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장지영,문화체육부 2022. 6. 30.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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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찬 신드롬'이 뜨겁다.

18세의 앳된 소년 임윤찬이 권위 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1934~2013)이 1958년 소련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클라이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한 음반은 클래식계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그해 그래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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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임윤찬 신드롬’이 뜨겁다. 18세의 앳된 소년 임윤찬이 권위 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1934~2013)이 1958년 소련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후 클라이번이 거장으로 성장하지 못해 그의 커리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석유 사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때문에 텍사스주에서 성장한 반 클라이번의 본명은 하비 라반 클라이번이다. ‘반(Van)’은 미들 네임 ‘라반(Lavan)’의 애칭이다. 그는 피아노 교사였던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인 그는 18살 때 코지우스코 재단 콩쿠르와 20살 때 레벤트리 콩쿠르에서 잇따라 우승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열린 콩쿠르였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소련이 서방 세계에 자국 클래식 음악의 우월함을 자랑하기 위해 출범시킨 차이콥스키 콩쿠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를 배출한 러시아의 후예인 소련은 당연히 자국 피아니스트가 우승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심사위원단은 만장일치로 클라이번을 1위로 정했다. 23살의 클라이번은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으로 단번에 미국의 영웅이 됐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유럽에 대한 열등감이 컸다. 클래식 음악이 유럽에서 발전한 데다 미국의 유명 연주자들은 대부분 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유럽에서 넘어온 이민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클라이번이 클래식 강국 소련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미국인의 열등감을 단번에 날려줬다.

게다가 음악 외적으로 소련은 콩쿠르 몇 달 전부터 세계 최초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시작으로 3호까지 잇따라 발사하며 미국 등 서방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소련 과학기술이 생각보다 앞섰다는 것과 함께 소련이 핵미사일을 쏘면 막을 수 없다는 공포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클라이번의 우승은 ‘미국의 스푸트니크’로 불릴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미국 국민은 귀국한 클라이번을 뉴욕에서 우승 퍼레이드로 맞이했다. 그리고 클라이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한 음반은 클래식계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그해 그래미상을 받았다. 또한 미국 피아노 교사 협회는 클라이번의 이름을 딴 콩쿠르를 추진해 1962년 제1회 대회를 열었다. 클라이번이 연주자로서 본격 활동을 시작할 때 자신의 이름을 딴 콩쿠르가 만들어진 것이다.

연예인 같은 인기를 누린 클라이번은 국가 행사 때마다 단골 초청되는가 하면 방송과 투어로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그런데 그가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만 반복해서 연주하는 것에 대해 점차 평단의 혹독한 비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스로를 성장시킬 시간이 없다 보니 클라이번의 연주력도 예전 같지 않게 됐다. 결국 그는 아버지와 매니저가 세상을 뜬 1978년 사실상 은퇴를 하고 말았다.

피아니스트로서 40대 초반은 음악이 성숙해지는 시기지만 클라이번은 연주 대신 정부 관계 행사 등에 얼굴을 비치는 셀럽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1987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을 위해 백악관에서 연주하는 기회로 복귀했지만 이미 젊은 시절의 연주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클라이번은 미완의 피아니스트로서 콩쿠르만 남기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속에서 거장이 될 수도 있었던 유망한 피아니스트의 재능이 소비되어버린 것이 가슴 아프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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