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하면 통한다"..'탈일본 성공'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일본 수출규제 3년]
반도체 배관부품 국산화한 아스플로..일본에 역수출
엑시콘 국내 첫 비메모리 검사장비 국산화
美 장비 국산화한 피에스케이..국산화 성과 전방위 나타나
"소부장 국산화는 최소 10년은 걸리는 장기 과제..평가 신중해야"
글로벌 공급망 위기..전세계 반도체 소부장 유치 경쟁
이젠 경제안보 위해 '국산화' 넘어 '자급화' 고민할 때
[아시아경제 곽민재 기자] 반도체 공정에 사용하는 가스 공급 장치의 튜브와 밸브, 필터 등 부품 80~90%를 우리는 수십 년간 일본에 의존해왔다. 적어도 2019년 6월까지는 그랬다. 같은 해 7월 일본의 보복성 수출 규제 이후 반도체 배관부품 제조업체 아스플로는 이 부품들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수출 규제 이전에 국산화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기업들이 신뢰도와 품질이 검증된 일본 제품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테스트 기회(신뢰성 검증)조차 갖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기술력이 있어도 이를 검증 받을 기회가 없어 제품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중소기업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박만호 아스플로 연구소장은 "기존에는 일본 제품과 비교해 기술력이 동일하다고 설명해도 이를 검증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부족했는데 수출 규제 이후 검증 기회가 주어져 13개 품목의 밸브를 모두 검증받아 제품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수출 규제, 국내 소부장 기업에 찾아온 기회
아스플로는 이 부품을 올해부터 국내 반도체 대기업에 공급하고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 일본 제품으로 쓰던 것이다. 일본에서 수입하던 IGS(통합 가스 관리 시스템) 모듈에 장착할 수 있는 가스켓 필터는 일본에 역수출할 정도로 성공적인 반도체 부품 국산화 케이스로 꼽힌다. 가스켓 필터는 정밀하게 가스를 조절하는 데 사용하는 부품. 필터 가격이 개당 십여만원에 이르는 고가다. 아스플로에게 일본의 수출규제는 기회가 됐다. 2019년 당시 매출액이 404억원이었지만 2021년 586억원을 기록했고, 올해 850억원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9년과 비교하면 올해 매출은 두 배를 넘어서는 것이다.
튜브도 일본에서 전량 수입해왔다.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이를 국산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아스플로는 산업통상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세아창원특수강과 한국재료연구원, 고등기술연구원, 한국항공대 등과 함께 개발에 성공했다. 이를 국산화하는 데는 2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현재 3가지 품목이 실증 검증 테스트를 받고 있다.
반도체용 품질 검사장비를 개발·생산하는 엑시콘도 최근 3년 새 반도체 비메모리 검사장비 국산화라는 성과를 냈다. 일본 수출규제 이후 정부와 반도체 업체는 비메모리테스트 장비 국산화를 추진했다. 엑시콘은 발 빠르게 비메모리테스트 장비를 연구, 국책과제에 착수해 올해 3월 개발을 완료, 현재 양산을 위한 고객사 최종 승인을 앞두고 있다. CIS(CMOS 이미지 센서) 검사장비는 일본 수입 의존도가 높았다. 국내 대기업들은 모두 일본의 장비업체 어드반테스트의 제품을 써왔다. 박종수 엑시콘 부장은 "지금까지 수입산에만 의존해왔던 비메모리 검사장비의 국내 첫 국산화 사례"라며 "일본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있어 고객사의 가격 부담도 낮출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기업이 100% 독점하던 장비를 국산화한 사례도 있다. 반도체 감광액 세정 장비 세계 1위 기업인 피에스케이의 임지홍 과장은 "일본 수출 규제 이후 고객사의 소부장 기업 국산화에 대한 관심과 지원 늘었고, 이런 상황에 힘입어 미국 램리서치로부터 100% 수입하던 ‘베벨 에처(경사면 식각장비)’의 국산화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베벨 에처는 반도체 전공정에서 주로 수율 향상을 위해 사용하는 장비다. 기존에 국내에서 생산됐던 장비가 아닌 후발주자로 국산화하는 부분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특히 특허를 만들어내는 부분, 공정을 만들어내는 어려움이 많았다. 기존에도 베벨 에처에 대한 국산화 구상이 있었지만,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본격적으로 국산화에 돌입했고, 성공할 수 있었다.
임 과장은 "삼성전자의 적극적인 지원과 긴밀한 협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피에스케이는 지난달부터 삼성전자에 장비를 납품하고 있다. 피에스케이는 반도체산업협회의 ‘반도체 성능 평가 사업’을 통해 SK하이닉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다. 올해 SK하이닉스에 양산 부문 초도 매출이 발생했다. 반도체 장비 국산화로 해외 의존도를 낮출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 소·부·장 전체 日 의존도는 21년 만에 가장 낮아
일본의 수출 재개 이후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등 3대 품목의 일본 의존도는 다시 높아졌다. 반도체 장비 수입도 늘었지만 그렇다고 지난 3년 동안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 3년이 지난 올해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일본 의존도는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소부장넷에 따르면 올해 1~5월 한국의 소재·부품·장비 누적수입액 1072억1400만달러 중 일본 제품은 167억3900만달러로 15.6%를 차지했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2001년 이후 21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일본 제품 수입비중은 2019년 16.9%, 2020년 17.2%에서 지난해 15.9%로 줄었다. 올 1~5월에는 15.6%의 비중을 차지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시행된 2019년(16.9%)에 비해 2020년(17.2%)엔 일시적으로 일본 의존도가 소폭 늘었지만, 정책의 효과가 당해 연도에 나오기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의 신속한 연구개발 지원과 소부장법 개정 등 정책 효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면서 3대 핵심 품목을 비롯한 일본 전반에 대한 소부장 기술 자립도가 높아졌다”고 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소부장 국산화나 수입 다변화는 3년 정도의 시간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최소 10년 이상이 걸리는 일"이라며 "단순히 지금 상황에서 성과를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3년 정도로 기술 자립이 가능했다면 애초부터 일본 의존도를 높여 종속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안 전무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식각공정에 사용되는 불화수소와 폴더블 휴대전화의 모니터 필름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이미 국산화가 완료됐고,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도 상당 부분 개발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코로나·전쟁에 글로벌 공급망 흔들…전 세계는 소부장 유치 경쟁 중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등은 글로벌 공급망 위기를 불러왔다. 당초 소부장 기술 자립 노력은 일본의 무역보복에 따른 수출규제에서 시작됐지만,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속 반도체 소부장은 ‘국산화’를 넘어 ‘자급화’의 관점에서도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반도체 부족(쇼티지)현상이 벌어지면서 국내에 제조시설 수요가 늘어났고 덩달아 장비 수요도 급증했다.
경제안보의 측면에서 가장 안전한 건 자국에 제조시설을 확보하는 것이란 인식이 생겨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소부장 기업 유치를 위한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 EU의 반도체법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반도체 디자인 및 소프트웨어 분야에 집중해왔던 유럽 국가들은 최근 반도체 제조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 상황에서 반도체 제조를 더 이상 외부에 맡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반도체 공장 유치를 위한 인센티브도 강화하고 있다. 독일과 아일랜드 등에 신규 반도체 공장과 연구소를 설립키로 한 인텔은 EU로부터 올해 68억유로(약 9조28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금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한국의 반도체 소부장 투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일본의 3대 규제품목만 국산화해도 됐다면,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심화된 오늘날은 미국, 중국, 일본 등 전방위적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반도체 소부장 자급화에 주목해야 한다"며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국내 소부장 기업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을 통해 반도체 전 분야에 대한 대응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곽민재 기자 mjkwa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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