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레시피 | 잘 나가던 박 이사는 왜 나갔나?
‘고속’, 매우 빠른 속도를 뜻하는 말이다. ‘고속철도, 고속도로, 고속버스’ 등에 자주 쓰이는 이 단어는 보통의 빠르기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 예정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요즘은 ‘고속’에도 만족하지 못해 ‘초고속’의 속도가 필요한 세상이다.
직장에서도 이 고속은 드문 예가 아니다. 누군가 고속 승진하거나, 승진이 보장된 직책이나 부서에 배치되면 직장인들은 ‘승진의 고속철에 올랐다’고 말한다. 입사해 일정 시간이 지나야 승진하는 보통의 직장인에 비해 빠른 시간에 과장, 부장, 이사로 승진하는 직장인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이 섞인 평가이다.
직장에서 이 고속철에 승차할 수 있는 티켓은 당연히 한정적이다. 우선은 오너 가의 일원이다. 단지 혈통이 같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손자까지 경영 능력과 무관하게 회장 자리에 오르는 것 역시 전근대적이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성씨가 다른 이에게 평생의 가업을 물려주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해서 후계자 수업을 받는 이라면 그가 20대에 이사로 입사해도 누구도 시비를 걸 수는 없다. 다음은 탁월한 공적이다. 누가 평가해도 압도적인 성과를 올린 직장인은 그가 영업직이든, 기술연구직이든 고속철을 탈 수 있다. 그리고 딱 한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나름 힘깨나 쓴다는 실세의 파벌에 속해 그 실세의 승진 혹은 라이벌을 무너뜨리는데 공을 세운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티켓 중에서 어느 것이 안정적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답은 뻔하지만 오너가 일원, 공적 쌓기 그 다음이 사내 정치의 승리자 순이다.
고속은 그렇다면 장점만 있는가? 빠르게 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빠르게 내려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극한을 치닫는 놀이공원 롤러코스터가 높이, 빨리 올라가는 대신 급하게 내려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0대 임원, 과연 그가 60세까지 ‘직업이 임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직장인도 이런 ‘고속과 장기 탑승’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가 세계적인 특허를 갖고 있거나 오너가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는 곳간지기라면 별개이겠지만 이는 보통의 직장인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당연히 30대 임원은 40대에 회사에서 내려올 것을 준비해야 한다. 조금 느린 열차를 탄 동기보다 더 빠른 은퇴가 그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고속 승진해 남은 노후에도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것을 마련했다고 해도 그는 제2의 인생에서 쉽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그렇다. 빠르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니 그렇게 잘 나가던 박 이사는 왜 갑자기 그만두었지?’라고 궁금해한다. 그가 회장실에 들어가 “야, 내가 먹고 살려고 네 밑에 있었는데, 네가 진짜 회장감인줄 아냐”고 소리치거나 서버실에 들어가 장비를 망가뜨리지 않는 한 영원히 회사에 말뚝처럼 있을 것 같았는데, 라고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빠르게 올라갔기에 빠르게 내려가는 것뿐이다. 회사라는 조직은 갖가지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실행하고 또 수정한다. 고속 승진도 만들고, 정리 해고도 만들고, 임금 피크도 만들고, 가끔은 복지 제도도 만든다. 이 시스템 모두 회사와 직원의 공생을 바라는 것이지만 실상은 일정 기간 다녔으면 ‘알아서 나가주었으면 좋겠다’는 회사의 바람이 숨겨져 있는 제도이다.
대기업의 경우 매년 수백, 수십 명이 임원이 된다. 이렇게 3년만 지나도 그 회사에는 그야말로 임원이 우글거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임원실로 들어가는 인원만큼 적당하게 매년 임원실에서 책상을 정리하는 이도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회사에서는 인적 자원의 순환이라고 부른다. 듣기 좋은 소리이지 사실은 ‘쓰임새를 다했으니 이제 폐기 처분’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렇게 보면 회사를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하고 거대한 기계로 치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순환은 사이클이 길고 필터링을 갖춘, 입구와 출구의 크기를 비슷하게 만든 파이프 라인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공을 세웠고, 능력도 있으니 승진하라’는 회사의 명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이는 탑승자 명단에 이름도 없는데 기를 쓰고 고속철에 뛰어오르려고 무리수를 둘 필요 역시 없다는 뜻이다. 무단, 무임승차는 잠시 몇 정거장은 사람들 틈에 뒤섞여 갈 수 있지만 결코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 그리고 보통 열차를 탔을 때보다 더 빨리 기차역을 떠나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또 고속철에 올라 목적지나 종점이 아니더라도 그 중간 역에서 하차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판단력도 필요하다. 고속철의 종점까지 갈 수 있는 것은 몇몇에게 부여된 특혜다. 마치 설국열차의 맨 앞 칸 승객처럼 이 열차 소유주 등 몇몇에게만 부여된 권한인 것이다. 자신이 선택 받은 고속승진자라고 착각하지 말고 적당한 시기에 스스로 내려야 한다. 그래야 달리는 고속철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밖으로 던져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고속철이 잠시 정차했을 때 불이라도 켜져 있는 기차역에서 내릴 수 있는 것은 그나마 행운이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홀로 내리게 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한 유럽 탐험대가 어느 날 아프리카 원정을 떠났다. 탐험대는 원주민을 가이드로 고용했다. 울창한 정글을 헤치고 3일을 꼬박 걸었다. 4일째 되는 날, 원주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치거나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탐험대장은 원주민을 재촉했다. 어서 떠나자고. 그러자 원주민의 리더가 탐험대장에게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3일 동안 쉬지도 않고 너무 빨리 달려왔습니다. 우리의 혼이 같이 와 몸과 하나 될 수 있도록 쉬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스피드의 시대에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멈춤과 느림의 미학이다. 음식도, 생활도 조금은 느리게 살려는 세상이다. “아니, 지금 같은 초스피드 시대에 한가한 소리하네”라고 할 수 있다. 직장은 전쟁터인데 쉴 것 다 쉬고 언제 고지를 점령하겠냐고. 그래도, 쉬고 멈추고 결국에는 어느 순간 내려야 한다. 또 자신의 위치와 능력에 맞지 않는 감투와 권한은 욕심내지 말고 잠시 미뤄둘 필요가 있다. 빠르게 달릴 때 사방을 정확히 관찰할 수 없듯이 천천히 달리면서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것인지, 내 주위에 같이 뛰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바로 뒤에서 숨소리를 내면서 뒤쫓아오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 시간은 소중한 것이다. 누군가 내 옆을 추월해 달리 때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그는 생각보다 멀리 가지 않는다. 고속도로에서 내 차를 추월해 과속으로 달리는 자동차 대부분이 다음 휴게소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쉬고 멈추어야 하는 리듬이 있다. 이것 역시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이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어느 덧 골인지점이 보이고 꾸준한 달리기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추월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는 당연히 달릴 수 있는 체력, 멈추고 쉬고 다시 뛰어갈 수 있는 방향 감각, 자신의 능력을 믿는 자신감이 필수 조건이다.
여기 고속으로 출세하고 그 고속철을 영원히 달릴 것 같았지만 중도에 열차에서 강제로 내쫓긴 이가 있다. 바로 당나라 태종의 최측근 복심 장손무기이다. 그의 여동생은 당 태종의 정비이고 장손무기는 당 태종의 등극을 도운 공신이다. 그는 권력, 총애, 부귀의 뒤에 숨어있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넘치기 전에, 의심받기 전에 멈춘 그의 절제된 행동이 있었기에 태종이라는 무서운 군주 치하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달렸다. 아주 잠깐, 멈춤의 처세를 잊었다.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와 마주했다.
당 태종은 황제가 되고 24명의 공신 초상화를 능연각에 걸어 그 공을 치하했다. 그에게는 명신들이 즐비했다. 책략가 방현령, 행정의 달인 두여회, 충직한 위징, 명재상 저수량 등이다. 그중, 장손무기는 태종의 복심이다. 그에 대한 당 태종의 총애는 각별했다. 장손무기는 당 고조 이연의 의군에 초기부터 가담, 태종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수많은 모함과 탄핵이 쏟아져도 태종은 장손무기의 품계를 올렸다. 장손무기의 여동생 장손황후가 태종에게 “오라비의 벼슬을 낮추어 달라”고 사정할 정도였다.
장손무기는 사려 깊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태종이 주저하거나 고민할 때면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해결 방안을 찾아오는 충실한 참모였다. 이에 당 태종은 “나는 장손무기를 얻어서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장손무기가 자신의 침전에 들어올 수 있게 허락했다. 장손무기는 영리했다. 그는 태종에게 ‘벼슬을 낮추어 달라’, ‘사직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이런 자제력과 겸손으로 장손무기는 태종 시대에 권력을 행사했다. 태종 사후에도 고명대신으로 고종을 보필했다. 고종은 외삼촌 장손무기와 모든 것을 상의했고 그의 조언대로 통치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장손무기는 방심했다. 후사가 없는 황후를 폐위하고 무측천을 황후에 앉히려는 고종의 뜻에 반대한 것. 이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이었다. 무측천은 장손무기에게 뇌물을 주며 황후 간택을 부탁했는데 장손무기가 이를 모른 척하자 분노했다. 야심가 무측천은 황후가 되자 장손무기를 공격했다. 장손무기는 간신들의 모함에 걸려 유배당하고 자결했다. 그의 집안은 풍지박산 났고 식솔들은 노비가 되었다. 후에 고종에 의해 복권되고 작위도 손자가 이어받았지만 본인 장손무기의 최후는 비참했던 것이다.
장손무기는 서기 549년에 태어났다. 장손무기의 아버지는 수나라 우효위장군 장손성. 장손무기에게는 배다른 형제가 많았다. 부친이 사망하자 이복형 장손안업이 장손무기와 어머니, 여동생을 쫓아냈다. 그들은 외삼촌 고사렴의 집에서 생활했다. 원래 장손 씨는 태원 유수 이연 집안과 친했다. 특히 장손성은 이연의 아들 이세민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딸을 이세민과 혼인시켰다. 수나라는 급격히 국력이 쇠퇴했다. 각처에서 반란의 깃발이 올랐다. 당시 이연이 주저하자 장손무기는 “불난 집에서 예의를 찾다가는 모두를 잃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의를 앞세우고 일어설 때입니다”라고 이세민에게 용기를 주었다. 617년 이연이 당나라를 창업했다. 장손무기는 이세민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고조 이연은 창업에 공을 세운 이세민을 제치고 장남 이건성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는 이세민의 존재가 두려웠다. 태자는 동생 이원길과 손을 잡고 이세민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이 ‘왕자의 난’에 고조 이연은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속내는 태자를 지원했다. 고조 이연조차 이세민의 성격과 능력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세민의 참모들이 움직였다. 방현령은 장손무기를 찾아 “먼저 손을 써야 한다. 이미 불화는 시작되어 되돌릴 수가 없다. 큰일을 앞에 두고 사소한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장손무기는 이세민의 결심을 촉구했지만 이세민은 형제를 죽여야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태자 이건성은 돌궐족 토벌을 위해 군대 출병을 주장했다. 이세민을 죽이기 위한 음모, 즉 출병 장수들의 환송연을 베풀고 매복한 군사들이 이세민을 죽일 계획이었다. 이 음모를 알게 되자 이세민도 대항을 결심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흔들렸다. 이때 장손무기는 “일을 앞두고 망설이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문제를 알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찾고도 주저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라며 망설이는 이세민을 설득했다. 결심을 굳힌 이세민은 군사를 배치하고 궁으로 들어오는 태자 이건성과 왕자 이원길을 살해했다. 이 소식을 듣고 고조 이연은 바로 이세민을 태자로 임명하고 황제의 자리마저 이세민에게 내어주었다. 이세민은 장손무기를 이부상서로 임명하고 조국공으로 봉해 그 공을 치하했다.
장손무기가 드디어 권력 실세로 등장했다. 태종의 매부, 최측근, 일등공신이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황제의 침실 출입 권한을 주었다. 잠자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목숨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신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상서우복야에 임명하려 했지만 조정에서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태종은 장손무기를 불러 “나와 그대는 처남매부 사이이지만 군신 간이다. 서로 간 조금의 의혹과 의심도 없어야 한다. 만약 서로 들은 말을 숨기거나 마음에 다른 생각을 갖고 말하지 않는 것은 서로를 속이는 것이다”라 말했다. 그리고 그의 임명을 반대하는 조정에는 “장손무기는 큰 공을 세운 공신이다. 이 상소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장손무기는 손에 들어온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대의와 원칙에 입각해 정사를 살폈고 태종을 대했다. 태종은 장손무기를 사공으로 임명하려 했다. 장손무기는 사양했지만 태종은 “내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너의 도움이 컸다. 너의 보좌로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외척이 아니라 공, 능력, 성품이 능히 삼공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장손무기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이승건, 둘째 이태, 막내 이치. 태종은 장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태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음 대권을 두고 물밑 싸움이 벌어졌다. 태종과 황족은 이태에게 태자를 주고 싶었지만 장손무기를 비롯한 공신들은 이치를 태자로 추천했다. 공신들은 총명했으며 정치력도 있는 이태보다 착하고 유약한 이치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원칙과 대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장손무기조차도 권력 향배가 걸린 결정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내세운 것이다. 결국 태종은 이치를 태자로 임명했다.
태종은 장손무기를 비롯한 공신 24명의 초상화를 능연각에 걸었다. 그리고 장손무기를 태자태사에 임명해 후계를 준비했다. 즉 행정부서는 저수량에게, 병권, 감찰 기능은 장손무기에게 주었다. 태종은 마지막 순간이 온 것을 알고 대신들을 불렀다. “저수량은 장손무기를 도와라. 그대가 정사를 주관하면서 혹시 장손무기를 비방하는 무리가 있다면 이를 막아야 한다. 장손무기 역시 저수량을 도와 태자를 보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태자 이치가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고종은 장손무기를 태위, 양주도독, 상서성, 문하성 총괄에 임명했다. 장손무기는 황명 출납과 행정, 감사는 물론 군사권까지 장악해 실질적인 당나라 1인자가 되었다. 고종의 장손무기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다. 이홍이 “장손무기가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고 고변했다. 역모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수사하는 것인데 고종은 바로 이홍을 죽여 버렸다. 들을 필요도, 수사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권력 투쟁은 계속되었다. 고종은 공신 방현령의 아들 방유애가 반역을 꾀했다는 고변을 받고 이를 장손무기에게 맡겼다. 장손무기는 순간 불온한 생각을 품었다. 라이벌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방유애와 평소 자신에게 고분하지 않은 황족 이각이 반역을 꾀했다는 보고했다. 고종은 방유애를 참수하고 이각에게 사약을 내렸다.
고종은 황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자 후계를 고민했다. 이때 무측천과 그 측근들이 장손무기에게 접근했다. 고종의 외삼촌이면서 실권자인 장손무기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장손무기에게 온갖 보물을 보내고 장손무기의 서자 3명에게 정오품 벼슬을 내렸다.
고종은 장손무기, 저수량, 이적을 불렀다. 황후 폐위를 의논하기 위한 자리였다. 영리한 이적은 병이 걸렸다는 이유로 오지 않았다. 저수량은 적극 반대했고 장손무기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은 채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이 소식을 듣고 무측천은 장손무기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다. 무측천이 이윽고 황후가 되었다. 무측천은 정치력과 권력욕이 대단한 야심가였다. 무측천은 허경종을 움직여 장손무기를 고변했다. “폐하, 장손무기가 이소와 내통해 모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고종은 허경종에게 장손무기의 심문을 맡겼지만 고종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올린 외삼촌을 처벌하기 쉽지 않았다. 이때 허경종이 움직였다. “폐하,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고종은 장손무기를 해임하고 서천성으로 유배 보냈다. 무측천은 그러나 이에 만족치 않았다. 무측천은 장손무기에게 자살하라 협박했다. 장손무기는 탄식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버티면 멸문지화를 당하고 대가 끊어질 판이다. 그는 목을 매고 죽었다. 장손무기의 나이 66세였다.
장손무기의 처세는 완벽했다. 아니 완벽해 보였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그는 멈추고, 사양했다. 그렇기에 태종은 그를 더 신임했고 자신의 후계를 맡길 정도였다. 역사에서도 장손무기가 권력을 이용해 치부를 하거나 파벌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잘 나가던 장손무기는 왜 조카인 고종의 손에 죽은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 실수 때문이다. 그는 태종의 ‘현무문 쿠데타’의 주역이면서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 올렸다. 정확하게 말해 장손무기는 태종의 사람이다. 비록 태종이 고종의 보필을 유언했지만 고종 즉위 후 장손무기는 적당한 시점에서 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권력의 고속철에서 내렸어야 했다. 그럼에도 행정, 감찰, 왕명출납, 군사력을 장악한 채 고종 시대를 관통했다.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빚이 있다. 같이 목숨을 건 혁명 동지이지만 고종은 그저 아버지의 공신이고 자신에게는 외삼촌일 뿐이다.
또 무측천의 황후 등극에서 보인 애매한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랑은 효보다 진하다. 고종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소원을 못 들어준 것에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했다. 무측천은 고종 사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여걸이다. 그녀에게 장손무기는 우군이든, 적군이든 제거해야 할 현실 권력이었다. 장손무기는 여기서 실기한 것이다. 그는 박수쳐 줄 때 떠났어야 했다. 그럼에도 권력의 늪에서 나오지 못하고 현실정치에 관여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는 방심의 결과이다. 장손무기는 태종 시대에 멈춤과 사양의 절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는 태종이 그를 총애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장손무기에게 고종은 ‘내가 황제로 만든 조카’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장손무기가 고종을 무서운 황제가 아닌 어린 조카, 내가 만든 황제라는 방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언제 어떻게 나의 손에 있던 칼이 나를 찌르는 무기가 될지 모른다. 역사는 교훈이다. 멈추고, 사양하고, 내려오는 것은 가장 아쉽고, 정점일 때 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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