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학생들에게 글쓰기 시켜보니.. 그 놀라운 반응

김광철 2022. 7. 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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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글쓰기에 한평생을 바쳐온 장권호 교사

[김광철 기자]

▲ 전남 곡성군 장권호 선생 가족묘지 인근의 묘목 농저장 이팝나무 등을 심어 가꾸는 조그만 농장이다.
ⓒ 김광철
이전 기사 '숲을 가꾸는 한국의 부피에 장권호 교사'에 이어 장 선생은 교사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려 한다. 

글쓰기에 한 평생을 바쳤던 평교사

장 선생은 학교를 옮길 때마다 도서관 업무를 맡아 여러 가지 성과를 낸다. 그중의 하나가 학교 도서를 구입할 때 업자들의 리베이트 관행을 없앤 것이다. 장 선생이 1994년 한 중학교에 근무를 할 때 일이다. 학교에서는 학교 도서를 구입할 때 정가 구입을 한다. 그러면 책값의 20~30%가 교장과 행정실장한테 리베이트로 들어간다는 것을 잡아낸다. 장 선생은 온갖 협박을 받아가면서도 그 고리를 끊어낸다. 그후 장 선생은 학교 도서를 구입할 때 광주시내 대형 서점들을 대상으로 비교견적을 받아 20~30% 할인한 가격으로 구입하는 관행을 정착시킨다.

한편 인터넷과 컴퓨터 보급이 확대되면서 학교 도서관도 전산화 작업이 절실해진다. 당시 급속하게 컴퓨터가 보급이 되면서 광주교육감이 나서서 '예산을 지원해 줄 테니 학교 도서관 전산화 작업을 해 달라'는 주문을 각급 학교에 내려 보내지만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당시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 근무를 하던 장 선생은 도서관 디지털 작업 공모에 응해 도서관 디지털 작업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 당시 도서관 전산화 작업은 물론 학교 도서관 운영 방식을 바꿔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광주는 물론 전국 어디에도 참조할 만한 사례가 없어 힘들었지만, 교실 두 칸을 이용해 음악과 영화는 물론 공연과 전시, 정보검색을 넘어 토론 수업까지 모든 과정이 도서관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지요. 도서관 개관 후 전국 50여 개 학교에서 견학을 왔고 시내 많은 학교가 우리 도서관을 모델로 삼을 정도였으니까요.

한편으로는 도서관 사서 채용의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데에 일조했어요. 국어 교사가 맡아 대충 시늉만 내던 방식으로는 디지털 도서관을 운영할 수 없다고 교육청 측을 설득했지요. 광주시 교육청이 전국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학교 도서관에 사서를 전면 배치해 본격적인 디지털 도서관 시대를 열었지요. 한 차원 높은 독서교육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지요. 2022년 현재 광주가 사서 배치율 95%로 전국 1위예요."
 
▲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는 장권호 선생 전남 곡성군에 있는 가족 묘지 인근의 농막 '연화당'에서 차담을 나누면서 인터뷰를 했다.
ⓒ 김광철
장 선생은 도서관과 독서교육 관련 업무를 맡아 일하면서 전교조의 '전국참교육실천대회'에서 도서관 분과에 참가해 사례 발표를 하기도 하고 수년간 국어과 1급 정교사 교육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한다. 장 선생 본인은 수상할 의사가 없었다고 하는데, 독서대상을 비롯한 장관상 두 번과 교육감상을 받고 2017년 제31회 광주교육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는 국어 교사로서 읽기와 쓰기 교육을 국어 교육의 근간으로 삼고 일관된 교육 활동을 한다. 아이들과 단편 및 단행본을 포함하여 연간 40편 정도의 필독서 읽기 교육을 실천한다. 또한 쓰기 교육을 위해서 자신이 맡았던 학생들은 누구나 개인 문집을 갖고 글쓰기를 실천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필독서 읽기와 개인 문집 갖기를 통하여 읽기와 쓰기의 수행평가를 실시했다고 한다.

"읽기나 쓰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설득하고 충분한 교감을 통하여 그들의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어요. 학기 초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통해 다양한 자료와 사례를 충분히 준비해 최소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설득이 될 때까지 왜 읽기와 쓰기가 중요한지를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했지요. 내가 읽기와 쓰기 교육을 강조한 것은 학생들이 자기 삶을 의식을 갖고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데 읽기와 쓰기만큼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 없겠다는 믿음 때문이었지요."
 
▲ 광주 전교조 해직 교사 출신들과의 좌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장권호 선생의 전교조 활동과 현재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다. 전교조 활동을 통하여 서로 잘 아는 사이들이다. 장권호 선생의 셋째 형인 장범호 선생도 자리를 함께 했다.
ⓒ 김광철
 
- 주로 어떤 책들을 읽도록 했나요. 특별한 독서 지도 방법이 있었나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하종강의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도종환의 <부드러운 직선>, 오연호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등의 책들을 읽도록 했지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런 책의 저자를 학교로 초청해 강연을 듣고 질의, 응답 시간을 갖기도 했지요.

기억나는 강사로는 홍세화, 도종환, 하종강, 고병헌, 송순재, 오연호, 황광우, 김준태, 김용택, 송수권, 박남준 시인 등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있었지요. 한편으론 해마다 학생들과 함께 작가의 고향을 탐방하는 문학기행을 기획하고 실행하기도 했지요."

- 이와 같은 읽기와 쓰기 교육을 하는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라도 있었나요?
"제가 교사로서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학교에서도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능 모의고사 문제 풀이 대신 개인문집 쓰기를 수행평가로 실시했어요. 우려와는 달리 숨 막힐 것 같은 고3 수험생활 속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탈출구로서 훌륭한 역할을 했어요.

졸업식 날 내 책상 위에 몇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어요. 그 편지들 중에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와 함께 생각 공책을 쓰겠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이런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며 고마움을 전한 한 남학생의 편지가 잊히지 않아요."
 
▲ '광주교사신문' 영인본 '광주교사신문' 창간 때부터 기획과 편집 등 중심적 역할을 해 왔던 장권호 선생은 교사로서 '광주교사신문'을 만들었던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21년 6월호까지 내고 지금은 종이신문을 내질 않는다. 영인본으로 묶어 보관한다.
ⓒ 김광철
장 선생은 말한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이 되고 난 다음 복직을 하면서 내 자신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어요. 교감이나 교장 등으로 승진을 하지 않고 평교사로서 끝까지 교단에 서서 정년을 맞이하겠다는 것과 '광주교사신문' 기자로 정년까지 활동하겠다는 거였지요. 두 가지 약속은 모두 지켜졌어요. 이런 소신을 갖고 살아온 삶에 대하여 일말의 후회도 없어요."

"퇴직 후에 삶의 콘텐츠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뚝딱 채워지지 않아요. 젊은 날부터 미리미리 부지런히 준비하고 훈련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콘텐츠를 함께 할 친구가 없다면 모두 허사예요. 함께 음악 들을 수 있는 친구, 함께 여행 갈 수 있는 친구,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는 친구, 함께 전시회를 갈 수 있는 친구, 그러나 그 무엇보다 허물없이 언제라도 전화하고 수다 떨 수 있는 친구가 노후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예요. 노후에 곁에 있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보여요. 친구는 평생 살아온 내 삶의 결실이기 때문이죠."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면, 인생은 때로는 어둠과 절망 속에 소중한 선물을 감춰 놓았던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어요. 다만 그 어둠의 숲을 벗어날 때까지 우린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뿐이죠, 어쩌면 그게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르지요."

장권호 선생, 그는 확실한 자기 철학과 소신을 갖고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교사다. 젊어서는 참교육에 대한 열망을 안고 해직 등 온갖 도전에 물러섬이 없이 온몸으로 부딪히며 헤쳐 나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대세를 잘 읽어 매우 유연한 자세로 일관한다.

그는 무리한 싸움은 하지 않았다. 혼자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이 반걸음을 가는, 대중들과 연대하여 함께하는 투쟁을 통하여 이기는 싸움을 해왔다. 참교육과 학교 민주화를 위해 비록 모든 거악을 물리치진 못했을지라도 많은 성과를 내었다. 그중에는 훌륭한 모범 사례들을 만들어 광주는 물론 전국으로 퍼져나가기도 하였다.
 
▲ 장권호 선생이 숲가꾸기를 하는 전남 담양군 무정면의 숲 계간 '우리교육'이 '학교밖 교사' 취재를 위하여 광주를 찾은 김민곤 기획, 편집위원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장권호 선생이다.
ⓒ 김광철
 
그는 퇴임 이후까지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살아왔다. 지금 가꾸고 있는 숲도 자신이 죽고 나면 아들이 이어받아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젊어서는 사람을 키웠고 나이 들어 정년퇴직을 해서는 숲을 가꾸는 한국의 부피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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