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탁 논설위원이 간다] "공관서 개인 행사? 세금 못쓰고 개인 돈으로" 못박은 영국
헌재소장 공관 논란으로 본 공직 윤리
공적 임무 수행에 세금이 쓰이는 건 당연하지만, 제대로 적절한 곳에 쓰는 지가 관건이다. 근무처인 서울에 자택이 있는데도 거대한 공관을 이용토록 하는 것이 적절한지 따져봐야 한다. 해외 선진국은 세금을 들이는 공적 숙소를 이용할 경우라도 사적 이용과 명백히 구별토록 하고 있다.
영국에는 대통령에 해당하는 보리스 존슨 총리의 집무실 겸 관저가 다우닝가 10번지에 있다. ‘넘버 10’으로 불리는 이곳 옆 다우닝가 11번지는 재무장관 관저로 쓰인다. 다우닝가 12번지는 여당 원내대표 숙소였지만, 지금은 용도가 바뀌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은 장관들이 모두 의원이라 지역구가 먼 경우 런던에 머무를 수 있게 주택 수당을 지급한다. 필요를 따져 공무를 수행하기 위한 여건을 제공하되, 세금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는 규율과 장치를 두고 있다.
영국 정부에는 30년 동안 이어져온 장관 행동강령(ministerial code)이 있다. 시대에 맞춰 총리가 개정하는데, 내각 구성원이 지켜야 할 사항이 담겼다. 존슨 총리는 강령 서문에서 “장관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업무를 조정해야 하는지 이 강령을 따라야 한다”며 “내각 구성원은 영국 국민의 우선순위를 이행하고 약속을 지킬 때만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매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 이익을 중시하는 자세는 공직자가 세금을 매우 엄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항목으로 강령에 반영됐다. 국가 자산을 이용할 경우 금지해야 하는 사안부터 명시했다.
■ 공관에 막힌 등산길 '출입금지' 푯말 없어졌지만 통행 안 돼
영국선 "총리·장관 공관 살아도 세금 자비로, 정당 활동 제한"
식사자리에 배우자·친구 동석 여부, 선물 처리도 온라인 공개
수천평 공관 살며 개인적 모임 빈번한 한국 공관제도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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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에 따르면 공무 수행을 위해 내각 장관들에게 세금으로 시설이 제공될 수 있으나, 이런 시설은 소속 정당 활동이나 지역구 관련 활동을 위해 쓰여선 안 된다. 장관들이 일하는 청사도 포함된다. 영국은 의원이 주로 정부 요직을 맡는데, 정치적 이해와 연결되는 어떤 활동도 세금이 들어간 장소에선 할 수 없다는 취지다. 숙소를 겸한 공관(official residence)에선 일부 예외를 인정한다. 자택 기능을 겸하니 손님 초대를 막을 수 없어서다.
이 경우에도 강령은 ‘공관에서 정당이나 개인적 행사를 치를 경우 그 비용은 스스로 내거나 정당 측 비용으로 해야 한다. 단 한 푼도 공적 지갑에 떨어져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장관 등이 공관에서 거주할 때 개인 세금이나 주민세 등은 세금으로 써선 안 되고,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영국에선 총리부터 장관까지 가족 모임이나 친구·지인은 물론이고 공적 업무와 관계가 없는 인사를 초대해 공관에서 식사 등을 했다면 자비로 해야 한다.
국내 사정은 다르다. 거대한 공관에서 이뤄지는 모임은 사적일 때가 많다. 일일이 공개되지 않을 뿐 오·만찬 비용이나 준비하는 요리사 등 인건비를 공직자 개인 비용으로 충당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해 11월 김부겸 당시 국무총리는 삼청동 공관에서 대학 동기 등 10여 명과 오찬을 했다. 10명을 넘어선 안 된다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위반해 논란이 일었다. 역대 총리나 국회의장들은 속했던 정당 인사 등을 공관으로 불러 모임을 갖곤 했다. 대통령이 여당 관계자나 의원들을 집무실로 초대해 연회를 벌이는 일도 다반사다. 영국이라면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하지만, 국내에선 공사 구분이 엄격하지 않은 편이다.
영국 공직자에게 말로만 지키는 건 통하지 않는다. 정보가 공개되고 이를 검증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영국이 이런 시스템을 확립한 데에는 2009년 ‘영국 의회 지출 사건’이 큰 영향을 끼쳤다. 국회의원들에게 지급돼온 수당과 지출 내역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민의 공분을 일으킨 사건이다. 2009년 5월부터 영국 언론 텔레그래프가 의원의 지출·수당 내역 자료를 잇달아 단독 보도하면서 의원들이 납세자의 돈을 부당하게 쓴 정황이 드러났다.
한 장관은 자신의 집 융자금을 갚는데 10만 파운드(약 1억5700만원)를 쓰고 이를 공적 자금으로 신청했다. 일부 의원은 250파운드 이하 비용은 청구 때 영수증이 없어도 되는 규정을 악용해 기저귀나 유모차 등을 사기도 했다. 런던에서 자택이 멀 경우 직무 수행을 위해 별도 거처용으로 거주 수당을 신청할 수 있는데, 많은 의원이 자택과 이 집의 설정을 바꿔가면서 숙소비를 신청했다. 이 돈으로 집을 수리해 되파는 등 재산을 늘린 것이 드러났다. 이 여파로 총리 등 주요 정치인들이 사과한 것은 물론 장관 6명이 옷을 벗었다. 일부는 처벌까지 받았고,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정당 구분 없이 대거 불출마자가 속출했다. 그 결과 정치권이 통째로 물갈이 되다시피 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세금 사용의 투명성을 담보할 제도를 만들었다. 정부와 정당·의회로부터 독립된 윤리기관이 생겼다. 공관은 물론이고 여행 경비나 숙소 및 런던 주재 비용 등의 심사를 대폭 강화했다. 이후 모든 공직자와 의원들의 수당 및 지출 내역을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다.
이런 일을 겪은 영국에선 정보 공개의 정도가 한국과 딴판이다. 영국 정부 사이트에는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이 세금을 사용한 행사와 그 대상 등이 공개돼 있다. 어느 부처 장관이 외부 인사 환대 차원에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었을 경우 어느 단체, 누구였는지 공개된다. 공개 항목에는 배우자나 가족·친구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밝혀야 한다. 내각 구성원이 언론과 간담회를 했다면, 어느 언론사 누구였는지를 실명으로 공개한다.
외부 인사로부터 장관 등이 받은 선물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귀속된다. 다만 140파운드(약 22만원) 이하 소액 선물은 가져도 된다. 이 금액을 넘는 선물은 정부로 넘겨야 하는데, 만약 갖고 싶으면 구매할 수 있다. 이 금액 이상 선물 내역은 모두 온라인에 공개된다. 공개 자료에 따르면 존슨 총리는 지난해 11월 중앙아메리카 바베이도스 총리가 선물로 가져온 럼주 한 병을 사비로 구매했다. 이런 자료 공개 주기는 2개월이다.
한국의 정보공개 수준은 한참 못 미친다. 연간 두 차례 공개되는 총리실의 지난해 하반기 업무추진비 자료를 보면 총액이 4억8700만원 가량이다. 하지만 내역은 현장 방문 위로 격려, 민의 수렴 간담회, 정책조정 현안 회의, 내외빈 행사 등 큰 틀에서만 대략적인 설명이 있을 뿐이다. 영국처럼 자세한 세부 내역은 찾아보기 어렵다. 라몬 파체코 파르도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 교수는 “공직자가 자택을 세 놓고 월세를 받으며 공관을 사용하거나 친구나 지인 집에 살면서 별도 주택 수당을 타는 행위 등에 대해 영국 시민들은 큰 문제라고 느낀다”며 “납세자의 돈을 부당하게 쓰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공감대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과도한 공관 제공 및 운영에 세금이 어떤 항목에서 얼마나 쓰이는지, 사적 용도로 전용되지 않는지 등을 따져볼 때가 됐다. 법률 개정을 통해 정보 공개 범위를 확대하고 납세자의 의중을 반영해 제도를 고칠 때다.
※ 이 취재에는 이시영 인턴기자가 함께 했습니다.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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