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인강 시청 허용해주세요" 제안 후.. 제대로 토론이 붙었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기자]
▲ 두 번째 민주광장은 무더위로 장소가 체육관으로 변경되어 진행되었다. 한 아이가 발언하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다. |
ⓒ 서부원 |
때 이른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22일 오후, 두 번째 '민주 광장'이 열렸다. 몇몇 아이들은 한 달 넘도록 눈 빠지게 기다려왔다며 종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매일 열면 좋으련만, 빠듯한 학사일정 탓에 한 달에 두 시간을 할애하는 것조차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관련 기사: 여느 고등학교에서 상상할 수 없는 '민주광장', 아우성이 터졌다 http://omn.kr/1ywcj ).
전날 비가 내려 조금은 선선해질 거라고 여겼는데 웬걸, 후텁지근한 날씨에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날처럼 교실 에어컨이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아이들 역시 그 좋아하는 체육 수업을 마다하고 교실에 머물러있기를 바랄 정도로 덥고 습한 날씨였다.
행사가 치러질 야외 학습장에 미리 가봤다.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가 햇볕에 달궈져, 앉으려니 엉덩이가 다 따끔거렸다. 더욱이 행사는 하루 중 가장 더울 때라는 오후 3시경에 시작될 예정이라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당장 두 사회자부터 종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행사 시작 1시간 전, 장소를 부랴부랴 대형 에어컨이 설치된 체육관으로 변경했다. 서둘러 음향 장비를 옮기고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부채꼴 모양으로 설치했다. 기다렸던 행사라서인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도왔다. 채 20분도 안 돼 준비를 마쳤고, 이내 행사가 시작됐다.
입 여는 학생, 귀 여는 교사
오늘은 아이들끼리 무슨 이야기가 오갈까. 이젠 교사들도 기대와 설렘을 안고 행사에 함께한다. 이따금 교사의 수업 방식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진땀을 빼기도 하지만, 다들 기꺼워한다. 행사의 취지가 '학생은 입을 열고, 교사는 귀를 연다'는 것이었음을 공유하고 있어서다.
아이들이 치기 어린 말장난만 주고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단언컨대 편견이자 기우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진 않지만, 친구들의 되바라진 말과 행동을 제어할 만한 힘이 아이들에겐 있다. 교사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가 하면 스스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이번에 한 아이로부터 방과 후 수업 때 개설되는 강좌가 같다면 수업 교재를 다음에 수강하는 친구들을 위해 물려주자는 제안이 나왔다. 비록 새 책은 아닐지라도 수업을 듣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면서, 책값도 아끼고 친구 관계도 돈독해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해마다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교복 물려주기 캠페인'에서 창안했다는데, 그의 말마따나 교복은 되고 수업 교재는 안 될 이유는 없다. 자신뿐 아니라 친구도 사용하게 될 책이라고 여기면 조금 더 깨끗하게 쓰게 될 것이다. 원하는 친구들이 많거나 부담스러워한다면, 약간의 가격을 매기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무더운 날씨를 피할 순 있어 좋았지만, 사회자와 발언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전달되지 않은 건 '기회비용'이었다. 전교생이 모여도 절반은 텅 빌 만큼 공간 넓은 체육관이라서다. 마이크에 에코 효과를 뺐어도 황량한 체육관 벽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 울림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모여앉은 친구들끼리 잡담은 줄이고, 무대 위에 선 친구들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연신 조용해달라는 사회자의 호소가 이어졌으나,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자유롭게 자리를 잡은 까닭에 애를 먹었다. 결국 모두가 주목할 만한 주제가 올려져야 웅성거림이 멈춰질 것이었다.
▲ 이번 민주광장을 뜨겁게 달군 주제는 일과 중 전자기기 사용에 대한 허용 여부였다. 무대 위의 찬반토론에 졸거나 딴청 피우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보였다. |
ⓒ 서부원 |
그때 한 아이가 무대로 달려 나와 도발적으로 '금기'를 건드렸다. 수업을 제외한 일과 중에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자유로운 사용을 허락해달라는 것. 기실 전자기기 사용에 관한 내용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닐뿐더러, 최근에는 학부모들조차 요구하는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학생인권조례 제12조 제6항. 학교는 학생의 휴대전화를 비롯한 전자기기의 소지 자체를 금지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교육활동과 학생의 수업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제15조 제4항의 절차에 따라 정한 학교의 규정으로 전자기기 사용을 규제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 제15조 제4항. 학교는 학칙 등 학교 규정의 제·개정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수렴하여야 하며, 학생회 등 학생자치기구의 의견 제출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하여 소지는 하되, 사용은 하지 못하도록 자체적으로 규정했다. 일과 시작 전 학급별로 수합하고 종례 때 다시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혹여나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자면, 특정 수업이나 동아리 활동 등에 필요한 경우라면 담당 교사의 동의 아래 언제든 전자기기를 꺼내 사용할 수 있다.
"일과 중에 인터넷 강의(인강)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인강은 아이들과 학부모가 이구동성으로 전자기기 사용을 요구하는 유일한 이유다. 예습도, 복습도, 시험 준비도 모두 인강을 통해서 한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수능을 앞둔 고3의 경우엔 학교 수업보다 인강을 듣는 시간이 훨씬 긴 데다 더 효율적이라고 선선히 말할 정도다.
그 학생 발언 이후 다른 아이들도 무대를 오르내리며 토론이 제대로 붙었다.
"허용되면 인강을 듣기보다 유튜브 영상을 보며 키득거리는 경우가 훨씬 많을 거라고 봐요."
"음주 운전한다고 술을 없애고, 교통사고가 우려된다고 자동차 운전을 금지하는 꼴이잖아요."
"인강이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이길 수 없다고 봐요. '유튜브가 담배 끊는 것만큼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인강 수강 계획서를 사전에 제출하고, 인강 전용 교실을 따로 지정해 운영하면 어떨까요. 또, '원스트라이크 아웃' 등의 강력한 제재를 부과하면 부작용이 최소화될 거라고 봐요."
"인강이든 뭐든 허용되면 죄다 책상 위에 전자기기를 올려둘 텐데 전용 교실이 무슨 소용일까요. 장담하건대, 전자기기 부정 사용에 대한 단속은 불가능해요."
그들의 주장과 반론은 교직원 회의 때 교사들끼리 오가는 이야기와 조금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만큼 아이들이 성숙했다는 것임과 동시에, 교내 전자기기 사용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기 쉽지 않은 사안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 민주광장에서는 교사도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어야 한다. 첫번째 민주광장 당시 사회자에 의해 호명되어 무대에 선 교사의 모습. |
ⓒ 서부원 |
사실 처음 '민주 광장' 프로그램을 계획했을 때 별 무리 없이 정착될 거라 확신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학생들의 수중에 전자기기가 없다는 것. 만약 스마트폰 소지가 허용됐다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느라 무대 위 사회자에게 눈길을 주는 아이는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민주 광장'을 SNS 방식으로 운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스마트폰을 통한 만남과 토론이라면 굳이 학교에서 판을 벌일 이유는 없다. 만남이 교육에 우선할진대, 무릇 '민주 광장'은 대면일 때라야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근데 그럴 거면 방과 후 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신청하지 말고 집에 가서 인강을 들으면 되잖아요. 굳이 학교에 남아서 들을 필요가 있을까요."
한 아이가 왁자지껄했던 토론을 매조지었다. 듣고 있던 모두가 박수를 보냈고, 더 이상의 반론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아이도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다른 주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얄궂게도 내 수업 시간 모둠활동에 관한 불만이었다.
아이들은 민주 광장 시간이 체육 수업 시간만큼이나 짧게 느껴진다고 했다.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참여 덕분이다. 교실이었다면 채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책상에 쓰러졌을 텐데, 두 시간 동안 졸거나 딴청 피우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아이들의, 아이들에 의한 행사는 그렇듯 힘이 있다.
'민주 광장'을 감히 다른 학교에도 시도해보라고 추천하는 이유다. 대입을 앞두고 공부할 시간조차 부족하다고 아우성치는 현실이지만, 아이들에게 시험공부보다 더 소중한 경험이자 인생의 자산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 번째 '민주 광장'은 여름방학을 앞둔 7월 말에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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