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생각하며 치유자의 길 걸은 기독인들

2022. 6. 30.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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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6·25전쟁 그리고 한국 기독교] 전쟁에서 입은 한국교회 핍박·복수 넘어선 화해의 사역 (6)
1950년 10월 공산군에 의해 집단 학살된 48명의 희생자를 기리고자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 앞에 세워진 순교비에 ‘용서하라’란 글씨가 적혀 있다.


6·25 전쟁 시기 기독교인은 군경가족, 지역유지 등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공격대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이 세운 인민공화국에 적대적인 세력이라 인식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6·25전쟁 시기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희생된 기독교인은 개신교 1051명, 천주교 119명 등 모두 1170명이다.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는 기독교를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반혁명단체로 인식했다. 기독교는 소위 부르주아의 종교로서 기존 사회질서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장애가 된다고 봤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부른다.

한국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1920년대부터 시작됐다. 박헌영은 한국에 공산주의를 시작하면서 자신들 혁명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를 기독교라 생각하고 공격했다. 이런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해서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말세에 등장한 “붉은 용”이라고 규정하고,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얼마나 박해하는지를 알렸다.

하지만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해방 직후부터였다. 우선 북한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이 지역에 이미 자리잡고 활동하고 있던 조만식, 한경직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협박해 공산당에 지도권을 넘기라고 지시했다. 이에 북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월남해 남한에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다.

당시 남한에는 숫자는 많지 않지만 잘 훈련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맞설 만한 민주주의 세력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대항한 그룹이 바로 기독교였다. 이들은 이승만 박사가 주도하는 독립촉성국민회의에 가담해 각 지역에 조직된 인민위원회에 맞서 대한민국 건국운동을 했다. 기독교인들은 이 박사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이 됐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다음에도 기독교인들은 새로 만들어진 나라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은 철수했지만, 같은 시기 중국에서 선교하던 많은 선교사가 공산당에 의해서 추방돼 한반도에 왔다. 이들은 강력한 반공세력이 됐다. 1950년 3월부터 약 9주 동안 한국기독교는 미국에서 온 밥 피어스와 함께 반공과 복음을 외치면서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구국 전도 운동을 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기독교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공격대상이 됐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고, 당시 기독교인들은 미국의 간첩으로 간주했다. 당시 남한에는 월남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을 조국을 배반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하고 박해했다. 많은 경우 인민군들이나 인민위원회는 교회당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자신들의 거주지나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에 기독교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말 후퇴하면서 수많은 기독교인을 살해했다. 공산주의자들이 후퇴한 다음에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살인이 시작됐다. 그것은 공산 치하에서 그들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에 대한 색출작업이었다. 그리고 이 부역자 색출작업을 기독교인들에게 맡겼다. 기독교인들은 반공주의자들이며, 또한 상당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좌익들의 반란 사건 이후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인명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조남수 목사의 경우 제주 4.3 사건 이후 토벌대장 문형순과 협상해 자신의 신원보증 아래 부역자로 의심받던 사람들 300여명을 살렸고, 150차례 선무활동을 통해 좌익에 협조한 사람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중재·화해의 노력은 ‘여순사건’에서도 드러난다. 널리 알려졌듯이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해자를 사랑으로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1950년 9월 공산군에 의해 6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충남 논산시 성동면 병촌교회 앞에 세워진 순교자 기념탑.


6.25 전쟁 가운데서 66명의 신자가 집단살해된 충남 논산 병촌교회의 경우 유족들은 가해자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용서했으며 22명이 집단살해된 전북 정읍 두암교회의 유족들도 가해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용서하고, 전도해 함께 신앙 생활을 했다.

아버지를 죽인 좌익 부역자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향하고, 태극기 완장을 차게 해 처형을 면하게 해준 이인재 목사.


특기할 만한 것은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의 경우이다. 이 교회에서는 이판일 장로를 비롯해 48명이 1950년 10월 4일 아직 퇴각하지 못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살해됐다. 얼마 후 해군이 이곳에 들어와서 부역자들을 색출하게 될 때, 군인들과 함께 온 이 장로의 아들 이인재는 자신의 일가족을 살해한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이들에게 태극기가 그려진 흰색 완장을 만들어 착용하게 함으로써 처형을 피하도록 해줬다. 태극기가 그려진 흰 완장을 차고 있었다는 것은 이제 더는 인민공화국 백성이 아니라 대한민국 백성이 되겠다는 표시였다. 이인재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부역자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향하도록 함으로써 살길을 열어 준 것이다. 그는 피해자로서 복수하는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치유자의 길을 걸어갔다. 이판일의 모습은 진흙탕과 같은 전쟁터에 핀 한 송이 백합화였다.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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