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 학문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나다

한기홍 입력 2022. 6. 28. 11:2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승을 말한다] 괴테 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②

치열한 정진의 과정 속에서 좋은 스승은 홀연히 나타난다. 제자는 스승을 만나 도약의 결정적 계기를 맞고, 스승은 제자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독보적인 괴테 연구가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두 스승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기자말>

[한기홍 기자]

☞이전기사 : 고향을 등진 소녀, '읽기'를 시작하다
 
 전영애 교수가 독일어로 쓴 평생의 연구성과는 독일에서 여러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 주미영
대학시절은 1969년 박정희의 집권 연장을 위한 3선 개헌과 더불어 시작됐다. 학생은 거리로 나갔고, 교정은 노상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군인이 학교 안까지 들어와서 학생을 잡아갔던 시절이다. 

친구는 감옥에 가 있었고, 그는 '더없이 착잡한 마음으로' 학교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공부도 조금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투쟁이 절박한 시절에도, 그 다음의 시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많은 자문(自問)과 일말의 합리화 사이에서 전영애는 고민했을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생전 처음으로 독일어 원서(횔덜린의 '휘페리온')를 샀습니다. 그게 너무도 귀해 노상 안고 다녔지요. 읽기보다는 들고 다녀서 낡았던 책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받는 날이면 충무로에 있던 독일 책 전문 서점 '소피아'로 달려가 책을 샀습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olderlin, 1770~1843)은 반평생을 정신 착란으로 불우한 생을 살았던 독일 시인이다. 20세기 초에 와서야 비로소 현대의 시인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은 '진정한' 시인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를 '시인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 여백재 대들보에 쓴 글 여백서원 본관 여백재 천정 대들보에 전영애 교수가 쓴 글. '여백서원'과 후학, 시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 주미영
 
'휘페리온'은 이 천재가 남긴 소설이다. '그리스의 은둔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리스인 히페리온이 주인공인데, 그는 그리스 해방전쟁에 참여했다가 '대의'(大義)에도 불구하고 야만적일 수밖에 없는 전쟁에의 환멸로 자연에 은둔했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친구에게 보낸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당시 서울대 독문과 학생들은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종로 5가를 지나 청계천으로 책방 순례를 나섰다. 헌책방과 LP레코드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선 곳이다. 또 다른 특별한 외출은 서울 최고의 거리 명동과 충무로로 나가는 것이다. 옛 사보이호텔 옆 건물 3층에 자리했던 독일어원서 전문점 '소피아'로 가는 길이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높은 천정까지, 멋진 독일어 원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마도 이 서점은 전영애의 '마음의 고향' 중 하나가 되어 있으리라.   

1985년대 중반부터 동서독 분단문학에 주목

대학 시절 수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시국도 엄혹했지만 독문학과 수업의 수준은 함량 미달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수업하지 않는 교수도 있었다. 전영애는 "비가 오는 날은 그렇다 치고, 그 선생님은 흐린 날에도 수업을 하지 않으셨다"며 파안대소했다.

<파우스트> 강독은 제2부 초반에 머물러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독일문학사 강의는 희곡 작가 한 명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너희가 제 아무리 공부해도 독일 교수의 조교나 할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수업 시간에 들었던 시절이다. 여학생에 대한 편견도 심했다. 어떤 교수는 전영애의 맹렬한 공부가 "비극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나훈아의 유행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빗대어 조롱한 것이다.

1974년 졸업할 때는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막상 졸업을 하려니, 정말이지 배운 것이 너무도 없어서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배움에의 갈증은 커지기만 했다. 그러나 석사과정을 마치고 난 후의 10여 년은 암울했다. 공부를 해야겠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전망이 없었습니다. 산적한 사회적, 개인적 문제를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독일 유학의 길이 열리긴 했죠. 두 달밖에 안 된 아이를 두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독일에서 세 학기만을 마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유학시절 수업시간 외에는 도서관이 열려서 닫힐 때까지 거기 앉아 미친 듯이 자료를 모았습니다. 헌책을 닥치는 대로 사고, 산더미같이 복사를 했습니다."

그때는 유학을 떠나면 반드시 학위를 받아 '금의환향'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마무리하지 못한 유학에서 돌아오니 상황은 더 나빠졌다. 독일에서 겨우 시작한 공부를 이제는 막막하게 집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해야 했다. 볼 책은 자꾸 늘어나는데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구한 책들은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 읽었습니다. 집중해서 읽기 위해 늘 동시에 번역을 했습니다. 타이핑을 하도 많이 하니까 젓가락질을 못할 정도로 손가락에 무리가 갔어요. 그 때 타자기는 교정기능이 없어서 책 한 권 번역하려면 다섯 번 정도는 타이핑을 해야 했습니다." 
 
▲ 여백서원 댓돌 여백서원 댓돌에 놓인 전영애 교수의 검정고무신. 평생 검약했고, 지금도 여백서원을 혼자 관리하기 위한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 주미영
 
번역이 마무리 되면 책에 대한 분석 글도 썼다. 파울 첼란의 난해한 시도 전체를 다 번역했다. 번역 이후에 쓴 글이 모여서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 파울 첼란의 시>가 됐다.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을 다듬은 책이다.
파울 첼란(1920~1970)은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독일인이다. 아우슈비츠 체험을 바탕으로 비극적인 서정시를 썼다. 첼란은 '죽음을 부른 나라의 언어(독일어)로' 그 아픔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의 첫 연에는 비애와 절망이 가득하다. 그 주문(呪文) 같은 언어를 전영애는 거의 글자 그대로 옮겼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1985년대 중반부터 동서독 분단문학에 주목했습니다. 크리스타 볼프의 '나누어진 하늘', 라이너 쿤체의 '민감한 길'과 '참 아름다운 날들'을 번역했습니다. 동독에서 출간된 책들이었죠. 번역한 글은 대부분 서랍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어쩌다 기회를 만나 책이 되기도 했습니다. 번역 후 쓴 글들이 '독일의 현대문학: 분단과 통일의 성찰'과 같은 책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의 버릇은 평생 지속됩니다. 남의 나라 문학이 본업인지라 책을 분석한 글은 저절로 독일어로도 쓰게 됐고, 그러다 보니 독일에서도 저서가 제법 여러 권 나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도서관들에 제자리를 만든 일이 보람

2016년 퇴직하여 연구실을 떠날 때, 전영애는 250개 박스 분량의 책을 꾸렸다. 그 책들이 여백서원의 일부가 됐고, 이제는 여러 사람과 나누어 읽고 있다. 퇴임 후에는 서원을 혼자 돌보느라 그전보다 일이 훨씬 더 많아졌다. 읽고 옮기고 쓸 책도 더 늘어나, 주경야독의 생활이 더 깊어졌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서원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늦은 밤이다. 작은 등불을 들고 캄캄한 후원을 걸어 작은 단칸방 집의 불을 켤 때다.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인 것이다. 하긴 그가 책을 읽는 공간은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언젠가 그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돌아보니 세상에서 한 가지는 야무지게 해낸 일이 있다. 좋은 도서관들에 제자리를 만든 일이다. 뮌헨에도, 베를린에도, 바이마르에도, 케임브리지에도, 잠시 들른 더블린과 시카고에까지도 괴테의 G자 어름쯤의 서가 가까운 창가, 한 그루쯤 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곳에 내 자리가 있다. 아니, 세계는 내게 도서관 내 자리의 망(網)이다. 세상 어딘가에, 곳곳에,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리로 나를 찾아올 만큼, 때로는 우편물이 그리로 올 만큼의 내 자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부유함인지. 그런데 도서관에서야 어딜 가든지 그냥 앉아만 있으면 내 자리가 되니 쉬웠다. 달리 지상 어디에 그리 쉽게 한 자리가 생기겠는가."

전영애가 꼽는 잊을 수 없는 세 사람이 있다. 두 명의 스승, 한 명의 열렬한 학문적 후원자다. 세 사람 모두 독일인으로 그의 정진과 도약에 큰 힘이 되어 준 사람들이다. 몇 년 전 별세한 후원자는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감사를 지낸 알프리드 홀레(Alfried Holle)씨다. 
 
▲ 서동시집 초판본 독일 괴테학회 재무이사를 지냈던 알프리드 홀레가 전영애 교수에게 기증한 괴테 <서동시집>의 초판본. 1819년 간행된 것으로 희귀본 중의 희귀본이다.
ⓒ 주미영
 
나머지 두 사람은 '학문의 스승'과 '시의 스승'이다. '학문의 스승'은 독일 문학의 대가이며, 세계적인 비교문학 연구가 헨드릭 비루스(Hendrik Birus)다. 전영애는 그에게 괴테 <서·동시집>의 진수를 배웠다. '시의 스승'은 우리 시대 독일을 대표하는 한 시인 라이너 쿤체(Reiner Kunze)이다. 학문의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에 대해 전영애는 그의 책 <인생을 배우다>에 이렇게 썼다.
"(홀레 씨가 돌아가신 직후) 서울의 학교로 돌아오니, 책 200여 권이 담긴 상자들이 항공우편으로 도착해 연구실에 높이 쌓여 있었다. 나는 말을 잃었다. 홀레 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내신 것이다. 내가 괴테 공부를 한다고 괴테의 '서·동 시집' 초판본(1819년)과 '파우스트' 희귀본(1854년)을 전해 주셨는데, 이제 그 가치를 평가조차 할 수 없는 귀중본이 담긴 상자들이 또 온 것이었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 씨는 가장 귀중한 책을 내게로 보내셨다. 그 책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른다." 
 
▲ 괴테 <서동시집> 에세이 독일에서 출간된 전영애 교수의 괴테 <서동시집>에 대한 7편의 소논문집. "영원한 생명을 간구하며"라는 제목을 달았다.
ⓒ 주미영
 
그 전에 잠깐 인연이 있었지만 1999년 괴테 탄생 250주년 때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념 학회에서 홀레씨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전영애는 괴테의 서·동시집에 대해 강연을 했는데, 홀레 부인은 끝난 후에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제안을 했다.
"사양을 하고 호텔에 갔더니 과일 바구니를 보내셨더군요. 와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쪽지와 함께. 할 수 없이 갔는데, 그때 제가 관심 있을 만한 책과 기사들을 손님방 책상에 가득 늘어놓으셨어요. 그걸 다 읽고 오느라 무려 열하루가 걸렸어요. 괴테 '서·동시집' 초판본을 보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죠. 나중에 그 책이 저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홀레씨는 '문학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분이었어요. 독일의 아주 건강한 교양시민입니다. 속물적 의미의 '교양인'이 아닌 진짜 '교양인'이죠. 독일의 괴테, 쉴러, 베토벤, 모차르트는 실상 두터운 교양시민 계급이 만든 겁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무렵 홀레씨 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괴테의 시 한 편으로 바이마르의 상징이 된 게 은행잎입니다. 아주 어린 손주들이 은행잎을 본뜬 쿠키를 직접 구워 제게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괴테의 아주 긴 시를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암송하였던  겁니다. 제가 쓴 독일어 책과 비교문학을 하는 제 딸의 논문까지 진열해놓으셨어요. 이런 분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는 게 제 인생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 전영애 헨드릭 비루스 2011년 바이마르 괴테협회가 수여하는 '괴테 금메달' 상을 받고 스승 헨드릭 비루스 교수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 전영애
 
세계적인 석학에게 받은 놀라운 제안

'학문의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난 계기도 홀레씨가 다리를 놓았다. 두 사람은 전혀 교류가 없었다. 홀레씨 집에서 열하루를 묶고 떠나려 할 때, 그는 전영애에게 "지금 독일 남부에서 괴테 서·동시집 세미나가 열리는데, 참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헨드릭 비루스의 괴테 서·동시집 세미나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죠.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세미나가 열리는 남부 독일로 향했습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들어가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어요. 맨 앞자리에 앉아 눈을 반짝거리며 강의를 듣던 작은 체구의 동양인 여성의 모습이 비루스 선생의 눈에 띄었겠죠. 선생님이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묻길래 뒤셀도르프 박물관에서 괴테 서·동시집 강연을 하고, 홀레씨 집에  열하루를 묶은 후 세미나에 오게 된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비루스 선생님이 '토요일 저녁 때 내 강연이 잡혀 있는데, 나 대신 강연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죠. 세계적인 석학에게 이 놀라운 제안을 받았으니까요.

'품이 넓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다음날 서·동시집에 대한 강연을 와들와들 떨면서 했는데, 강연 내내 비루스 선생님이 눈을 반짝이면서 제 강연을 경청하셨습니다. 강연을 끝내자 선생은 놀랍게도 키스를 해도 되냐고 묻더니 장한 소년에게 하듯 이마에 키스를 해주셨어요.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근처의 들판을 산책하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때 제가 막 스물일곱 번째의 독문학 관련 책을 내고 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 번 더 가볍게 키스를 해주시더군요. 살면서 세상에서 받아본 적이 없는 큰 격려였습니다. 비루스 선생님과 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죠. 독일문학이나 독일 학회에 대한 그 어떤 질문에도 늘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방대한 지식의 스케일, 유쾌하고 명확한 태도가 마치 괴테의 현현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독일학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성장한 선생님의 제자들과도 아주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 학계 곳곳에 아주 든든한 거점을 확보하게 된 것이죠."

* 3부(라이너 쿤체와의 만남, 시와 학문을 아우르다)로 이어집니다. 
 
전영애는....
△1951년 경북 영주 출생 △1973년 서울대 독문과 졸업 △1985년 서울대 독문과 박사 취득 △1985년 경원대 독문과 부교수 △1996년 서울대 독문과 교수 △2006년 한국괴테학회장 △200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2008년 독일 뮌헨대 강사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수여 괴테 금메달 △2011년 서울대 교육상 △2011년 한국문학번역원 이사 △2014년 여백서원 건립 △2015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초빙교원 △2016년 서울대 정년 퇴임 △2020년 삼성행복대상 △2020년 이미륵상 △2021년 라이너 쿤체상 △'괴테 시 전집'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 '파우스트 I·II' '괴테 서·동 시집' '데미안' '변신·시골의사' 등 70여 권 번역 및 소개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글쓴이 한기홍은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공채 24기)에 입사했다. 이후 월간중앙에서 오랜 기간 기자로 일했다. 사회팀장, 정치팀장을 거쳐 선임기자로 다양한 분야 인물 인터뷰 기사와 탐사보도에 참여했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현상을 세계사적 흐름과 견줘보며, 여러 인물 간의 조화와 긴장관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꿈이 있다. 거장의 수업시대와 스승의 가르침을 주제로 한 이 기획도 그 작업의 일환이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