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연기 매너리즘과 헤어질 결심"
피해자 부인 만나 야릇한 감정 휩싸여
"박찬욱 감독 만나 뭔가 전수받은 느낌 들었다"
마흔 편 넘는 영화 출연하고도 신선미·독창성 취할 가능성 확인

부검실에서 사망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형사 장해준(박해일). 잠긴 패턴을 풀려고 검지로 이리저리 선을 긋는다. 해답을 알만한 여인이 찾아온다. "기도수(유승목)씨 아내 송서래(탕웨이)입니다.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부족합니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송서래는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가로젓는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마침내…. 저보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장해준에게 시선을 돌리는 송서래. 그렇게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한참 응시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송서래에게서 슬픔이나 괴로움은 찾을 수 없다. 시종일관 대쪽 같이 꼿꼿하다. 눈빛도 총기로 가득 찼다. 매력에 사로잡힌 장해준은 머릿속이 하얘진다. 의심이 짙어질수록 관심이 깊어진다. 그렇게 싹튼 사랑은 고질병인 불면증을 치유할 만큼 강하다. 설렘과 생동감을 동시에 부여해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렵다. 덫에 걸린 사슴처럼 온몸을 버르적거릴 뿐이다. 헤어지려고 결심해도 마찬가지다. 매혹적 기운이 다시 침투해 온 신경을 옭아맨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배우 박해일이 그린 장해준의 마음은 눅눅하고 을씨년스럽다. 때로는 안개에 가려 아슴푸레하기까지 하다. 물방울을 걷어내니 복잡한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송서래를 만나기 전까지는 냉정하고 합리적이었다. 감정적으로 흔들리면서 얼굴은 유약해진다. 의존적 경향까지 드러낸다. 송서래와 헤어진 뒤로는 메마른 풀줄기 같다. 퀭한 눈과 훌쭉한 볼. 웃음마저 건조하고 쓸쓸하다. 그는 새로운 살인사건을 맡아 야수성을 되찾는다. 하지만 다시 만난 송서래 앞에서 이성의 벽은 맥없이 허물어진다.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같이. 아시아경제를 만난 박해일은 다음과 같이 곱씹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그동안 연기한 배역들의 특징이 조금씩 묻은 듯했다. 그게 특별한 지점 없이 물 흐르듯 나열돼서 흥미로웠다. 사실 박찬욱 감독께서 처음 장해준을 설명할 때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관록만 믿고 따라가려고 했다. 그렇다고 주관적 해석을 일절 배제하진 않았다. 제 나이대에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잘 활용하고 싶었다. 융합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괜찮게 나온 듯하다."
압권은 송서래와 입을 맞추는 한겨울 호미산 신이다. 주위를 휘감던 아련한 안개는 온데간데없다. 제법 굵은 눈발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거세게 흩날린다. 장해준은 모처럼 감정을 직설적으로 전하며 사랑을 확인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발은 보이지 않는다. 뿌연 안개만 가득할 뿐이다. 장해준은 아내 정안(이정현)에게 묻는다. "여기는 눈 안 왔어?"

박해일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해석에 양면성을 가져온다. 박찬욱 감독은 "꿈과 현실이 모호해지는 순간"이라고 했다. "해일씨가 호미산에 다녀온 걸 꿈처럼 착각할 수 있게 연기했다. 마치 ‘내가 서래씨와 키스를 했었나’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다. 그런데 시각을 달리하면 안갯속 정안과의 대화가 꿈처럼 전해지기도 한다. ‘헤어질 결심’의 시작은 정훈희의 노래 ‘안개’, 구체적으로는 ‘안갯속에 눈을 떠라’라는 가사다. 해일씨가 현실과 내면의 감정을 똑바로 응시하려는 안간힘을 잘 표현했다."
유연한 표현은 박 감독이 자주 선보여온 언어불통에서도 돋보인다. 박 감독은 송서래를 중국인으로 설정한 만큼 이를 통한 아이러니 조성에 많은 공을 들인다. 이를테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같은 대사다. 통역 애플리케이션이 중국어 ‘마음’을 한국어 ‘심장’으로 번역해 장해준의 혼란을 가중한다. 철저히 계산된 설정에서 긴장과 리듬, 위트는 배우들의 몫. 박해일은 "송서래로부터 동질감을 느끼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말했다.
"송서래는 문어체를 자주 사용한다. 장해준이 그 정제된 느낌을 부각해야 모순된 분위기가 살아난다고 봤다. 그래서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려고 노력했다. 목소리도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알려주는 것처럼 친절한 톤으로 일관했고. 탕웨이의 언어 감각이 특출나 수월하게 해냈다. 한국어 습득도 빠르지만, 순간적인 감각과 판단력이 뛰어나다. 특히 말보다 답답한 감정을 먼저 표현하는 재치가 일품이다.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오해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런 점이 차별화된 재미를 전한다고 생각한다. 수사극 속에서 펼쳐져 놀라울 따름이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촬영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었다. 독립된 작품이었다. 여느 때보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의 맛을 잘 살리고 싶었다."

박해일은 색다른 경험을 평생의 자산으로 여긴다. 이미 스스로 변화를 되씹으며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매너리즘과 헤어질 결심이다. 마흔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고도 신선미와 독창성을 취할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기대감에 부푼 나머지 어린아이처럼 연신 쌍긋거렸다.
"촬영이 눈앞에 닥치면 ‘이번에도 잘 넘어가자’고 생각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돌아보면 매너리즘이더라. 자력으로 수렁에서 몇 번을 건져 올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반복되던 흐름이 박찬욱 감독을 만나 변화했다. 영화 장인의 비법을 전승한 느낌이다. 잊지 않고 저축했다가 잘 써먹어 보련다. 더 나아질 나를 위해."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식시장 역대급 대폭락 시작…당장 '이것' 꼭 사야"…부자아빠 경고
- 결국 잘린 놈… "대통령이 '살인 말벌'처럼 화났더라" [World Photo]
- "우리 소녀들 인질로 잡아"…이란축구협회, 선수들 호주 망명에 격한 반발
- "갤럭시 쓰는 남자 싫어"…프리지아 발언에 '핸드폰 계급' 재점화
- '주사이모', 돌연 얼굴 공개…"아직도 박나래와 연락하냐" 질문엔 '침묵'
- 지하철타는 서민이 벤츠 차주 보조?…석유 최고가격제 불공정 논란
- 파리 한복판서 인파에 포위된 제니, 악성 루머에 결국 소속사 칼 빼들었다
- "인스타랑 너무 다르잖아"…"예쁘니까 무죄"라던 모텔 살인녀 얼굴 공개되자 반응이
- "배려가 먼저냐, 에티켓이 먼저냐" 한석준 이어폰 발언에 누리꾼 의견 팽팽
- "피난소에서 성적 행위"…日 AV, 대지진 15주기 앞두고 뭇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