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에 선택한 월남 파병, 생사 넘나들던 순간 못 잊어"

은평시민신문 김주영 입력 2022. 6. 2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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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베트남 파병 용사 장동철 어르신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은평시민신문 김주영]

ⓒ 픽사베이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월 6일 현충일부터 6월 25일 한국전쟁 그리고 6월 29일 제2연평해전까지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주요한 날이 줄지어 있습니다. 은평구에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법에 의거 퇴역군인, 예비역 등 병역을 마친 대한민국 국군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인 은평구 재향군인회가 운영 중입니다. 

기자는 최근 이 단체에서 준비한 강원도 철원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내 주요 시설을 도는 안보 답사에 참여했고 월남전 참전용사 장동철 어르신 내외를 만났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베트남 밀림에서 청춘을 바치신 어르신 얘기를 들으며 어떤 형태로든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얘기는 20세기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쳐 21세기를 살아가시는 장동철 어르신의 생애, 그 치열했던 삶의 발자취입니다.

"행방불명된 형, 껍데기 파편 수집 위해 목숨 걸어"
 
 베트남 참전용사 장동철(오른쪽) 어르신과 아내 조수빈 어르신.
ⓒ 김주영
- 일제강점기 유년 시절은 어떠셨나요?

"5남매 가운데 둘째였죠. 경기도 가평군 남면 복장리에서 나고 자랐는데 워낙 어려서인지 일본인 본 기억은 흐릿해요. 제 일본 이름도 기억 안 나요. 어른들이 한국 이름 부르지 말라고 하기도 했어요."

- 어린 나이에 해방과 6.25 전쟁을 모두 경험하셨네요.

"마을이 불탔어요. 머리 위로 비행기가 계속 날아다니며 휘발유 같은 끈적한 것이 벌판, 집 등지에 흩뿌려졌어요. 거기에 폭탄이 떨어지면 삽시간에 불바다가 돼요. 그 찐득한 것이 사람한테도 붙고, 많이 죽었어요.

기관총을 마구 쏘아 대 많은 집이 부서지고, 먼지로 뒤덮였어요. 제 식구는 이웃이 불바다가 된 것을 보고 밭으로 뛰쳐나가 (흰색) 옷을 벗어 허공에 휘둘렀어요. 군인이 아니라고 소리쳤죠. 다행히도 하늘을 빙빙 돌던 비행기가 가더라고요."  

- 전쟁 전후로 생계는 어떠셨나요?

"아버지는 젊을 때 영양부족으로 실명이 됐어요. 어머니는 일하고 싶어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써주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제가 고철 주워 팔며 부모님 봉양하고 동생들 먹여 살렸죠."

- 가장 역할을 하셨다고 했는데 혹시 맏형에게 변고를 뜻하나요?

"6.25 때 3년간 학교가 폐쇄돼 늦깎이로 졸업했어요. 이후 연천군 진상리로 이사 갔어요. 그때 강원도 탄광에서 일하던 형님이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중학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어요.

새로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포부대 및 사격훈련장이 있었는데 비무장 지대 방향으로 포를 쐈어요. 밤에 포탄 껍데기 파편을 수집하고자 바지 벗어 머리에 쓰고 임진강 건너 방향으로 도강했어요. 50분 사격에 10분간 멈출 때 포알 떨어진 곳에 들어가야 죽지 않아요."

- 가정의 생계를 위해 목숨 거셨군요.

"임진강 부근은 빨갱이가 넘어오는 길목이다 보니 군사경계가 삼엄했고 저와 제 동생이 적발된 때도 있었죠. 동네 이장과 반장 이름을 묻고 확인되면 압수한 고물을 돌려줬어요. 나이가 어리니깐 봐준 거죠. 고철을 고물상에 팔면 4~5인분 국수 한 봉지를 살 수 있었어요.

그 외 주변을 배회하며 감자 이삭, 도토리, 칡뿌리 등 먹을 수 있는 건 다 뜯어왔어요. 도토리는 까맣게 되어 쓴맛이 다할 때까지 울어 먹고 마지막엔 맷돌에 갈아서 사카린(당류)에 섞어 달콤하게 먹었죠. 이마저 떨어지면 굶지 않으려고 다시 포격장에 갔고요."

- 좋은 추억도 있으실까요?

"교회요. 과거에 형이 빨갱이로 오해받아 인민군수용소에 격리된 때가 있었는데 당시 미 선교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란 만화책을 받았대요. 그걸 제게 줬었죠. 행방불명되기 전이에요.

거기에 '오병이어 기적' 얘기가 있었어요. 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는 얘기잖아요? 믿지 않았죠. 그래도 이런 배고픈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고 계속 생각나더군요.

한국전쟁 직후 코 큰 선교사들이 여기저기 교회를 세웠어요. 호감이 있던지라 나갔죠. 그런데 이따금 미국이나 영국에서 받은 구호품을 나눠주는 거예요. 통조림, 우유 가루, 강냉이 가루, 옷과 신발 등을 받았죠. 먹을 거 구하러 산을 헤집고 도토리나무에 올라가면 바지가 다 째지거든요. 너덜너덜한 옷 사이로 살이 드러나는데 뭐 어쩌겠어요. 당시 남녀노소가 다 그랬죠.

그래서 교회 선교용 물품 하나하나가 귀했죠. 목사님을 하나님같이 섬겼어요. 이웃 먼저 챙기고 기도하는 게 주 업무여서 저희가 돌아가며 땔감도 해드리고 (성미) 쌀도 드렸죠. 안 챙겨드리면 굶으시겠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전도사님이셨다고. (웃음)"

죽어도 밥이나 실컷 먹자는 심정으로 월남 파병 지원
 
 "죽어도 밥이나 실컷 먹자는 심정으로 베트남 파병 지원"
ⓒ 픽사베이
   
-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내 성인이 되셨군요.

"20살이 되자 바로 영장이 나왔어요. 입대 후 훈련소 생활을 마치니 백마부대에서  월남 파병 지원자를 모집했어요. 가면 진짜 죽을 수 있단 생각에 다들 피하는 분위기였지만, 저는 죽어도 밥이나 실컷 먹자는 심정으로 지원했죠.

현장에 가니 생지옥이었어요. 항구에서 부대로 이동하는데 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어요. 군용차량 밖으로 총구를 내놓고 있었는데 도로 사정이 안 좋아 심하게 덜컹거렸어요.

어느 병장이 그 반동에 방아쇠를 실수로 당겨 한 부대원이 맞고 쓰러진 모습을 앞에서 봤죠. 설상가상 부대에 도착하니 사망한 동료 시체 앞에서 흐느끼던 부대장들이 보였어요. 헬리콥터에 싸늘한 주검이 실리는 걸 보며 제가 처한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 첫날부터 트라우마가 생기셨네요.

"베트남 밀림은 정말 무서웠어요. 소대장은 보통 조용한 야간에 매복 작전을 명령했어요. 저희는 클레이모어(Claymore, 산탄 지뢰)를 설치하고 야간투시경으로 베트콩의 예상 이동경로를 감시했어요.

우리 적은 베트콩뿐 아니라 야생의 큰 뱀이나 도마뱀 따위도 있었죠. 3m 길이의 징그러운 녀석이 클레이모어를 끌고 가기도 했고요. 매분 매초 긴장 상태였어요. 그래도 조명탄을 안 터트리면 밀림에 숨어 전진하는 게 대낮 시가전보다 안전하죠.

45kg 군장을 메고 기관총을 교대로 들며 오랜 시간 행군하면 몸 염분이 다 빠져나가 군복이 하얗게 물들거든요? 그래도 시가전보단 나요.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니깐요."

- 살아 있는 거 자체가 기적이었군요.

"그렇죠. 낮에는 뛰어가는 것도 바로 보이고 뭐든 다 드러나요. 소대장이 분대를 최대한 쪼개 몰살당하지 않도록 굉장히 신경 썼어요. 우리가 이동하면 총소리가 들려요. 우리 쪽 방향이 아니어도 꼭 나를 향해 쏜 듯한 기분이 들죠. 그 소리를 뚫고 달리며 몸을 더듬죠.

'아직 내가 안 맞았구나'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했죠. 전쟁이 끝나질 않으니 똑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전방에 계속 있었어요. 시노콥터(시누크 헬기, 쌍발 수송용 헬리콥터)가 보름 간격으로 날라와 실탄, 레이션(ration, 식량 및 물) 등을 떨궈줬죠."

- 식수까지 보급받았나요?

"네. 개울가에 가서 물 뜨면 바로 총알이 날아오거든요. 적도 아는 거죠. 그래서 저희처럼 최전선에 있는 소대는 안전한 위치를 확보하고 연막탄을 터트린 후 헬기로부터 보급품을 받았어요. 근데 이것도 바위나 나무에 떨어지면 뭐, 실탄도 다 흩어지고 물과 식량도 잃고 그래요."

"월남전 때 가진 결심 그대로 정직한 삶 살고자 노력"
 
 은평구재향군인회 회원들이 6월 호국보훈의달을 기념하고 있다.
ⓒ 김주영
    
- 국가보훈처에서는 고엽제(defoliant, 밀림 내 초목 및 잎사귀 등을 말라 죽게 하는 제초제) 후유증에 대해 예우 보상하고 있습니다. 귀국 후 몸은 괜찮으신가요?

"다행히 제 분대원은 모두 살아 돌아왔습니다. 저는 혈압약만 처방받을 정도로 다른 전우에 비해 큰 후유증이 없어요. 우리 국군도 고엽제 피해를 많이 봤죠. 그 하얀 가루가 뿌려진 지역에선 동식물은 물론 사람도 죽어요. 생명체가 살 수 없어요. 온몸이 가렵고 눈물 콧물 쏟아지는 화생방 훈련 기억하죠? 방호복 제대로 입지 않은 상태에서 그 가루에 노출됐다고 생각해봐요. 완전히 몸 망가지는 거죠."

-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낀 바가 있으시다면.

"굶주림으로 선택한 월남 파병이었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란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남의 것을 탐하면 안 된다'는 결심도 하게 됐죠.

군에서 신신당부한 내용이 있어요. '베트남 민간인을 쏘면 안 된다. 금품 탈취하면 안 된다' 등이었어요. 솔직히 베트콩이 민간인 복장으로 돌아다니며 공격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저는 철저히 그 선을 지켰죠.

저희 분대장도 같은 기독교인이라 함께 기도를 자주 했습니다. 저도 전쟁터에 있다 살아 돌아온 만큼 그 다짐만큼은 꼭 지키고자 지금도 노력 중이에요."  

- 무사히 살아 돌아와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밖에 안 나옵니다. 이후 삶은 어떠셨나요?

"저는 제대 후 택시, 버스를 몰았고 현재 청소 업무를 합니다. 최근 30만 원이 든 가방을 습득했고 주인을 찾아 드렸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주인 옆집이 제가 청소하는 곳 중 하나인 여동생댁이라는 거예요.

게다가 여동생 남편께서 월남전 때 소대장이셨어요. 세상 참 좁죠? 청소 갈 때마다 연신 고맙다 하시는데 부끄럽더라고요. 앞으로도 월남전 때 가진 결심 그대로 정직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은평 재향군인회 행사에도 잘 참석하고요. (웃음)"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군인은 누구보다 평화를 기원한다. 전쟁으로 가장 많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군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어떤 안보교육, 보훈의 날 행사보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느낀 바가 큰 하루였다. 국가유공자 장동철 어르신의 삶을 <은평시민신문>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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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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