 송사에 휘말렸다.
2018년 LH가 재단이 소유한 숲의 입구를 수용해, 산을 깎고 도로를 내겠다고 통보하면서다. 재단은 반발하고 있다. 이미 십수 년 전 1차 수용을 통해 숲 진입부를 깎아 옹벽을 세운 뒤 아파트를 짓고 있는 데다가, 남은 진입부마저 2차로 수용해 폭 23m, 길이 243m의 ‘옹벽 도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사송지구 옆, 재단 측이 소유한 숲의 이름은 ‘경암숲’이다. 돌밭을 일궈낸다는 의미의 경암(耕岩)은 송 전 이사장의 아호(雅號)다. 교육문화공간으로 이 숲을 조성하는 것이 송 회장의 살아 생전 마지막 꿈이었다. 그 꿈을 위해 그는 40년 전 고향 땅 양산에 숲 부지 31만7286㎡(약 10만평)를 마련했다.
하지만 수익성만 앞세운 개발방식, 공익을 앞세운 강압적인 수용권 행사, 한평생 사회공헌에 헌신한 기부자에 대해 예우하지 않는 사회 풍토 등에 시달리다,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 감았다. 그가 아내 진애언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에게 남긴 유지는 이랬다. “내 없더라도 꿋꿋하게 하래이. (경암숲을) 잘 지키라.”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LH가 공익을 앞세워 수용권을 행사한다 해도 적정선을 넘어섰고, 이렇게까지 자연을 훼손하면서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다시 한번 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체 경암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지난달 21일 찾은 경암숲의 입구는 공사판이었다. 경암숲을 포함해 새로 조성되는 사송지구(276만6465㎡)는 경부고속도로를 가운데 놓고서 금정산 자락 쪽의 1공구, 반대편의 2공구로 개발되고 있다. 2023년 12월 완공 목표로, 다 지어지면 1만4794가구가 살게 된다.
LH가 1차로 수용한 경암교육문화재단의 숲은 이미 깎여 거대한 옹벽이 세워졌다. 숲으로 들어가는 기존 진입로는 없어졌고, 흙먼지 날리는 공사장 한복판을 지나야 숲의 임시 진입로에 닿게 된다. 숲의 초입에 있는 계곡은 바짝 말라 있었다. 한석용 경암교육문화재단 사무국장은 “더운 여름이면 직원들이 물놀이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족했는데, 공사가 시작된 뒤 계곡물이 마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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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왕이 된 부산 1위 납세자
8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부산 향토기업인으로 자수성가한 송 회장은 평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살았다. 정미소, 양조장, 오징어 가공 사업에 이어 금형사출공장인 태양사, 봉제공장 등을 성공시키며 오랫동안 부산 지역 개인소득세 납부 1위 자리를 지켰다.
송 회장은 우리나라 기부역사를 새롭게 쓰기도 했다. 2003년 개인 기부금 사상 최고액인 305억원을 부산대 양산 캠퍼스 부지 매입비로 쾌척했다. 약정식에 허름한 운동화 차림으로 참석해 화제가 됐다. 자신에게만큼은 평생 구두쇠로 살았다. 그러면서 2004년 사재 1400억원을 출연해 경암교육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송 회장은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가 세계를 무대로 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며 경암학술상을 제정했다. 올해 18회를 맞은 경암상의 상금은 2억원, 지난해까지 74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송 회장은 경암상을 제정하면서 양산시에 그에 걸맞은 교육문화공간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경암숲이 아름다운 수목원과 더불어 어린이 박물관, 청소년 과학관 등이 어우러진 공간이 되길 바랐다. 그러던 차에 2007년 LH로부터 숲의 진입부(4만3900㎡)의 첫 수용 통보를 받았다. 당시 보금자리 주택을 짓는다는 말에 송 회장은 흔쾌히 따랐다. “서민주택을 짓는 일도 양산시와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차도가 갑자기 옹벽 도로로
문제는 11년 뒤의 2차 수용 통보였다. 2018년 LH는 경암숲의 나머지 진입부(1만5889㎡)를 수용해 도로를 건설하겠다고 통보했다. 당초 사업을 추진할 때 숲의 지하로 지나가도록 계획됐던 도로가 갑자기 지상도로로 바뀐 것이다. 지상의 숲을 파내 옹벽을 만들고 도로를 내는, 이른바 개착식 도로로 계획이 변경됐다. 진 이사장은 “1차로 땅을 수용한 뒤 긴 세월 방치하며 발을 묶더니, 지구 밖 사업으로 추가 수용을 통해 도로 건설을 추진하면서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수용했다”고 분노했다.
LH “지하 차도 비싸서 못해”
2017년 사업이 재개되면서 지하 차도는 지상도로로 바뀌었다. 그리고 경암교육문화재단이 1차로 수용당한 땅 일부는 단독주택 부지에서 상업용지로 바뀌었다. 추가 수용해 조성하겠다는 도로는 경암숲을 깎고 지나가다, 경부고속도로 하부를 관통해 이 상업용지에 도달하게 된다.
조계춘 카이스트 건설 및 환경공학과 교수는 “산을 깎아 개착식 도로로 건설하면 높이가 30m 되는 절토 사면이 발생해 경관이 크게 훼손됨은 물론이고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에 사면이 붕괴할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있어 잠재적 위험시설물이 될 수 있다”며 “자연을 파괴하고 안전을 위협하는 공법으로 건설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말했다.
진 이사장은 최근 책『무너진 풍경-LH 땅따먹기 프로젝트』를 출간했다. 경암숲을 둘러싸고 그간 있었던 일을 빼곡히 담았다. 그는 기부를 포함해 선의로 했던 모든 일에 지쳐있었다.
그가 책에 쓴 글귀다.
“수용권은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집행이 조심스럽고 제한적이어야 하는데 LH는 수십년간 이런 식으로 수용권을 휘둘러왔습니다. 〈중략〉 송 회장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풍경은 무심한 권력에 의해 자신이 가꾸려던 꿈이 무참하게 잘려나가는 것이었고, 한탄스럽습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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