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무계동 '무계정사길'..이 계절, 이 길을 걷다

2022. 7. 1.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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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정사길은 부암동주민센터 옆에서 시작, 인왕산 기차바위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까지 이어지는 560m의 길을 가리킨다. 거리는 짧은 편이지만 안평대군, 조선, 목인박물관 등 긴 이야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언덕길이다. 부암동이 아기자기한 풍광의 오래된 부촌이라면, 무계정사길은 굵직한 느낌의 선 굵은 마을이다.

▶안평대군과 무계정사

이 길이 무계정사길이 된 것은 안평대군이 지은 무계정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무계정사길의 공식 명칭은 무계정사지이다. 무계정사가 있던 땅이라는 뜻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용이 이곳 무계동에 무계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무술과 붓글씨에 몰두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안평대군은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일단은 없었다. 위로 형인 문종과 세조가 있었고, 이미 세종의 왕위를 문종이 이어받기로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왕실의 주요 인사로, 그야말로 안평대군으로서의 삶을 살면 될 일이었다. 안평대군은 무예에 능력을 보였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붓글씨를 잘 써 양사언, 한호(한석봉), 김정희 등과 더불어 조선 4대 명필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서예 전문가들에게 이 네 사람의 명필가 가운데 딱 두 사람만 꼽으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안평대군과 한석봉의 이름이 거론된다. 안평대군은 서예뿐 아니라 그림에도 해박해서 중국,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자신의 붓글씨 작품을 선물하고, 대신 해당 국가들의 미술작품들을 기증 받아 모으기까지 했다. 어쨌든 안평대군은 한마디로 금손 컬렉터였던 것이다.

그 결과 무려 222점의 국제적 작품들을 소장하게 되었는데, 왕자 시절 집현전 대학자 신숙주에게 자신의 수집품들을 기록으로 남겨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신숙주는 그 222점의 작품을 화풍별로 분류하고 설명하는 『화기』라는 책을 펴냈다. 그 화기에 의하면 당시 안평대군은 동진, 당, 송, 원, 조선, 일본 등에서 그림의 대가로 활동하던 35명의 서화가 작품 222점을 수집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고개지, 오도자, 왕유, 소동파, 곽희, 조맹부 등이 있고, 조선화가로는 유일하게 안견의 작품 30점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무려 222점이라는, 그것도 대가들의 작품들은 단 한 점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안평대군 등을 죽이고, 법도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10세의 왕 단종마저 영월 땅 깊은 계곡에서 목숨을 빼앗아 버린 후 스스로 왕이 되는 과정에서 그 작품들도 몽땅 사라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게 붙어 권력을 탐했던 자들, 또는 그 언저리 수하들이 대대손손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허한 추정을 해 볼 뿐이다. 안평대군이 모았던 작품 리스트 가운데 가장 소중한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몽유도원도’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덴리대학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그 222점의 작품들 가운데에도 적지 않은 작품들이 아마도 비슷한 경로를 통해 해외로 나간 것은 아닐지 어림짐작해 본다.

이는 안평대군이 수양대군과 정적 관계가 되었고, 그 결과 패배자가 되어 본인의 목숨과 가문의 종말을 본 까닭이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안평대군이 젊은 꿈을 꾸고 있었던 무계동 시대의 이야기와 바로 그 정자 무계정의 모습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화공간으로 건립된 무계원이 바로 무계정사가 있던 그 위치라는 얘기를 듣고 반갑고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안평대군 글씨로 보이는 무계동이라는 비석과 거친 마당만 있던 그곳에 무계원이라는 이름의 한옥이 들어서고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것을 보며 혹시 무계정사가 확장 복원되고 이 일대가 안평대군을 둘러싼 문화 예술의 이야기 숲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무계정사길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조성’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안평대군 무계정사지

▶오진암의 소재를 무계원으로 가져오다

무계정에서 이름을 빌려온 무계원의 기능은 한옥전통문화공간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에서는 전시, 강연, 세미나를, 앞마당, 뒷마당에서는 전통문화행사, 결혼식 등도 할 수 있다. 다례, 전통음식체험 등의 프로그램들도 이 공간에서 진행된다. 전통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별서 역할을 해 줄 문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무계원에는 건축과 관련된 은근한 이야기도 있다. 무계원을 기획한 주체는 종로구청인데, 건축 자재 일체를 새로 구입하지 않고 기존의 유서 깊은 한옥을 하나하나 해체해 건축에 이용했다. 무계원에 뼈와 살을 제공한 기존 건축물은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이다. 오진암은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이다. 원래 조선 시대 때 문화재 수집가로 활동했던 이병직(1896~1977) 씨의 고급 한옥이었다. 이 집은 한 사업가에게 팔려나갔고, 그 사업가가 고급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식당이 오진암이라는 이름의 요정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수많은 요정들이 있었고,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는 요정이 정치의 은밀한 밀실로 이용되는 등 대부분 문전성시를 이루곤 했다. 게다가 오진암은 당시 그 많던 요정 중에 무려 3대 요정으로 꼽힌 유서 깊은 곳이었다. 3대 요정은 오진암, 삼청동 삼청각, 성북동 대원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삼청각은 전통 문화공간으로 변모한지 오래되었고, 대원각은 주인 길상화(김명한)가 법정 스님을 통해 조계종에 시주, 길상사라는 이름의, 종교와 해탈을 넘나드는 명상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거기에 박정희 정부 때 남북공동성명 기초 작업을 위해 극비 입국한 북한 정치인과 비밀 협의를 했던 곳으로 유명세를 탔던 오진암마저 무계원이라는 전통문화공간으로 부활했으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3대 요정 모두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도대체 시절의 변화는 누가 만들어 가는 걸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진암은 2009년에 영업을 중단했고, 2010년에 호텔 부지로 매각, 철거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에도 건축물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 해체 후 적당한 곳에 복원시킨다는 계획은 있었다. 그러다 무계원 신축에 오진암의 건축 자재를 재활용하기로 종로구청과 호텔이 합의, 오진암에서 사용하던 대문, 서까래, 기와, 기둥 등을 무계원 건축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무계원의 모든 건축 자재가 오진암에서 온 게 아니고, 새로운 재료들과 적절한 위치에서 혼합되어 있을 테니, 무계원은 과거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이 만나 오늘의 인간에게 전통과 미래를 공유하도록 제공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편안한 마음으로 무계원을 걷고 있지만, 사실 마음은 그 윗집들에게 가 있었다. 보아하니 복원이 거의 마무리된 것으로 보이는 무계정사와, 안평대군 이용이 살았던 그의 집터가 방향의 주인공이었다. 몇 해 전 이 길을 찾아왔을 때만 해도 무계원은 물론, 그 위 안평대군 집터 역시 그 어떤 흔적도 없는 폐허였다. 단지 큰 길가에 근대문학 소설가 현진건이 살았던 집터라는 표지석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런데 안평대군 이용의 집터에 담장이 둘러져 있고, 까치발을 해서 기웃거려 보니 말끔한 얼굴의 한옥도 지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소나무 울창한 정원이 매력적이었다. 결국 무계원, 무계정사, 안평대군의 집 등이 모두 복권, 신축되면서 이 길의 주인공이 무계정사, 안평대군이 된 것이다. 그 문화의 이음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전면적인 개방 시기를 기다려 본다.

▶목인박물관 목석원

무계원 앞은 작은 삼거리로 이뤄져 있다. 무계원 정문에서 직진하면 안평대군 집터, 현진건 집터, 반계 윤웅렬 별장, 자하문미술관, 인왕산등산로 입구 등을 만날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직진 코스에서 권하고 싶은 지점은 인왕산등산로이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기차바위가 나온다. 부암동과 백사실 계곡, 계곡 저편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 왼쪽부터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나한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의 펼쳐진 모습이 파노라마로 보인다. 오른쪽 가까이로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 그리고 인왕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기차바위가 무계정사길은 아니니, 그 광활한 전망은 잠시 후 목인박물관 목석원에서 감상하도록 하고 다시 언덕 아래를 향해 걸음을 돌린다.

아, 내려 오기 전, 길 꼭대기에 있는 자하미술관을 빼놓을 수 없다. 눈으로 보기에 인왕산 자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자하미술관은 실제로도 서울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오직 자하미술관을 보기 위해 높디 높은 언덕을 걷거나 운전해서 올라야 하는, 어찌 보면 인왕의 바위를 조각해서 만든 미술관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김상표개인전이 7월17일까지 열리고 있다. 작가는 주로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회화 작업을 하고 어쩌다 붓을 사용하기도 한다. 붓으로 터치하는 그림의 질감부터, 손가락을 매개로 작가의 육신과 물감과 캔버스, 그리고 작가의 그림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그 결과물을 감상하는 관객의 마음은 보다 날 것에 가까운 원초적인 느낌이지 않을까 개인적인 기대를 하게 한다.

자하미술관을 떠나 다시 무계원 방향으로 내려가면 윤웅렬 별장이 있다. 그는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절 대단한 무관으로 지냈었는데,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다. 이곳에 별장을 지은 것은 1905년 한양에 역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훗날 역병이 잠잠해지자 그는 종로 본가로 돌아갔다. 윤웅렬이 죽은 뒤 이 별장은 주인이 많이 바뀌었고, 현재 소유주는 서울시로 되어 있다. 그저 건물과 정원이 관리만 받고 있을 뿐, 아직은 시민에게 돌아가지는 못한 상황이다.

목석원 입구
이제 발길을 목인박물관 목석원으로 돌린다. 이곳은 인왕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자하미술관까지 걸어 올라갔다 쉬엄쉬엄 내려온 후 다시 무계원 앞에서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목인박물관은 원래 종로 인사동 어귀에 있었는데, 오랜 도심 생활을 끝내고 인왕산 아래로 이사한 게 2019년의 일이다. 무계원 앞 갈림길에서 왼쪽 언덕으로 약 500m쯤 걸어 올라가면 돌담집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어 올라가면 목인박물관 목석원이 등장한다. 물론 자동차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주차장은 넉넉한 편은 아니다. 무계원 주차장이 문을 연 7월1일 이후라면, 그곳에 주차를 하고 운동도 할 겸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것도 좋다.

목인박물관 목석원은 전시장이기도 하지만 인왕산 자락의 산책 코스이자 서울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북한산, 광활한 하늘, 평창동, 부암동 계곡 등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전망의 명당이다. 입구 매표소에서 절차를 밟고 나면 안내 리플렛에 있는 시설 약도를 따라 전시와 산책을 즐기면 된다.

필자는 매표소 건물 바로 뒤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인 지팡이 전시회를 먼저 보았다. 목인박물관은 약 2000여 점의 전 세계 지팡이를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서너 가지를 배웠다. 첫째, 지팡이의 어원이 ‘짚앙’이라는 것이다.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무언가를 짚는다고 할 때의 짚에, 접미사 앙이가 합성되어 결국 지팡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지팡이에게도 쓰임새에 따른 권위가 주어지며, 그 권위는 주로 작대기의 길이, 손잡이 문양이 결정해준다는 것이었다. 찰리 채플린이 즐겨 사용했던 지팡이는 신사의 권리를 상징하고, 큰 스님들이 들고 다니는 석장은 쇠고리가 달려있어 불길함을 막는다는 주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황의 지팡이는 목동이 양을 칠 때 사용한 지팡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목자의 직무와 권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셋째, 장수를 상징하는 ‘청려장’이라는 이름의 지팡이도 있다.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인데, 오늘날에도 100세를 맞은 노인에게는 대통령 선물로 선사된다고 한다.

지팡이 전시장을 나와 세미나룸을 지나면 피크닉하우스가 나온다. 옥상에 오르면 편백나무 옥탑방과 야외 테이블, 항아리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있고, 항아리 뒷편으로는 북한산의 족두리봉부터 형제봉에 이르는 서울의 산하가 펼쳐져 있다. 너와집, ‘멍때리는 터’도 재미있는 공간이다. 멍때리는 터에는 넓적한 해먹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곳에 비스듬이 누워 북한산 일대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은 오랜 시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면이 될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호랑이 바위가 있다. 목인박물관 최정상 지점이다. 마치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를 오른쪽 약간 뒤에서 보는 것 같다. 인왕산 자락에 있는 바위니 당연히 호랑이를 연상하게 되었겠지.

호랑이 바위
다시 입구 매표소 방향으로 내려오노라면 제주돌하르방 등을 곳곳에 배치해 둔 제주의 뜰이 있고, 그 아래에는 해태상 전시장인 해태동산이 있다. 나오기 전에 꼭 들려야 할, 목인박물관의 핵심 전시 공간이 바로 목인창고이다. 옥상에 동물상을 배치해 둔 이곳에는 목인박물관의 오랜 주제인 나무 인간, 즉 목각 인형들과 전통 상여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는 나무 인형들은 그 하나하나의 표정에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런 나무 인형 수백 개가 전시되어 있는 이곳에서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문양, 상여 등의 모습을 관찰하노라면 또 다시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 깊이 알 수 없는 표정들, 인생, 너무 많이 알려 하지 말라고 말하는 목각 인형들, 그리고 세상 뜬 사람들에게 축제를 열어주는 상여 행렬 장면 등이 그렇게 이야기 해 주는 것이다. 목인창고는 2층으로 들어가 1층으로 내려가 관람하고, 마당으로 나가 부처님 동산을 보고 되올라오게 되는데, 처음 진입했던 하얀색 매표소 건물과 만나게 된다. ‘목인박물관에 가 보니 뭐가 좋냐’고 묻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느낌 하나하나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 하나하나가 사라지는 곳이 바로 무계정사의 무릉도원인 목인박물관 목석원이기 때문이다. 모든 걸 비우고 박물관을 떠나는 순간, 마치 전생에 잠시 다녀온 착각에 빠졌다면, 풍경에 대한 지나친 추앙이었을까?
▷종로문화재단 무계원

위치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부암동 315-3)

관람료 무료(대관비는 별도)

운영시간 09:00~18:00(*휴관: 월요일, 1월1일, 설날 연휴, 추석 연휴)

※숙박은 불가능하지만 소그룹의 담소, 토론, 세미나 등을 위한 시간 임대는 가능하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안마당, 뒷마당 등을 임대에서 사용할 수 있다. 사용료는 2시간 기본 4만 원에서 10만 원이다.

▷맛있는 집 | 나뭇잎스시

제목이 주는 편안함과 매력 때문에 식욕이 일어나는 스시 집이다. 가느다란 건물 1층에 테이블도 몇 개 되지 않는데, 무언가 바삐 돌아간다기 보다 여유롭게 식사를 나누는 분위기가 좋았다. 참다랑어 뱃살부터 도미, 연어, 광어, 도로스시 등 사시미들과 세트 초밥, 김치어묵우동, 새우장, 덮밥 등을 즐길 수 있다. 생선의 선도와 양도 적당해서 대식가만 아니라면 3~4인 기준 10만 원 선에서 고품격의 스시를 맛볼 수 있다. 취재한 다음날 친구들과 이곳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 했는데, 어느 날 혼자, 오직 나뭇잎스시를 먹기 위해 무계정사길 초입을 찾게 될 것 같다.

위치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5길 2

운영시간 11:30~22:00, 브레이크타임 14:30~17:30, 라스트오더 21:00 (*월요일 휴무)

[글과 사진 이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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