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헤어질 결심', 그리고 마침내 [쿡리뷰]

이준범 2022. 7. 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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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 드는 로맨스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안개 사이를 헤매는 느낌도 든다. 사랑 고백으로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는 이야기다. 극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진실이 드러나며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한 편의 영화가 다시 시작된다, 마침내. 과연 관객들은 한 번 감상하는 것으로 ‘헤어질 결심’과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있을까.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은 형사 해준(박해일)과 피의자 서래(탕웨이)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산 정상에서 추락해 사망한 서래의 남편 사건을 수사하게 된 해준은 서래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애써 무시한다. 곧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걸 알게 된다. 수사 끝에 서래에 대한 의심을 멈춘 해준은 사건을 종결하고 서래를 향한 관심에 집중하며 편하게 만난다. 그러다 우연히 사건의 진실을 보여주는 증거를 마주한 해준은 크게 당황한다.

박찬욱 감독이 스웨덴 추리 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수사극은 해준이 이끈다. 이봉조 작곡가가 만들고 가수 정훈희가 부른 ‘안개’에서 영감을 얻은 로맨스는 서래가 이끈다. 1부에 해당하는 전반부는 해준의 시선으로 용의자 서래를 의심하고 관찰하면서 알아가는 경찰의 이야기다. 2부에 해당하는 후반부는 서래의 시선으로 1부의 이야기를 재해석하고, 결말로 이어지는 선택의 이유들을 담담하게 설명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흔한 수사극도, 흔한 로맨스도 아닌 두 가지가 절묘하게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이야기가 됐다. 도무지 진실에 닿지 않아 안타까운 수사극 분위기를 로맨스에 덧씌우고, 서로 마음이 같아도 여러 현실 상황과 조건들로 멀어져야 하는 로맨스 분위기를 수사극에 덧씌우는 식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하나를 정확히 반으로 가른 구성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헤어질 결심’은 수사극처럼 보이는 로맨스 영화에 가깝다. 서래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1부에서 끝났을 영화이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인 영화 ‘아가씨’ 역시 남성들이 짜놓은 판에 말처럼 놓인 여성의 이야기로 보였던 1막이 끝난 후, 그 판을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여성들이 뒤집는 이야기에 가깝다. ‘헤어질 결심’ 역시 남성이 끝내려는 로맨스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해 이어가고 또 뒤집는 여성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서래의 말과 행동에 끌려 다니며 당황하는 해준의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헤어질 결심’에 등장하는 모든 말과 상징들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서래가 TV로 즐겨보는 사극부터 해준의 아내가 농담처럼 건넨 직장 동료 이야기, 서래가 입은 옷 색깔까지 모든 게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변형되고 진화한다. 사망한 남편 사체를 말씀으로 듣겠나, 아니면 사진으로 보겠나 묻는 해준의 대사는 전체 구성의 요약처럼 보인다. 1부는 어색한 한국어와 통역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청각적인 말씀으로 소통하는 두 사람을 보여주고, 2부는 목격한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보는 서래의 청록색 드레스 사진으로 서래에 대한 시각의 엇갈림을 표현한다. 다가가려면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상황과 오해와 입장 차이로 자꾸 엇갈리는 전개는 오히려 더 로맨틱하게 다가오고 두 사람을 더 단단히 이어준다.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산과 바다, 부산과 이포, 구소산과 호미산, 초록색과 파란색, 해준의 후배 형사, 디지털 워치와 아날로그 시계 등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다른 의미를 담은 두 가지 상징이 곳곳에 숨어 있다. 마치 같은 곳을 향했지만 엇갈리는 해준과 서래를 이야기를 함축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선 같은 장소, 같은 구도로 서 있지만 빛의 색깔과 분위기가 완전 다른 두 사람의 뒷 모습을 감독이 임의적으로 대비되게 표현하기도 한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정훈희와 트윈폴리오 송창식이 함게 부른 OST ‘안개’가 흘러나온다. 완전히 다른 목소리와 창법을 가진 두 가수의 화음이 때론 조화를 이루고 때론 서로 교차하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보기 힘든 독특한 로맨스 영화다. 해외 언론, 평론가들의 극찬 속에 지난달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것이 이상하지 않다. 15세 이상 관람가로 입장 문턱이 낮아졌지만, 작품에 다가가는 진입 장벽은 높아진 느낌이다. 곳곳에 의외의 웃음이 터질 만한 장면, 의외의 깜짝 출연 배우들이 등장해 보는 재미가 있다. 탕웨이의 어색한 한국어 대사는 물론, 전반적으로 대사가 선명하게 잘 들린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박찬욱 감독이 숨겨놓은 디테일로 가득해 영화가 끝난 후 다시 곱씹게 한다. 감독의 메시지가 탕웨이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한국에선 좋아하는 영화를 한 번 봤다고 다시 보길 중단합니까.

2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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