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말없이 '사랑'을 말하는 데 성공한 박찬욱
[김성호 기자]
▲ 헤어질 결심 포스터 |
ⓒ CJ ENM |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일이 있다. 금기에 도전하는 것, 설명 않고 표현하는 것, 나의 이야기로 너를 움직이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에서 목표한 것이 아마도 이런 것들일 테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형사 해준(박해일 분)이 있다. 돋보이는 경력의 형사지만 잠 못 드는 밤들을 지나며 툭 치면 무너질 듯 위태로운 삶을 사는 중년의 사내다. 절절한 사랑도 다정한 가정도 몸 바쳐 지키고픈 무엇도 남지 않은 쓸쓸한 삶 가운데 해준은 그날그날의 범인을 뒤쫓는 데 여념이 없다.
시체가 나오지 않으면 박찬욱의 영화가 아니다. 도입부터 해준 앞에 시체 한 구가 주어진다. 장비를 차지 않으면 올라설 수 없는 가파른 암벽 정상에서 기도수(유승목 분)란 이름의 사내가 떨어져 죽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사고사냐, 뚜렷한 정황이 없는 가운데 해준과 형사들은 한 사람을 의심한다. 도수의 아내 서래(탕웨이 분)가 바로 그녀다.
▲ 헤어질 결심 스틸컷 |
ⓒ CJ ENM |
수사물의 얼굴로 사랑을 말하다
수사물의 외연을 갖고 있지만 영화는 명백히 로맨스물이다. <헤어질 결심>이란 제목부터가 제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한다. 헤어짐은 만남과 짝이 되는 말이고, 여기서의 만남이란 곧 남과 여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해준과 서래는 그 마음을 감추길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고픈 순간이 오면 기꺼이 다가선다. 태생부터가 위태로운 이들의 관계는 수많은 금기 사이에서 흔들리며 전진한다.
영화의 목적지는 명백히 사랑이다. 적어도 어느 사랑의 결말이다. 영화 속에선 '사랑'이란 말이 단 한 차례 등장하는데, 누군가는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내가 언제 그 말을 했느냐 되묻는 장면에서다.
관객들은 사랑이란 말없이 사랑을 고백하던 녹음파일을 듣고서야 그들이 진짜 사랑을 했음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사랑 없이 사랑을 말하는 것, 작가가 구현하길 원했고 극중 인물이 겪어낸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이 그렇게 지나간다.
▲ 헤어질 결심 스틸컷 |
ⓒ CJ ENM |
헤어질 결심? 사랑할 결심!
갑작스레 해준 앞에 나타난 서래는 이번에도 해준을 뒤엎는다. 붕괴시킨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서래의 남편이 갑작스레 죽어버리고 해준은 다시 한 번 서래를 의심할 밖에 없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 된 '헤어질 결심'이란 말이 서래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새로운 남편을 어떻게 만나게 됐느냐는 해준의 물음에 서래는 답한다.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라고. 헤어짐은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서래가 사랑한 누구와 헤어지고자 했는지를 관객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결심이 무참히 실패했다는 것 역시. 그러므로 헤어질 결심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의심하고 주저하는 해준 역시도 알아듣지 못할 수가 없다. 그는 또 한 번 붕괴된다.
서래에게 해준은 살인사건 없이는 다시 만날 수도 없었을 남자다. 그래서 그를 만나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선택들을 거듭한다. 그녀는 사랑을 결심하고 헤어짐을 결심하고 다시 또 사랑을 결심한다. 이끌리는 모든 것들 앞에서 결심하는 사람은 진지하다. 그녀의 진지한 마음이 가리키는 것은 사랑이다.
영화는 좀처럼 사랑이라 말하지 않지만 관객이 거듭 만나는 것은 분명히 사랑이다. 서래가 해준을 놓지 못하고 다가서는 것, 그리하여 해서는 안 될 결정을 하는 것, 마침내는 그 스스로 붕괴하고 마는 것이 모두 사랑이다. 결심하기 전에 사랑부터 한 해준이 끝내 놓친 것 역시 사랑이다. 뒤늦게 깨닫고 파도치는 해변을 헤매는 것, 저물어가는 날 끝에서 찾지 못할 이를 목놓아 부르는 것 또한 사랑이다.
▲ 헤어질 결심 스틸컷 |
ⓒ CJ ENM |
사랑을 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해준과 서래의 사랑이 관객을 실제로 움직일 것인지는 쉽사리 답할 수 없다. 불륜이란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도, 불륜보다 먼저 사랑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이해하려는 사람도, 불륜이고 사랑이고 내 일이 아니니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니 말이다.
나는 그저 이렇게 말하려 한다. 불륜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만약 누군가 움직였다면 그건 불륜이 아니라 사랑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그에겐 이 영화가 사랑영화일 거라고 말이다.
불행히도 나는 <헤어질 결심>을 충분히 좋아하는 데 실패했다. 그건 이 영화가 사랑을 말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몹시 우연적이고 캐릭터 설정 역시 얄팍하다는 등의 이유도 아니다. 그건 그저 이 영화가 사랑과 함께 품격과 자부심과 꼿꼿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던 탓이다.
▲ 헤어질 결심 스틸컷 |
ⓒ CJ ENM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코로나 때문에 시작한 '주70시간' 택배... 아빠를 잃었다"
- 추경호 부총리 역주행, 두고 보기 어렵습니다
- "왜 에어컨은 엄마만 켜요?" 기말고사 준비하던 아이가 폭발했다
- 월 1400만 원에 '뿅 가서' 시작한 일...이 정도인 줄 몰랐다
- '중국 견제' 무리수... 윤 대통령의 '오직 동맹', 위험하다
- '한동훈 비즈니스석 출장 파격' 언론보도, 검증해보니
- 윤석열·바이든 '노룩악수'...의전 미숙 지적에 대통령실 답변은?
- 북한, DMZ 인접 금강군서 코로나 첫발생 주장... 대북전단·물품 지목
- 윤 대통령 나토 정상회의 행보... '미국 가까이, 중국 멀리'
- 100원짜리 밥 주며 고문... 경찰이 학생에게 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