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원짜리 밥 주며 고문.. 경찰이 학생에게 한 일 [납북귀환어부 이야기]
[변상철 기자]
▲ 승운호 선원 중 가장 나이가 어려 만14살에 납북되었다가 15살에 귀환한 김성대씨.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
ⓒ 변상철 |
사실 김성대씨를 만난 것은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몇 개월 전, 속초의 한 택시조합 사무실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날도 그는 다른 택시기사들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나와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역시나 다른 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그와의 첫 대면은 한 시간가량 이뤄졌는데, 인터뷰 중간 고통스러웠던 고문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렇게 억울하고 비통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인터뷰가 끝나자 여전히 이 문제를 세상을 드러내도 될지 모르겠다며 자신 없어 했다.
아직 가족들은 자신이 납북되었던 과거를 알지 못하는데, 납북사실이 세상에 드러났다가 아무것도 밝혀지지 못한 채 끝나버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진실규명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고, 자신의 고통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면 다시 연락을 준다고 했다. 실제 납북귀환어민 피해자 모임이 만들어진 뒤에도 한동안 그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다.
김성대씨가 다시 연락을 해 온 것은 자신과 같이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승운호 동료 선원들이 재심을 하겠다며 서로 연락이 닿은 뒤였다. 동료들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자신도 진실규명에 나서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승운호 선원들 사이에서는 다른 납북귀환선원피해자들에 비해 남다른 동료애가 느껴진다. 납북되었던 23명의 선원 중 21명의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아낸 것을 보면, 분명 다른 납북귀환 선박과는 다른 연대감이 느껴진다.
고성 아야진이 작은 마을이라는 영향도 없지 않겠으나 이들의 연대 의식은 상당했다. 그러한 연대감은 김성대씨처럼 주저하는 이들을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본 김성대씨는 좀 더 여유 있고 덜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이야기 하는 내내 창밖으로 보인 푸르고 눈부신 바닷가도 긴장을 푸는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납북된 선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김성대씨는 만14살에 납북되었다가 15살에 귀환한 어린 선원이었다.
용돈 벌 겸 호기심에 탄 오징어 배
김성대씨의 고향은 아야진이라는 곳이다. 행정구역상 고성군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속초시에 더 인접한 그곳에서 그는 34살 때까지 살았다. 승운호 선원으로 승선한 1971년은 그가 만으로 14세 되던 때였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승선한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특별한 이유보다는 당시 재학 중이던 동광중학교 동창생과 함께 방학을 이용해 용돈을 벌어볼 겸 호기심에 오징어 배를 탔던 것이라고 했다.
"(승운호는) 아침에 출발했던 것 같아요. 23명이 탔는데 대략 크기가 10톤 정도 되는 목선 배였어요. 선장은 이진영씨, 기관장은 조동용씨였어요. 다 같은 마을 분들이니까 잘 알았죠. 오징어 조업을 2~3일가량 했던 것 같아요. 물과 식량이 떨어져 조업을 중단하고 귀항하던 중, 한 낮 12시쯤 되었을까? 저 멀리서 하얀 물보라가 일면서 물체 2개가 다가오더라고요.
한 5분 정도 되니까 금방 우리 배에 붙더라고요. 그게 북한경비정이었던 거지. 막 총을 쏘면서 '정선해라. 선원들은 갑판으로 모이라'고 겁을 줘요. 북한 놈들이 우리 배에 올라와서 하는 말이 '배 버리고 경비정으로 타라' 했어요. 선장이 배 못 버린다고 버텼더니 우리 배에 줄을 걸어서 납치해 가더라고요."
김성대씨는 북한군이 배를 버리라고 했던 이유에 대해 북한군이 다급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승운호가 북한 해역에서 조업을 했다면 북한군 경비정이 다급하게 이동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군이 남한 해역에서 어선을 납치해 갔기 때문에 급하게 선원들만 데리고 이동하려고 배를 버리라고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근교에 한국 경비정이 보이기만 했어도 자신들이 납치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13개월 있었어요. 석암휴양소라는 곳에 머물면서 교양도 받고 버스로 관광도 하고 김책제철소, 함흥, 청진, 백두산, 삼지연, 혜산 같은 곳을 관광을 했어요. 내 기억에는 석암휴양소에 납북되어 있던 남한 어선이 여러 척이었어요. 서해에서 납치되어 온 상선도 하나 있었는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여성들도 있었어요."
가장 나이 어린 선원이었던 그는 억류 기간이 길어지자 남한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작정 남한 쪽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2~3월 정도 되었을 때였어요. 가슴까지 눈이 내렸던 겨울이었는데 무작정 탈출하겠다고 도망쳤어요. 가슴까지 들이찬 눈을 헤치며 산을 넘었어요. 이틀을 걸어서 무작정 남쪽으로 걸어 나왔어요.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집으로 내려가다 죽는 게 낫겠다 싶었죠. 이틀을 굶으면서 걸었더니 완전히 지쳤죠.
그때 지나가는 지프차가 있길래 무작정 손을 들고 세워서 평양까지 태워달라고 했죠. 그런데 하필 제가 세웠던 그 차가 북한 안전요원 차였나 봐요. 저를 어느 철문이 있는 건물에 가두더라고요. 그곳에서 이틀 갇혀 있다가 석암휴양소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저는 요시찰로 찍혀가지고 지도원들이 항상 붙어 다녔어요"
구타는 일상... 물고문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 김성대씨가 귀환된 1972년 9월 7일 당일부터 수사가 곧바로 진행되도록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계획은 철저히 기획되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기도 전에 이들은 일주일간 속초시청과 여인숙에서 조사하는 계획이 문서로 확인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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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를 받을 때는 데리러 와서 이름을 불러요. (수사관을) 쫓아가면 'ㄷ'자로 된 해동여인숙이라는 데로 데리고 가요. 세면 바닥에 조사받게 다 해놨더라고. 고문하려고 준비를 미리 다 해놨더라고요. 지령 받은 게 뭐냐 첫 번째로 물어요. 누굴 만나고 무인포스트는 어디냐 이런 걸 물어봐요. 모른다고 하니까 똑바로 안 댄다고 조지는 거예요."
김성대씨가 당한 고문 역시 다른 피해자들이 겪은 고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타는 일상이고 기본이었다. 의자에 묶어놓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타서 얼굴에 붓는 물고문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숨을 쉬지 못해 기절하기 일쑤였고, 다시 정신을 차리면 물고문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물고문을 10여 차례 받았다고 한다. 매번 조사 때마다 담당 수사관과 조사실은 바뀌었으나 고문의 형태는 똑같았다.
"보안부대, 안기부 사람들도 와 있었던 것 같아요. 합동조사단이 있었어요. 속초에서 조사받고 고성경찰서로 이송되어서 일주일 가량 조사받고 다시 속초경찰서로 이송돼서 구속되었죠. 그렇게 속초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다 풀려나왔죠."
검찰 조사는 형식적 조사였다고 한다. 속초경찰서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확인만 했다. 그는 담당 검사였던 김동철 검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검사실의 계장이 모친과 친분이 있어서 덜 고생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검찰 계장이 조사하는데 경찰 조서를 보고 읽어 내려가면서 맞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거기서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위압감이 들어서 다 사실이라고 했죠. 검사 조사할 때 검사하고 경찰이 한통속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검찰에서 바른 소리 해봐야 다시 고문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장이 경찰 서류 보고 이야기하는 대로 다 인정했어요. 검찰 고문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거든요."
재판 당시 북한에서 이틀간 눈에 빠져가며 탈출했다고 항변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대성통곡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선고였다. 재판을 받고 난 뒤 그는 학교에서 퇴학 조치 되었다고 했다. 경찰의 감시와 이웃 사람들의 눈치로 마을에서 사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진학을 포기하고 1년 뒤, 매형을 따라 인천으로 조기를 잡으러 갔다. 조기잡이 중 휴식 시간에 선원 한 명이 김성대씨의 납북전력을 말했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인천항에 입항하자마자 부평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이곳에서 1차 조사 때는 인정되지 않았던 북한 찬양, 간첩 혐의 등이 추가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 김성대씨의 보호관찰 기록으로 김씨가 주거지를 이전하자 수원지검에서 보호관찰하겠다는 문서다. 이미 처분받은 그가 십수년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지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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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실에 들어가니 책상이 두 개인가 있고, 방안에 화장실이 있더라고요. 잠잘 때 되면 부평경찰서 유치장으로 데리고 갔다가 아침에 다시 데리고 와서 조사하는 방식이었어요. 조사하는 사람들끼리 과장, 계장으로 부르던 것이 기억나요. 2명씩 교대로 조사를 하는데 약 20일가량 조사받았어요. 잡혀간 그 옷 그대로 조사 끝날 때까지 입고 있었어요.
왜 그렇게 오래 조사받았느냐면 접선한 사람, 무인포스트 위치 이런 걸 다 허위로 조작하고 외워야하기 때문에 오래 걸렸어요. 그때 거기서도 물고문, 구타를 당해서 어쩔 수 없이 허위로 이야기한 거예요. 잠 못 자는 건 기본이에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몰라요.
내가 우체부로 가장해서 이야기했다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없어요. 잠을 못 자는데 무슨 정신이 있겠어요. 그렇게 내가 허위로 진술하면 수사관들이 재차 확인해보고 사실과 다르면 다시 고문하고 그러길 반복했어요."
20일가량 조사받은 김성대씨는 인천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검찰 조사 역시 경찰에서의 조사를 확인하는 정도의 성의 없는 조사였다고 한다. 1년 전 속초지검에서 같은 경험을 했던 그는 그런 검찰의 태도에 여기서도 부인하면 또 고문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허위 사실을 인정했다고 한다.
"한번은 서울 구로공단에 콘덴서를 만드는 전자 회사에 입사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1년 만에 납북 경력 때문에 해고를 당했어요. 서울 남부경찰서 형사가 내가 취직한 회사를 찾아와서 나에 대해 묻고 갔다는 거예요. 내가 요시찰인물이었던 것이죠. 결국 이런 압력으로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남북경력 때문에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어요. 술과 담배로 세상을 비관하며 살았죠. 생활이 비참하고 힘들었어요. 지금 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데 승객이 '경찰서를 가자'거나 '시청으로 가자'거나 하면 가슴부터 쿵쾅거리면서 떨려요."
실제 그의 말대로 그는 납북귀환 후 처벌을 받았음에도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보호관찰'을 받아온 기록이 존재했다. 특히 주거 이동 등 일상생활 전반에 관해 '지속적 감시'를 받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당해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저에게 늘 하는 말이 있었어요. '성대 네 머리카락을 다 뽑아서 짚신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해드려도 모자라'다고 할 정도로 어머니는 저를 돌봐주셨어요. 제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어머니의 응원 덕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은 제가 포기하지 않고 이 억울한 과거를 밝혀서 저의 명예를 꼭 회복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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