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들'은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윤일희 기자]
▲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
ⓒ CJ ENM |
좀 실망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에 후한 점수를 주었던 터라 기대가 컸나 보다. <브로커> 말이다.
<브로커>를 보는 내내 어쩐 일인지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이입됐다. 배우 이지은(아이유) 영향이 컸을 텐데, 그가 연기한 '소영'이 <나의 아저씨> '지안'과 닮아있었다. 고레에다 감독이 <나의 아저씨>에서 열연한 이지은을 인상 깊게 보았다고 한 인터뷰가 기억났다. 그는 지안에 과몰입했던 걸까? <나의 아저씨>로의 이입을 이지은 때문이라 단정하다, 그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건 영화관을 나와서다. 이지은뿐 아니라 소영을 둘러싼 '남자들'이 있었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지안이 지질한 동네 아저씨들에 의해 헐벗음을 구원받듯, 소영 역시 '루저남'들에 의해 수렁에서 건져지고 있었다. 지옥 같은 그들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 개운하지 않다. 지안과 소영은 가련하지만, 어린 나이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수난을 온몸으로 겪어낸 강한(독한) 여자들이다. 고군분투로 살아온 파란만장한 어린 여자들이 단지 '불쌍한 어린 여자'라서 '아저씨들'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서사는 대체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
ⓒ CJ ENM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스물두 살의 싱글맘이 혼자 딸아이를 키우다 결국 아이를 보호 기관에 빼앗기는 슬픈 이야기다. 딸이 여섯 살인 걸로 보아 엄마는 어린 나이에 출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족은 달랑 두 모녀로 단출하지만, 그나마도 몸 누일 곳이 마땅치 않아 모텔을 집 삼아 살아간다. 이 모텔을 관리하는 매니저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다. 융통성 있게 모녀의 사정을 살펴 주기도 하고, 종종 어린 딸의 친구도 되어준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엄마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노력하지만, 직업을 구하기 힘들고 빡빡한 정부 보조로는 두 모녀가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엄마는 곤궁한 형편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성매매에 이르고 발각되어 딸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이쯤 되면 사람 좋은 아저씨도 다 소용없다. 아무도 절박한 모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비정한가?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의 '아저씨들'이 어린 여자를 구원한다는 서사는 아름답다고 믿어지지만 허구이며, 아름답다고 믿어지는 가치 또한 되짚어 보아야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다룬 빈곤한 싱글맘 모녀의 현실이 모든 싱글맘 모녀의 삶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다. 영화는 가난해도 모녀의 사랑은 지극하고, 엄마뿐 아니라 어린 딸도 모녀 관계를 돌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모녀는, 비록 엄마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성매매에 나섰고 아이 또한 그 나이 또래 아이보다 영악하지만, 아무런 결격이 없다. 영화는 이런 가족을 정부가 개입해 해체시킬 권리가 있는지 되묻는 방식을 취한다. 문제의 해결은 싱글맘 모녀에게 부과되는 동정적, 간헐적 시혜가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떳떳이 살아갈 삶의 조건을 어떻게 구성해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있어야 한다고 성찰하게 한다.
하지만 <브로커>는 이런 질문을 미끄러뜨리고, 아기를 팔아넘기는 범죄자들의 선의에 그 고민과 책임을 넘긴다. 아이를 빼돌려 팔아넘기는 범죄자들도 인간적인 면이 있고, 이들의 뜬금없는 인류애가 아기 엄마와 아기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으라 한다. 마치 그들이 지금껏 팔아 온 아이들이 모두 사랑받고 살고 있기라도 한 듯 말이다.
왜 그녀들의 입을 통해 임신·출산을 단죄하는가
▲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
ⓒ CJ ENM |
소영은 이들을 만나기 전 부족하나마 어엿한 싱글맘이었다. 비록 못 배웠고, 가난하고, 미혼모고, 게다 성매매로 생계를 잇지만, 자기에게 온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었다. 그 자신이 버려진 아이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아이를 더 원할 수 있다. 세상에 덩그마니 혼자 던져진 그에게 피를 나눈 아이만큼 강한 연대감과 안정감을 줄 만한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고 믿어지는 유일한 관계, 소영에게 아기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소영이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신과 아기의 운명을 낙관할 수 없는 어린 엄마는 아이를 포기할 수 있다. 낳기 전 임신 중단을 할 수도 있고, 지우지 못해 낳았지만 키울 수 없어 포기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도 잘 됐달 수는 없지만, 그 자체로 여자들의 인생이고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소영이 "낳고 나서 버리는 것보다 낳기 전에 죽이는 죄가 더 가"볍냐는 날선 질타는 많은 여자들을 상처 입힌다.
게다 이 물음이, 무슨 사연인지 알 수는 없으나 버려진 아기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여자 형사에게서 받은 질문에 대한 되돌림이라는 데서 상처는 더 깊어진다. 임신 중단을 했든, 낳고 포기했든, 임신이라는 행위에 공여한 남자의 존재와 미혼모의 아이를 승인하지 않으려는 가부장의 적폐는 악의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단지 여자들만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의 죄를 짓고 추궁당하는 듯한 이 장면은, 미국에서 임신 중단 권리를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엎고 폐기시킨 사건만큼이나 분노를 자아낸다.
혹자는 한국의 미혼모도 정부 보조를 받으면 얼마든지 아이를 양육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기도 어렵다. 미혼모에게 주어지는 정부 지원이란 기초생활수급을 이를 텐데, 주거급여와 생계급여를 합쳐도 아이를 맘 편히 키우며 살 수 있는 규모의 금액은 아니다. 한부모 가정 아동 양육지원비도 입양 기관에 지원하는 금액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
또한 미혼모의 양육의 어려움이 단지 경제적인 난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힌 사회가 쏘아대는 미혼모와 미혼모 자식에 대한 낙인은 척박한 복지만큼이나 미혼모의 양육을 지치게 한다. 소영이 부족한 정부 지원이나마 기대지 못한 채 홀로 아기를 키우다 결국 포기하기에 이른 삶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브로커>는 이 질문을 성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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