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선율에 담는 조국 그리고 소망

2022. 6. 2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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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변호 목사의 심방탐방] 탈북민 첫 한예종 수학 유은지
유은지 기타리스트는 한예종 입학을 통해 늘 함께하시는 그분의 섭리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행사에 초대되어 연주하고 있는 모습(오른쪽).


“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탈북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남한에 와서 들은 말이 ‘남한은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 뭐든지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 열심히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남한에서 정말 잘 살 수 있는지 증명해보이고 싶었습니다. 정말 마음껏 음악이 하고 싶어 남한에 왔습니다”

서른 살이 넘은 늦은 나이에 싱글맘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 입학하여 졸업을 앞두고 있는 탈북민 클래식 기타리스트 유은지(34·혜림교회 출석)씨 말이다.

사선을 넘어온 북한이탈주민(새터민)이 어느새 3만 4000여명에 달한다. 필자가 만난 유은지 씨도 11년 전 위험을 무릎 쓰고 탈북하여 자유의 품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유 씨가 기타를 배우게 된 것은 기타 연주에 매료된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어느 여성이 기타 연주하는 것을 보고 온 아버지는 유 씨에게 기타를 가르치려고 기타 선생님을 찾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고등학교 5학년까지 거의 6년간 매주 자전거 뒷좌석에 싣고 비포장도로를 2시간씩 데리고 다녔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제일교포 선생님을 통해 수준급의 기타연주 레슨을 전문적으로 받았다.

유 씨는 현재 음악 수재들이 입학하는 한예종 4학년 졸업반이다. 4살 아이를 데리고 남한에 온 유 씨는 아이를 키우기도 힘든 형편이었지만 음악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원을 나와 처음 대구에서 생활을 시작한 유 씨는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힘든 형편과 피곤한 삶에서도 음악이 하고 싶어 대학에 도전했다.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꿈을 이루려면 서울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5살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반지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유 씨가 서울에 올라온 목표는 딱 한 가지였다. 대한민국 예술계에서 최고의 대학교로 꼽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유은지 씨는 간증과 연주활동을 적극 펼치면서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


유 씨는 “입학시험 준비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처음에 도전한 첫 해 입시시험은 레슨비가 없어서 1년간 혼자 준비했는데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열심히 1년을 준비했는데 떨어진 것이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떨어질 만도 했다. 연습실에서 밥만 먹고 10시간 이상씩 연습만 하는 입시생들도 떨어졌으니 말이다. 저는 레슨도 못 받았고 육아와 아르바이트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연습을 하다 보니 연습 시간이 항상 부족했다. 그 다음 해, 두 번째 도전에서는 입시전략을 바꿔 친구에게 돈을 빌려 그 돈으로 생활하면서 아르바이트할 시간을 줄이고 입시 레슨을 받았다. 연습실이 없어서 집에서 연습을 하다 보니 매일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왔고, 저의 이런 상황을 딱하게 봐주신 레슨 선생님께서 자신의 연습실에 와서 연습을 하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배려가 너무 감사했지만 저의 집과 연습실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 픽업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함께 연습실에 가서 밤늦게 까지 연습하다 보면 아이가 졸고 있어 연습실 한쪽에 재우고 나서 또 연습을 하곤 했다. 아이가 자면서도 듣고 깨어있을 때에도 듣고 그래서인지 연주하는 연습곡들을 모두 외우고 있어서 놀랐다. 어렵게 준비한 두 번째 도전에서는 아쉽게도 2차까지 통과하고 3차에서 떨어졌다. 꼬박 3년 입시 준비로 너무 힘들었던 제가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간절하게 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 계신다면 저의 간절한 꿈을 이루게 도와주세요’ 그때 저는 입시 스트레스로 온갖 병을 얻었다. 매일 비좁은 연습실에서 한자리에 앉아 10시간 이상씩 연습만 하다 보니 합병증이 생긴 것이었다. 허리디스크, 신경성 역류성 식도염, 손가락 관절염 등 병원에서 이대로는 더 이상 기타를 계속 칠 수 없다는 병원진단을 받았다. 도움 받을 곳 하나 없어 힘든 고통이 극에 달하고, 놀아 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달랠 길 없는 암담함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방이 막혀 더 이상 앞으로 헤쳐 나갈 수 없을 때, 저의 유일한 탈출구는 하나님이었다. 저는 매일매일 저의 꿈을 이루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게 치료를 받으며 망가진 손가락도 점차 회복이 되어가자 저는 다시 3번째 입시에 도전하여 마침내 한예종에 클래식 기타 전공으로 입학하는 꿈을 이뤄냈다. 저는 지금 탈북민 최초 한예종 입학생 그리고 지금까지 한예종에서 유일한 탈북 학생으로 제가 좋아하는 음악 공부를 행복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유 씨는 한예종에 입학하기 위해 세 번째 도전할 때에 시험 전날에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내일 시험인데 갑자기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열이 나고 식은땀이 나며 온 몸이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약을 먹어도 듣지 않았다. 마음은 초조하고 밤새 연습을 하고 내일 시험장에 가야하는데 도저히 연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이왕 이렇게 된 것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자’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거의 밤을 새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눈물로 기도했다. 그런데 신기하고 놀랍게도 아침이 되니 아픈 것이 사라지고 몸이 가볍고 머리가 얼마나 맑은지 놀라웠다. 밤새 시름해서 컨디션이 나빠야 하는데 너무나 좋았다. 다른 때 같으면 시험장에 도착하면서부터 긴장되어 떨어야 하는데 전혀 떨리지도 않았다. 마침내 실기시험 지정곡을 연주할 때에 내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모르게 무엇인가가 품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연주하는 것을 느꼈다. 연주를 마치고 나오면서 합격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보름 뒤 꿈에 그리던 한예종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듣고 주저앉아 펑펑 울면서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유 씨가 교회에 출석한 것은 5년 전이다. “서울에 올라와 입시 준비를 할 때에 막막했다. 돈도 없고, 5살 아이가 있고, 도움 받을 데도 없어 앞이 캄캄했다. 아이는 엄마가 가장 필요할 때인데 먹고 살기위해 아르바이트하고 음악 레슨도 받고 몸은 아프고 아이와 함께 놀아줄 수도 없어 절망스러웠다. 이때 먼저 탈북한 언니가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가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그동안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믿기는 누굴 믿어 내가 노력하고 잘나서 이때까지 살아왔지’라고 하면서 남한에서 얼마나 잘될 수 있는지 증명해보려고 내 의지로 애써 노력해왔다. 그런데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하나님이 도와주셨고 지금 여기까지 인도한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탈북과정과 중국생활, 한국입국, 한예종 입학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것을 깨닫고 보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음이 편안한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생했던 역류성 식도염도 사라지고 건강도 좋아졌다”고 했다.

유 씨는 탈북하게된 이유를 “북한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이때는 굶어 죽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때도 하나님은 나를 북한에서 빼내어 중국으로 인도해주셨다. 할아버지 고향이 남한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항상 감시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대학교 교수로 계셨는데 남한 드라마 영화를 보았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려 보위부에 구속되어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그때 아버지 때문에 중국 드라마, 남한의 드라마 천국의 계단, 유리구두, 가을동화 등을 많이 봤다. 남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주음악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갈수록 남한의 문화와 음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한에 갈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에 무역을 하던 아버지 친구의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 식당과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에 신분의 위험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결혼하여 4년을 살다가 ‘이렇게 살다가는 음악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4살 아이를 데리고 한국행을 결심하여 2011년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도착했다”고 했다.

유 씨는 새로운 꿈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를 마치면 유학을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학비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의 꿈도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거라 믿고 있다. 지금 현재는 간증과 연주활동 등을 지속하며 매일 정해진 시간만큼 악기연습은 기본이고, 영어공부, 운동 등을 꾸준히 하고 있다. 앞으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여 음악을 통해 통일 한국의 징검다리가 되어 남북의 평화와 북녘 동포들의 자유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멋진 연주자로 살아갈 것이다”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변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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