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령병·행정병 긁어모은 '김포사' 분투..아군 후퇴시간 벌었다 [Focus 인사이드]

남도현 2022. 6. 2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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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적은 한강을 건넜다

적의 진공을 늦추기 위한 교량 폭파는 전쟁 중 흔히 볼 수 있는 통상적인 작전이다. 그럼에도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있었던 한강교(인도교, 철교) 폭파는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군의 철수가 완료되고 적의 도하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실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나 이런 원칙을 놀랄 만큼 지키지 않았고 그나마 철교 일부는 폭파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너무 성급했다.

폭파된 한강 인도교에 방치된 차량 잔해. 북한의 기록 영화에 등장한 장면이다.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벌어진 참사였다.


다리가 폭파되기 직전에 북한군 주력은 당시 서울의 경계인 미아리 고개 북쪽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단지 전차 2대가 미아리 고개를 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폭파가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다. 도심에서 고군분투하던 아군에게 어떠한 통보도 전해지지 않았다. 더구나 교량을 통제하지도 않아 피난민을 포함해 막심한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다. 이후 관련 재판에서 책임 소재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을 만큼 어이없는 참사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놀랍게도 추격을 멈추고 도심에서 3일간 머물렀다. 전쟁 초기에 승기를 잡았으면 추격을 계속해 결정타를 날리는 것이 상식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북한군의 이런 행동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다. 덕분에 한강 이북에 고립된 국군 중 일부가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었다. 당사자인 북한이 지금까지 이유를 밝힌 바가 없어서 이 3일의 시간은 현재도 미스터리로 취급된다.

파괴되지 않는 한강 철교를 이용해 도강하는 T-34 전차. 이처럼 한강교 폭파는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다.


당연히 많은 이유가 거론된다. 그중에는 비록 과정은 문제가 많았지만, 꽤 오랫동안 한강교를 파괴한 덕분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3일간의 지체를 설명하는 근거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일단 앞서 언급한 것처럼 3개의 철교 중 2개는 폭파에 실패한 상황이었다. 이들 철교는 6월 30일,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으므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원하면 공격 통로로 즉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북한군이 이미 한강을 건너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군이 서울 방어에 매몰되어 있던 6월 27일에 북한군 제6사단이 개풍군에서 도하 장비와 나룻배 등을 이용해 한강 하구를 건넌 후 김포반도를 거쳐 경인가도로 남하하던 중이었다. 만일 이들이 조기에 영등포를 점령한다면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시키려던 아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만한 위기의 상황이었다.


생각보다 의의가 큰 전과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적이 등 뒤에 나타나자 육군본부는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이하 김포사)'를 방어전에 투입했다. 김포사는 정보학교를 근간으로 공병학교, 보국대대, 기갑연대 일부, 제12연대 일부, 제22연대 일부에서 병력을 긁어모아 창설한 급조부대였다. 상황의 위중함을 잘 알기에 당시 국군의 귀한 자산이던 M8 장갑차까지 지원했으나 병력이 1개 연대에도 미치지 못했고 대부분이 행정병이나 훈련병이어서 전투력도 보잘것없었다.

전쟁 전 시가행진에 등장한 독립 기갑연대(현 제8기동사단 예하년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소속 M8 장갑차. 27대만 보유한 귀한 전력이었으나 김포전투사령부를 지원하기 위해 이중 3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김포전투사령부의 임무가 막중했다.


그렇게 급편된 김포사는 곧바로 통진으로 달려가 방어전에 나섰으나 압도적인 북한군에게 밀렸다. 결국 6월 28일, 김포면(현 김포시 김포본동)을 피탈 당하자 사령부를 소사읍(현 부천시 심곡동)으로 이전하고 개화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더구나 그 와중에 사령관 계인주 대령이 실종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처럼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육군본부는 김포공항을 즉시 탈환하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미군의 참전이 예상되는 데다 행주나루에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제1사단을 보호하기 위해 김포공항을 확보해야 한다고 본 것이었다. 명령에 따라 김포사는 공격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선봉에 섰던 안영작 대위, 강문헌 대위, 김일록 중위, 박영수 소위, 김수동 소위 등의 중간 간부들이 전사했고 현장에서 이들을 지휘한 최복수 중령은 단신으로 지프차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적진을 유린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작전이 실패하자 임시 사령관을 맡아 김포사를 지휘하던 우병옥 중령은 공항이 내려다보이는 원미산 중턱에서 자결했다. 그럼에도 김포사는 북한군 제6사단의 남진을 7월 3일까지 저지하며 영등포와 경인가도를 방어하는 괴력을 펼친 후 다음날 해체되었고 잔여 병력은 시흥전투사령부에 흡수되었다. 이처럼 활동 기간이 짧았고 인상적인 전술적 승리도 없는 데다 전통을 승계한 부대도 없기에 김포사의 분전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 전 시가행진에 등장한 독립 기갑연대(현 제8기동사단 예하년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소속 M8 장갑차. 27대만 보유한 귀한 전력이었으나 김포전투사령부를 지원하기 위해 이중 3대를 파견했다. 그만큼 김포전투사령부의 임무가 막중했다.


그러나 제일 먼저 한강을 넘어온 북한군을 일주일 가까이 잡아 놓은 의의는 상당했다.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될 수 있었던 아군 주력이 경부가도로 후퇴할 시간을 얻은 것이었다. 6.25 전쟁 발발 당시에 춘천에서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을 막아낸 승전보는 북한의 초기 전쟁 전략을 무너뜨린 쾌거로 많이 알려져 있다. 김포사의 분투도 결코 이에 못지않았다. 그들의 잊힌 노고가 좀 더 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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