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17>] 모텔 옥탑방

데스크 2022. 6. 2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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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17화 모텔 옥탑방


주머니를 뒤져보니 오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넉 장이 들어있었다. 그 돈으로 나는 근처 해장국집에 들어섰다. 전날의 주독이 빠지지 않은 얼굴로 더욱이 혼자서 콩나물국밥과 막걸리를 주문하려니 뒤통수가 뜨뜻했다. 누군가 지독한 술꾼이라고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술독에 몸을 더 담가야 내가 살겠기에 창피함은 참고 견뎌야 했다. 나는 비장하게 이를 악물고 주문했다. 이제 주머니엔 단돈 이천 원만 남아있었다. 막걸리 한 통 값은 물론 택시 기본요금도 되지 않는 돈이었다.


잠시 TV에 눈을 붙이고 있으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이 탁자에 올라왔다. 군침을 돌게 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구역질이 올라오면서 속으로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 반면에 막걸리는 안 넘어갈 것 같았는데 의외로 술술 잘도 넘어갔다. 식당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피가 얼굴에 몰린 듯 화끈거렸는데 한잔을 마시고 나니 피가 더 쏠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둘째 잔을 탁자 위에 소강상태로 방치해 두었다. 그 사이 휴대폰 벨이 울렸다. 놀랍게도 도반이었다.


“어이 김 형사, 어쩐 일이야.”


도반의 목소리가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무척 밝았다. 수신거부의 시간일랑 염두에 두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술잔을 나누고 싶어 전화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도반은 나의 주둔지를 확인하더니 지금 바로 자신의 주거지와 가까운 버스터미널 앞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막걸리가 많이 남아 있어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형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반은 거두절미하고 단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들고 나와.’


나는 콩나물 국밥은 그릇째 손도 대지 않은 그대로 놔두고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달라 해서 막걸리 통을 넣어 밖으로 나왔다. 오전 열시가 넘어서니 유월의 햇살이 제법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터벅터벅 걸어 버스터미널 앞으로 갔다.


“이야, 김 형사. 반갑다.”


벗겨진 머리에 갸름한 얼굴과 은테 안경, 그리고 비쩍 마른 몸에 걸친 풍성한 셔츠 차림의 도반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왼손으로 옮기며 반갑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시는 연락 안할 줄 알았는데.”


도반의 얼굴에서 원망과 반가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자네는 이제 단순한 술친이 아니라 도반이니까.”


“술친? 뭐 절친 같은 건가. 그럼 도반은 또 뭐냐.”


“그건 이따 회포를 풀어가면서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자네 집 구경부터 하세.”


“집은 무슨. 그냥 방이지.”


도반이 손사래를 치며 술집으로 직행하길 원했지만 내가 한사코 우겨 도반의 방을 찾아갔다. 모텔 옥상의 옥탑에 판넬을 붙여 달아낸 자그마한 가건물이 도반의 방이었다. 수돗물을 받아 쓸 수 있는 세면장과 방 하나가 전부였다. 방에는 소형 냉장고, TV, 옷걸이, 침대가 놓여있었다.


“좀 덥다, 이해해라.”


도반이 선풍기를 틀며 겸연쩍게 웃었다. 모텔에 달방을 구해서 묵고 있다 하면 당연히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겠다고 지레 짐작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에어컨 없냐?”


내 입은 머리와 따로 놀며 눈치 없는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옥탑방이라 에어컨이 없어서 방값이 좀 싸다. 그만 나갈까.”


“잠깐만. 가져온 막걸리나 한잔씩 하고.”


내가 검은 비닐봉지를 주섬주섬 풀자 도반이 손사래를 치며 ‘막걸리는 식당 가져가서 먹자’고 타일렀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어디 갈 거냐고 물었고 도반은 뭐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되물었다. 이에 나는 먹고 싶은 거야 많은데 지금 가진 돈이 딱 이천 원밖에 없다고 말했고 도반은 오늘은 자기가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도 아니고 도반의 대접을 받는다는 게 인간으로서 할 짓인가 싶었다. 그만큼 도반의 현실은 참담했지만 나는 술기운에 힘입어 금방 미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 둘만 먹는 것보다 선술집 선배 불러 같이 먹을까.”


도반의 제안에 나는 흔쾌히 목이 부러져라 주억거렸다. 혹시 선술집 선배가 술값을 낼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는데 만약 내 예상대로만 된다면 완전히 미안함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를 안 받는데.”


도반이 투덜대면서도 재차 전화를 걸었다. 선풍기는 씽씽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전화 안 받으면 우리끼리 가자. 내가 말했지만 도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깐만 형수한테 전화해 보고’ 하더니 다시 번호판을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마치 청진하듯 진지한 표정을 짓던 도반이 잠시 후 입꼬리를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여보세요. 뭐? 야구하러 갔다고? 아직 식사 안했죠. 그럼 동네 삼겹살집에서 봐요. 도반이 발가락으로 선풍기를 눌러 끄더니 ‘가자’ 하고 일어섰다. 나도 검은 비닐봉지를 챙겨들고 따라 일어섰다.


“술친은 뭐고, 도반은 또 뭐냐.”


택시 안에서 도반이 물었다. 도반은 택시기사가 되고 나서 택시만 타고 다녔다. 돈이 없으면 차라리 걸어 다닐망정 절대로 버스를 타지 않았다. 그걸 도반은 일제 강점기 때의 물산장려운동과 같은 심정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거창하게 표현했는데 어쨌든 도반이 지독하게 택시를 사랑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술친은 말 그대로 술친구, 도반은 함께 도를 닦는 벗.”


“그럼 전에는 내가 친구도 아니고 달랑 술친구였단 말이야.”


“술친구는 술과 친구의 합성어인데 친구보다는 술에 방점이 찍혀있어. 사람 사이의 진정성은 없고 오로지 술을 위한 관계지. 하지만 우리 둘이 꼭 그랬다는 건 아냐. 다만 도반을 설명하기 위한 하위개념을 잡다보니까 친구보다는 술친이란 단어가 더 적절해서 그런 것뿐이야. 여기서 중요한 건 도반이라는 개념이니까 술친이란 표현에 신경 쓰지 마.”


“개똥철학 나오니까 머리 아파지는데.”


“좀 있다가 술 한 잔 마시면서 들어보면 이해가 될 거야. 우리의 두뇌는 음주상태에 최적화 되어 있으니까.”


김영승 시인이 쓴 ‘반성’ 연작시에 이런 게 있다. 술에 취하여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수첩에 써놓은 글씨가 보였다.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고.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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